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나기 위해 내가 이러이러한 일들을 겪었고 힘든 시간을 다 지나왔던 거 같애.

-이 하나의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작가가 등장인물들에게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갖다붙인 거 같애.

 

-너를 만난 것도 행운이지만, 너를 만나기 전의 나의 과거 또한 나에게는 소중해. 그것이 비록 아픔의 추억일지라도. 온전히 나만의 것이니까.

-이 하나의 사건은 심히 놀랍지만 등장인물들의 과거 또한 과거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어. 그러니 등장인물들에게 마음이 가는 거겠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소설이다. 전자의 이야기가 아닌, 후자의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소설가. 소설을 만들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아니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하고픈 이야기를 맘껏 하게 해주는 소설가.

 

 

7년 전 초고를 만든 소설은 몇년 전 신문에서 본 기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박 작가는 "어느 사람이 무작위로 여러 사람에게 '모텔에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내자 이를 받은 사람 중 반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돈을 보내왔다는 기사를 보면서 모텔에 대해 써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집필 계기를 설명했다.

 

으악. 7년이나 잡고 있던 작품이라니. 작가의 끈기에 일단 박수를. 자신의 분신이랄 수 있는 하나의 작품을 저렇게 오래 품고 있다는 건, 그 만큼의 애정이 있다는 말. 이 소설은 허리 아래의 이야기가 있는 소설이다. 모텔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모텔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이야기.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약국도 어쩌면 허리 아래 이야기를 직업상 해야 되는 장소다.

 

 

1.

임신 테스트기를 사러 온 신혼의 부부가 약국에 들렀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목적이 뚜렷한 여자가 들렀고 남자는 약국 밖에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배회하다 부인의 부름을 받고 약국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도 여자는 스스럼없이 이런 말을 했다.

-결혼하고 이제 6개월이 지나가는데 왜 이렇게 임신이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남자가 조루면 임신이 잘 안 되나요? 조루면 정자가 난자까지 가기 힘이 들까요?

말하는 여자 말고는 모든 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특히 남자는 머리를 손을 매만지며 문을 열고 나갈 폼을 취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진지한 나무람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 역시 얼굴이 붉어질 농담의 내용이 아니라, 여자의 진지한 고민임을 알고 정자세를 취하고 대답을 했다.

-아직 오래 되지 않아서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두 분 다 나이가 어리시니. 금슬이 좋으면 또 애기가 늦게 들어서잖아요. 지금은 배란테스트기를 사용해서 배란기를 맞춰서 임신준비를 해보시구요. 정 답답하면 그때 병원을 가 보세요. 아마 여자분의 경우, 남자분의 경우, 각각의 경우를 다 검사할 거에요. 요새는 직업 때문에 정자의 수가 작아지는 경우도 꽤 많기도 하구요.

-어머. 그래요? 어떤 직업이 그렇죠?

-제 친구가 비행기 조종사인데, 그 직업도 그런 모양이더라구요. 게다가 환경호르몬이 좀 위험합니까. 직업 뿐만 아니라 남자의 정자에 위해가 되는 물질 또한 상당하지요.

-그런데 조루를 치료하려면 어떤 방식을 써야 될까요?

여자는 임신보다 조루가 더 심각한 눈치다. 임신을 빙자해서 남편의 조루를 치료하고픈 걸까. 자고로, 병은 떠벌리고 다녀야 낫는 법이다.

-조루인지 아닌지는 시간상으로 따진다기 보다는 부부간의 만족도로 따지는 경우가 크구요. 남자는 심리적으로 조루가 올 수도 있어요. 생전 처음 해보는 행위여서 서투른 신혼의 조루도 꽤 되구요. 그리고 부인과는 안되면서 다른 여자와는 잘 되는 경우, 이런 사람은 심리적인 경우고요. 심리적인 상담에 병행해 '졸로푸트'라는 처방약을 쓰기도 해요. 그렇지 않은 경우는 '비아그라' 같은 약 처방도 있구요. 조루라는 상황이 사람에 따라 다 다른거니까, 일단 부부간에 대화를 먼저 해보는 게 좋을 거에요.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건데, 넌 어때? 라든지 어떤 부분이 특히 좋았어? 라든지. 말로 털어놓고 시작을 하면 의외로 문제가 쉽게 해결되기도 하거든요.

