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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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_ 호마이카상 중 - P9

어린 남매와 만삭의 아내
그리고 눈 내리는 성탄 전야
사랑도 혁명도 희망도
아비에게는 한끼의 봉지쌀도 되어주지 못하던
1960년대 그 미완의 성탄 전야

_ 슬픈 싼타 중 - P12

이제 나의 286은 천하무적이다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여도 어떤 사상을 꿈꾸어도 어떤 정치꾼을 욕한대도 어떤 정견을 갖고 있대도
아무도 모르는 오직 나와 286과의 암묵적인 약속, 수상한 문자는 깨끗이 지워준다는 불온한 유전자는 절대 유출하지 않는다는 외계와의 교신은 완벽하게 끊어준다는 알리바이를 확실히 담보해준다는 약속을 나는 철저하게 맹신한다 - P15

힘을 준다는 것
견디게 해준다는 것
시와 욕은 그래서 하나라는 것
이것이 나의 시론이고 개똥철학일 수밖에

_ 시의 힘 욕틔 힘 중 - P18

쌀 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서서 바라보면
배고픈 애인아
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
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
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
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
겨울을 살자
이 겨울을 살자

_ 겨울산 중 - P21

구절양장 산길을 타듯 솟구쳤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솟구치는, 굽이굽이 강물이 흐르듯 무심한 듯 유정하고 유정한 듯 무심한, 유장한 목청 하나로 세상과 맞장을 떴다는데, 그의 기타줄도 그렇게 울었다는데

_ 울어라 기타줄 중 - P23

꽃도 십자가도 없는
해묵은 먼지의 무덤을 열어보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네
최루가스 마신 듯 매캐한 눈물이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_ 눈물의 배후 중 - P27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_ 물푸레나무 중 - P29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_ 미황사 중 - P35

다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기계가 멈추고 기계가 돌아도
끝내 변하지 않는 사실
엄지와 검지의 굳은살로 밥이 된다는 것만 알아라
그것만 알고 있어라

_ 부업 중 - P45

잇몸 위에 솟아 있는 어금니 반쪽
혀가 상처를 입지 않으려면
밥알을 좌편향으로 굴릴 수밖에 없다
왼쪽 어금니를 착취하지 않을 수 없다
혀가 더 교묘해지지 않을 수 없다

_ 혀와 이 중 - P47

뭘 그까짓 샤프하나 땜에 주눅드냐고 비웃지 마라
손끝의 가벼움인지
손끝의 자유로움인지
가벼움도 자유도 여유도 애교도 뭣도 아닌
풍자도 은유도 거세된 시인이여
그 ‘적당히‘가 적당히 안되는 불온한 시인이여

_ 샤프로 쓰는 시 중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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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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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산문집이라 이제서야 읽었다. 현실의 분투하는 모습을 이리도 서정적인 문장으로 전달하는 젊은(?) 시인의 글에서 위로를 받았다. 아니 우리 아들이 이후 겪게 될 삶의 과정에 전해주고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고 우울한 마음들이 치유된다고 말하고 싶다. 소리도 질러보고 울어도 본 사람들을 보면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다.

1월에 군휴가 나오는 아들에게 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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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꽃이 피면 바지락을 먹고 - 그릇 굽는 신경균의 계절 음식 이야기
신경균 지음 / 브.레드(b.read)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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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책을 만난 느낌이다. 그릇을 굽는 저자의 음식이야기인데, 한 마디로 정갈하다. 나도 읽고 집사람에게도 읽어보라고 할 계획이다. 비닐하우스와 난방(석탄, 석유 등)으로 만들어지는 공장식 채소가 아니라 흙속에서 비와 바람, 햇빛으로 자라는 제철 음식이야기라서 반가웠다.

그래서 가장 맛있는 무우 철에 먹다 남은 무조각으로 무말랭이를 만들었고 이번주 무짠지를 만들려고 한다. 음식에 있어 자연에 순응하는 방식이 도전하는 방법보다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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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꽃이 피면 바지락을 먹고 - 그릇 굽는 신경균의 계절 음식 이야기
신경균 지음 / 브.레드(b.read)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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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자기 가마 불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아니, 냄새가 나면 안 된다. 연기까지 가마안으로 모두 들어가서 연기는 굴뚝으로만 나와야 한다. 그래서 소나무를 때도 소나무향이 나지 않는다. 훈제나 화로 장작과는 다른 절대 고온, 1300도 이상으로 타는 불은 무향무취다. 고결하다. - P232

입맛을 닮은 것일까? 어쩌면 맛 때문이아닐지도 모른다. 음식은 함께 먹은 이들, 그날 그때의 분위기를 몸으로 기억하게한다. 누구에게나 어느 음식을 먹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어느 장면이 있을 것이다. 그 음식을 좋아하는 건 그런 추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 P248

이번 겨울에 영사를 준비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사람, 다음 세대를 염두에 두는 마음이다. - P277

생선 풍년인 겨울에도 음력 보름 전후로는생선이 잘 안 잡힌다. 이 시기를 ‘월명기‘라고한다. 특히 정월 대보름 전후로 2주 동안달빛이 밝아지면 고등어, 갈치 등이 바닷물 속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물고기가 잘 안 잡히기때문에 일부 어선들은 출어를 포기하기도 한다. 이때 풍어제나 남해 별신제를 지낸다. 기장에서도 주야로 별신제를 지낸다. 무당이굿을 하면 사람들이 머리에 돈을 꽂아 준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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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꽃이 피면 바지락을 먹고 - 그릇 굽는 신경균의 계절 음식 이야기
신경균 지음 / 브.레드(b.read)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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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점점이 오고, 가을은 문득 온다더니 고개 한 번 들어 보면가을이다. 가을이네, 싶다가도 작업하다 먼 산 한번 바라보면 그새 가을이 지나간다. 내면의 세계에 몰입하다 보면 바깥을 볼 틈이 없다. 그래서 내게 가을은 더욱 문득 오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 P191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건 어쩌면 깊숙한 곳에 내재된 인간의 DNA일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내안에 가두는 거지 해결되는 게 아니다. - P200

당시 아내는 가벼운 채식으로 장만한다고 부전시장에 가서 장을 봐서 기차 타고 택시타고, 오지 가마까지 와서 샐러드를 만들어줬다. 파프리카 양상추 샐러드였다. 흔히 먹는 샐러드를 보고 내가 한 말은 "사료 주나? 계절에 나는 걸 먹어야지"라는 것이었다. 아내는그 말 한마디에 다시는 파프리카를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샐러드 하면 양상추, 파프리카, 양배추만 떠올리던 생각을 바꿨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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