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오래도록 간절히 바라던 무엇이 눈 앞에 있다면 행복할까 슬플까. 그 무엇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면 또 어떨까. 얼마나 가지고 싶어질까.
지금 생각하면, 나는 서지우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지니고 나온 쌍꺼풀의 운명을 따라 살았다고 느낀다. 그의 쌍꺼풀은 단지 깊은 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허랑하고 범박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반역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평생 동안 오로지 주인이 주입해준 생각,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짐을 지고 걸어갈 뿐인 '낙타' 같은 존재였다. 니체가 말한바 '낙타의 시기'가 그에겐 영원했고, 따라서 자기반역을 통해 세계를 독자적으로 이해하는 '사자의 시기'는 그에게 도래하지 않았다. '쌍꺼풀'은 그리하에 육체에 깃든 그의 젊음을 시시각각 먹어치웠다. 그는 젊은 시절에도 '그놈의 '쌍꺼풀' 때문에 이미 중년이거나 장년이었다. 평생 그는 허당을 짚고 걸어야 했다. 칼 크롤로나 자크 오디베르티를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시의 독자성에 대해서도. 그러므로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지닌 죄의 심지였다. p.34
작가 서지우는 20대 초반 자신의 영혼을 건드린 노시인 이적요를 오랜간 시봉했다. 인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존경해마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시인의 손과 발이 되어 오랜간 보필했다. 서지우는 자신에게 숨겨진 재능을 발굴하고자 노력했고 노시인 역시 서지우에게서 그런 재능을 끄집어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둘다 알았다. 서지우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는 것을. 세상엔 노력해서 되는게 있는 만큼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 아무리 노시인을 존경하고 그의 행동을 따라하고 그의 습관대로 살아도 노시인의 머리 속을 카피할 순 없는 것이다. 그의 시를 줄줄 암송한다고 그의 시 같은 시가 나오진 않는다. 그럴 때, 여지껏 했던 대로 습작을 계속 하면서 가슴 속 절망을 숨길 때 누군가가 그토록 원하는 작품을 건네서 내 것으로 하라고 권한다면 어떨까. 내가 쓴 글은 아니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내 속마음을 고대로 글로 옮겨놓은 작품이라면. 10여년의 긴 세월을 보상받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서지우는 핑계를 대며 자신의 작품을 건네주는 노시인의 소설을 받았고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얼떨떨하던 시간은 흘렀고 각종 인터뷰와 대담을 겪으며 서지우는 그 작품이 자신의 것이라 믿기 시작했다. 다음 작품, 다음 작품, 을 요구하는 출판관계자의 요구에 서지우는 어느날 도둑질을 감행한다. 어차피 같은 거짓말 아닌가. 어차피 내가 쓰려던 내용이지 않은가. 그렇게 자신을 속이면서. 물론, 재능이 없는 서지우를 도와주려는 마음 약간, 자신의 재능을 몰래 과시하려는 마음 약간, 시 이외의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싶은 창작자의 마음 약간이 고루 섞였던 노시인 역시 조금씩 변한다. 그 중심에 은교가 있다.
그를 가르쳐 좋은 시인의 길을 가게 하려고 마음먹었던 시절도 있었다. 사람으로서 그는 미운 데가 별로 없었다. 순정이 있었고, 충직했고, 보기에 따라선 쌍꺼풀도 남달리 이뻤다.
그러나, 서지우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여전히 '멍청'했다. 감수성이란 번개가 번쩍하는 찰나, 확 들어오는 그 세계를 단숨에 이해하는 섬광 같은 것일진대, 그에겐 그게 없었다. p.69
서지우에게 왜 그것이 없을까. 그렇게 착하고 순하고 충직하고 열심인데 섬광 같은 그 하나가 왜 없을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 역시 뜨끔했다. 최근에 읽고 있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적 은유가 흘러넘치는 자서전을 읽고 내가 서지우 같다 여겼기 때문일까. 노시인의 발가락의 때 만큼도 능력이 없으면서, 심지어 서지우처럼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이토록 멋지고 아름다운 작품에 감탄만 하면 될 일을. 감탄을 넘어서는 안타까움이라니..인간의 이런 욕심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만약 내가 습작의 시기를 오랜간 보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형편없는 작품에 절망하는 상황이라면 노시인의 작품에 욕심이 나지 않을 리 없다.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 치명적이다. 노시인에게 은교가 치명적이듯.
아래는 예전에 내가 좋아하는 어느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보고 지은 시이다.
간밤 꿈에 시인의 육필 원고 두루마리를 주웠네
생생한 촉감과 두툼한 질감에 넋을 빼다 문득 깨고 보니
시인의 구절 한 자락 훔치지도 못한 등신이 눈을 끔벅이네
<훔치고 싶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