 

1번은 허리 아래의 이야기는 병원 진료실 안, 보고 듣는 사람이 의사 한 명 뿐인 공간에서 내밀하게 하는 게 좋다, 라던 내 생각이 깨져 버린 계기가 되는 이야기다. 저런 이야기를 병원까지 가서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거며, 저 이야기가 그토록 숨겨야 되는 이야기인 것인가, 라는 의문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엔 남편의 부끄러움이 먼저 눈에 들어와 제발 여자가 입을 다물었으면, 라고 생각했지만 기왕에 여자가 입을 열었고 남자 또한 나가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듣는 판국에야, 나로선 최선을 다할 일이다. 다양한 방법,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한 이야기를 객관적인 입장의 사람에게 듣게 되면 아무래도 자신들의 상황 또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니까.

 

 

2.

가끔 이른 저녁 약주를 드시고 헤롱거리는 상황에서 콘돔을 사러 오시는 아저씨가 있다.

-어떤 게 좋아?  이거는 말이지. 촉감이 무뎌서. 요새는 그런 거 있다믄서. 건조하지 않게 하는 거.

-아. 네. 그렇지요. 여성분의 아래가 건조한 경우는 질 윤활제가 있지요.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생기면 아래가 건조해지니까요. 여성분이 자꾸 아파서 피하시면 이걸 쓰시는 것도 괜찮죠. 요새는 나이 드신 분도 많이들 찾으세요.

-그래? 그럼 이걸 쓰면 물이 줄줄 흐른단 말이지. 여자는 자고로..

얼굴이 무척 붉어지지만, 성희롱과 제품 설명의 아슬한 경계에서, 이 사람들이 이런 궁금점을 또 어디에서 물어보겠나 싶어서 붉어짐을 참고 말을 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이렇게 노골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점잖게들 말을 하신다. 그러나 어떤 표현을 쓰던 궁금한 건 매한가지고, 내가 답해야 하는 방식 또한 일관적이어야 한다. 가끔 흰머리의 노인이 오셔서 러브젤을 찾을 때, 늙은 할머니가 투덜거리면서 러브젤을 찾을 때, 그럴 때는 괜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죽어도 좋아'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그들의 절절한 마음은 아직 늙지 않은 나에게도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다.

 

 

3.

혈압이나 당뇨, 기타 고지혈증 같은 질환과 똑같이 신경정신과, 비뇨기과, 산부인과적 질환은 같은 등급이다. 더 높고 더 낮지가 않다. 되려 더 상담이 필요한 부분이 후자의 가능성이 크다. 몸을 팔기 시작해 서울에서 지방으로, 다시 시골 소도시로 급이 떨어져 내려온 어느 여자는 피임약을 일년 내도록 먹는다. 생리를 하게 되면 몸을 팔 수가 없기 때문이다. 3주 복용 후 1주를 쉬어야 된다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대도 소용이 없다. 다방 업주가 여자가 생리하는 꼴을 봐주지 않기 때문이며, 여자 또한 빨리 돈을 벌어야 되기 때문에 둘의 마음이 맞은 셈이다. 한동안 그렇게 먹던 여자는 어쩌다 좋은 남자를 물어 시집을 갔고, 가자마자 아이를 씀풍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이지만 왠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예술과 외설의 한끗 차이처럼

보통 사람들의 외설과 자신의 생활 속 일상은 섞인다.

