허송세월 - 초판한정 김훈 문장 엽서 나남신서 2168
김훈 지음 / 나남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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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멀어져 갔지만, 나는 아직 술을 끊은 것이 아니다. 나는희망의 힘에 의지해서 살지 않고 이런 미완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_ 늙기의 즐거움 중 - P20

주어와 술어를 논리적으로 말쑥하게 연결해 놓았다고 해서문장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주어와 술어 사이의 거리는 불화로긴장되어 있다. 이 아득한 거리가 보이면, 늙은 것이다. 이 사이를 삶의 전압으로 채워 넣지 않고 말을 징검다리 삼아 다른 말로건너가려다가는 허당에 빠진다. 이 허당은 깊어서 한번 빠지면헤어나지 못한다. 허당에 자주 빠지는 자는 허당의 깊이를 모른다. 말은 고해를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주어와 술어 사이가 휑하니 비면 문장은 들떠서 촐싹거리다가 징검다리와 함께무너진다. 쭉정이들은 마땅히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므로, 이 무너짐은 애석하지 않다. 말들아 잘 가라.

_ 말년 중 - P39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별으로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_ 허송세월 중 - P43

시간을 시각과 시각 사이의 흐름이라고 억지로 말하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말로부터 소외되지만, 허송세월하는 저녁에 노을을 들여다보면 나는 시간의 질감을 내 살아 있는 육신의 관능으로 느낄수 있고, 한 개의 미립자처럼 또는 한 줄기 파장처럼 시간의 흐름위에 떠서 흘러가는 내 생명을 느낄 수 있다.

_ 허송세월 중 - P48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_ 재의 가벼움 중 - P50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_ 재의 가벼움 중 - P54

태풍전망대에서 내려올 때 내 마음속에서 자연과 역사는 극심한 불화로 부딪힌다. 이처럼 크고 무서운 적대감의 뿌리가대체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봉우리들이 신록으로 덮이고또 백설로 덮여도 중무장한 적의의 진지들은 능선을 따라서 대치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으로 나의 산천예찬은 무색해진다. 이념의 깃발이 무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지층 아래 적개심은 날마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것인가.

_ 태풍전망대에서 중 - P103

과일을 먹을 때, 마주 보는 거울의 허상은 깨어지고, 그 자리에 꽃이 피어난다. 꽃을 설명해서는 꽃을 이해할 수 없고, 꽃을받아들이면 논리로는 알 수 없는 것을 몸이 안다.

_ 꽃과 과일 중 - P88

어린아이들은 길을 걸어갈 때도 몸이 리듬으로 출렁거린다. 몸속에서 기쁨이 솟구쳐서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뛰고 왼쪽으로뛴다. 아이들의 몸속에서 새롭게 빚어지는 시간이 아이들의 몸에 리듬을 실어 준다. 호랑이나 사자의 어린것들도 스스로 기뻐하는 몸의 율동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것들은 생명을 가진 몸의즐거움으로 발랄하고 그 몸들은 신생하는 시간과 더불어 뒹굴면서 논다. 이 장난치는 어린것들의 몸의 리듬을 들여다보는 일은늙어 가는 나의 내밀한 즐거움이다.

_ 시간과 강물 중 - P95

이 시대에는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절망감을 떨쳐 내기가어렵다. 말이 소통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이 시대는 좁은출구를 겨우 찾아갈 수 있을 터인데, 말이 적대하는 전투에 동원된 시대에 나의 말은 무력하게 들리지만, 무의미하지는 않기를나는 바란다.

_ 적대하는 언어들 중 - P110

정상적인 사유 능력과 감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 참을 수 없이 단순한 원시성과 한 세기에 걸친 불변의 무지몽매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죽음이 망각에 묻혀 일상화되면 사람들은 절망을 절망으로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_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 중 - P120

공원에서 연꽃과 물고기를 들여다보면서 장자를 생각했다.
연꽃이 장자고 물고기가 책이었다. 아름다운 것은 본래 스스로그러하다. 거꾸로 써도 마찬가지다. 내년 여름에는 또 새 매미가울겠지.

_ 여름 편지 중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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