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_ 호마이카상 중 - P9
어린 남매와 만삭의 아내 그리고 눈 내리는 성탄 전야 사랑도 혁명도 희망도 아비에게는 한끼의 봉지쌀도 되어주지 못하던 1960년대 그 미완의 성탄 전야
_ 슬픈 싼타 중 - P12
이제 나의 286은 천하무적이다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여도 어떤 사상을 꿈꾸어도 어떤 정치꾼을 욕한대도 어떤 정견을 갖고 있대도 아무도 모르는 오직 나와 286과의 암묵적인 약속, 수상한 문자는 깨끗이 지워준다는 불온한 유전자는 절대 유출하지 않는다는 외계와의 교신은 완벽하게 끊어준다는 알리바이를 확실히 담보해준다는 약속을 나는 철저하게 맹신한다 - P15
힘을 준다는 것 견디게 해준다는 것 시와 욕은 그래서 하나라는 것 이것이 나의 시론이고 개똥철학일 수밖에
_ 시의 힘 욕틔 힘 중 - P18
쌀 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서서 바라보면 배고픈 애인아 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 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 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 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 겨울을 살자 이 겨울을 살자
_ 겨울산 중 - P21
구절양장 산길을 타듯 솟구쳤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솟구치는, 굽이굽이 강물이 흐르듯 무심한 듯 유정하고 유정한 듯 무심한, 유장한 목청 하나로 세상과 맞장을 떴다는데, 그의 기타줄도 그렇게 울었다는데
_ 울어라 기타줄 중 - P23
꽃도 십자가도 없는 해묵은 먼지의 무덤을 열어보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네 최루가스 마신 듯 매캐한 눈물이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_ 눈물의 배후 중 - P27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_ 물푸레나무 중 - P29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_ 미황사 중 - P35
다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기계가 멈추고 기계가 돌아도 끝내 변하지 않는 사실 엄지와 검지의 굳은살로 밥이 된다는 것만 알아라 그것만 알고 있어라
_ 부업 중 - P45
잇몸 위에 솟아 있는 어금니 반쪽 혀가 상처를 입지 않으려면 밥알을 좌편향으로 굴릴 수밖에 없다 왼쪽 어금니를 착취하지 않을 수 없다 혀가 더 교묘해지지 않을 수 없다
_ 혀와 이 중 - P47
뭘 그까짓 샤프하나 땜에 주눅드냐고 비웃지 마라 손끝의 가벼움인지 손끝의 자유로움인지 가벼움도 자유도 여유도 애교도 뭣도 아닌 풍자도 은유도 거세된 시인이여 그 ‘적당히‘가 적당히 안되는 불온한 시인이여
_ 샤프로 쓰는 시 중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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