 

 

 

<에메랄드궁>의 여자, 연희 또한 아이를 씀풍 낳았다. 남의 남자를 유혹해 임신도 하고, 야반도주도 했으나 행복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그 순간엔 죽어도 좋을 듯이 사랑했던 남자가, 지금은 곁에 있는 것 만으로 싫으며, 밥 먹는 것도 꼴 보기가 싫다. 힘들게 번 돈과 우연히 남편에게 생긴 돈을 합해 차린 모텔. 그곳에서 그들은 일을 하고, 잠을 자고, 생활을 한다. 시골 소도시 조차 밤이 되면 불야성인 모텔을 올려다볼 때면, 모텔을 드나드는 사람이 아니라 모텔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나는 궁금해졌다. 그들은 하루종일 무얼 하며 지낼까. 모텔을 지키는 사람. 모텔을 청소하는 사람. 모텔을 들락거리는 사람. 모텔에 달세를 끊고 기거하는 사람. 모텔에 몸을 팔러 오는 사람. 모텔 인근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가족까지.

 

모텔에 얽혀 갖가지 사연을 주렁주렁 매달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쩜 그 주인은 콘돔을 사러 내 가게에 들렀을 수도 있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3-03-3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도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네요.
옛날에 동네 약사들은 죄다 여성이더라고요. 콘돔을 사야 하는데
도무지 말은 못하겠고 막 돌아다니다가 나이 지긋하신 남성분이 게식는 거 보고 냉큼 문열 열고 들어가는데
그 나이 지긋한 아저씨는 온 데 간 데 없고 불쑥 젊은 딸이 나오는 겁니다.
아버지, 어서 들어가서 식사하세요...
뭐 드릴까요 ?

아버지 약사분은 흐뭇한 표정으로 딸을 지켜보고 있더란 말이죠.
결국 박카스 하나 먹고 나왔습니다. ( 실화임.. )

달사르 2013-03-31 22:5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나요? 겨우 한 군데 찾아서 안심을 하다가 순간 엄청 당황하셨겠어요. ㅎㅎㅎㅎㅎ. 아무래도 머쓱해하면서 들어오는 남정네들이 꽤 되죠. 차라리 얼굴을 모르면 상관없는데 아는 단골이라든가..의 경우는 콘돔을 살 때는 모르는 약국 가서 사더라는..

실은..약사들도 다른 약국에 들어가서 콘돔 사는 게 좀 부끄럽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습니다.
당장 저부터도..아..자신이 없어요. ㅋㅋㅋㅋ

다락방 2013-03-3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달사르님. 한수철님 말씀처럼 좋은 소설이 탄생할 것 같아요. 음, 제가 생각하기엔 한창훈의 [나는 여기가 좋다] 류의 소설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도전해봐요, 응원할게요!!

달사르 2013-03-31 23:0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소개해주시는 한창훈의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모기장에 모기 들어오듯 단속을 해도 해도 들어오는 그놈의 정, 에 관한 이야기라니요.
급호감이 갑니다요. (헤헤. 다락방님의 리뷰를 벌써 훑어봤지용~)

일기 쓰듯 조금씩 조금씩 분량을 만들어볼까요? ^^

탄하 2013-04-0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뜻한 그린이네요.
민트색도 있어서 아주 시원합니다.

흐흐..예술과 외설의 한끗차이...^^
약국의 처방, 상담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네요.
'이걸 쓰면 물이 줄줄 흐른단 말이지'에서 철푸덕..ㅋㅋ

어찌보면 동네 구멍가게에서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피어나는 곳이 약국인지도 모르겠네요.
진짜 약국에서 벌어진 일로 소설 한 권 써보셔도 좋겠어요.
정말 재밌고, 느끼는 것도 많아요.

달사르 2013-04-09 21:37   좋아요 0 | URL
색깔 이쁘지여? 둔황에 가서 슬쩍... 힛.

철푸덕..ㅠ.ㅠ 부끄럽습니다..ㅠ.ㅠ ㅎㅎㅎㅎ

이래저래..부탁받은 일도 마무리하고, 몇 가지 일 좀 더 정리해놓고..
제가 능력이 되는지 끄적거려라도 보게요.

하루키는 일과 마치고 어두컴컴한 부엌(인가 그 비스무리한 곳)에서도 글을 썼다던데..과연 작가가 된 사람들은 정말 그럴 만큼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 같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