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없다고 칭얼거리는 나에게 그는,
곁에 없어서 더 소중하게 생각되나봐."
라고 말해주었다. 비 오는 토요일 오후, 예약된 병원에 급히 가느라 읽던 책을 일터에 두고 왔다.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생각났고 다시 돌아가려는 순간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소중한 마음은 떨어져봐야 아는 법이지. 그 사람이든 책이든 뭐든지 간에. 병원에서 아픈 치료를 받는 내내 퇴근 전 잠시의 한가한 시간에 컴터에 옮겨놓았던 글귀를 떠올려보았다.
에.....시는..
...
...
태어났다.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아서 슬프긴 했지만 내 나쁜 기억력을 어쩌라고 뭐.
집에 도착하자마자 컴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고 두 달이나 미뤄왔던 컴퓨터 수리를 맡겼다. 두 달만에 컴터를 켜본다.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화면이 켜진다. 문맹의 세계에서 문명으로 세계로 돌아온 느낌이다. 내 블록을 들어와본다. 아까 옮겨놓았던 문구가 보인다. 아..이런 내용이었구나. 다시 읽어도 매력적이네.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쓸까. 내 마음에 살짝 구멍을 내어 솔솔솔 뿌려보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검색해봤다. 이 책을 알게해준 친구 덕에 러시아에 점점 매력을 느낀다. 몇 년 내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 앉아있어봐야지~ 상상에 행복해한다. 그동안 러시아어도 좀 배우고 말이지. 헤^^
시는 이런 여러 흐름이 갈등하는 물결들 속에서, 그들이 유동하는 틈바구니에서, 보다 느린 흐름이 뒤로 처지고 그래서 쌓인 퇴적으로부터, 기억의 심오한 지평선 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이 가장 격렬한 흐름을 이루었다. 사랑은 자연의 모든 것에 앞서서 태양과 앞을 다투며 달렸다. 그러나 비록 사랑이 어쩌다가 두드러지게 마음을 지배하기는 했어도, 우리 집 한쪽을 황금으로 물들이고 다른 한쪽을 청동빛으로 물들이며, 날씨르 다른 날씨로 씻어내고는 한 해의 네 차례 계절마다 무거운 문을 밀어 열었던 태양은, 거의 언제나 사랑과 경쟁을 벌이며 줄곧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멀찌감치 뒤안길에는 멀고 가까운 갖가지 감정의 자취가 유유히 뒤따르고는 했다. 나는 나의 내면이 아닌 곳에서 들려오는 절망의 앙칼진 소리도 가끔 들었다. 뒤에서 소리가 뒤따라와서 나를 잡고는 두려워하며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것은 박탈을 당한 하루의 일상으로부터 발현하여, 현실의 발목을 잡아 묶어두려고 하거나,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시간에 합류하여 생명을 숨쉬게 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시선에서 시적인 영감이 일어났다.
보다 비창조적이고 곪아터진 존재의 조각들은, 밀려나간 머나먼 거리만큼이나 두드러지게, 생생히 되살아나기도 했다. 생명력이 없는 사물들은 그보다도 더 힘차게 움직였다. 그런 대상은, 미술가들에게 특별히 소중하게 여겨지는 표현의 수단인, 정물화를 위한 살아 있는 모델 노릇을 했다. 살아 움직이는 우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언저리에 쌓여서 꼼짝도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대조의 경계선이라고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테두리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로 하여금 움직이는 전체를 완전히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매개체였다. 그들은 놀라움이나 공감을 전혀 강요하지 않는 저편을 갈라놓는 변경에 위치했다. 그곳에서는 과학이 현실을 구성하는 인자를 찾아내는 데에만 열중했다.
그러나 한 세계에서 현실의 앞머리를 마구 낚아채어 끌어내서 제2의 현실로 끌고 가기도 불가능했으므로, 모든 대상을 똑같은 하나의 평면상에 놓고 상징으로 크기만을 가리도록 제한하는 대수에서처럼, 현실에서 외면으로 드러나는 바를, 상징의 형태로서 조작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이런 상징은 내가 어려움을 벗어나는 하나의 수단은 될지언정, 자체로서 목적은 되지 못하는 듯싶었다. 목적이란 이미 살아버린 과거를 궤도에 올려놓고 인생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상징이 차가운 축으로부터 뜨거운 축으로 옮겨가는 변화라고 나는 벌써부터 파악했었다. 내가 얻은 결론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으며, 그때 내가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상징에 변천을 씌워 흐려놓으려고, 인간을 상징으로서 취하고는, 그들이 타고난 환경에 상징을 배치한다. 그리고 우리는 변천, 또는 결국 변천과 똑같은 개념이기는 하지만, 본성을 취하고 - 그것을 우리의 정열로 뒤덮어 흐려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시를 얻으려고 일상적인 대상들을 산문으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음악을 얻으려고 산문을 시로 이끌어간다. 그렇다면 이것은 살아가는 인간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날 때마다 한 번씩 종을 치는 시계가 설정하는 것으로, 나는 그것을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서의 예술이라고 불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를 쓴 사람이다. 시인이 쓴 유일한 장편소설이라 칭해지는 소설. 분명 예전에 읽었지만 최근에 다시 읽어보니 내가 기억하는 부분은 거의 하나도 없다는 게 드러났다. 예전의 나는 은유나 수사 부분이 나오면 무조건 건너뛰고 읽었으니 제대로 기억해낼 리가 없지. 이번엔 다행히 제대로 읽었다. 아니, 너무 재미가 있어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시인이 쓴 소설은 여기저기 잔뜩 숨어 있는 은유를 찾는 재미 투성이였다. <닥터 지바고>리뷰를 쓰기 전에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조회를 해보았고 몇 권의 책을 찾았다. 그중에 하나, 이 책. <어느 시인의 죽음>
나는 이 제목에서 언급하는 '시인'이 보리스 자신을 지칭하는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그가 존경했던 다른 사람 이야기였다. 주말에 이 책을 다 읽을 작정이었는데 위에 언급한 이유로 인해 윗 부분까지밖에 못 읽었다. 아직 그 '시인'이야기는 나오지조차 않았지만 위에 적은 저 부분만으로 이 책은 내게 충분히 의미가 생겼다. 나에게 희미하게 느껴지던 '시'의 이미지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통해 진해지는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다. 나는 어느날 충격처럼 나에게 다가왔던 시의 정체에 대해 아직까지도 계속 의아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예를 들면,
왜 시는 느닷없이 다가오는지. 사랑처럼 말이다. 왜 시는 충만한 느낌으로 불현듯 와서 썰물처럼 일시에 사라지는지. 사랑처럼 말이다.
<어느 시인의 죽음>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이다. 아직 앞부분만 읽었지만 시인이 쓴 자서전은 어려운 내용이 잔뜩 적혀있는데도 그냥 다 알아먹겠는 말로 바뀌어 읽히는 느낌이다. 쉬운 글인데 도통 이해가 안되는 글도 있지만 반대로 어려운 내용인데도 바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아주 긴 시'이기 때문일까. 시는, 읽는 사람의 살아온 이력에 따라, 읽는 사람의 고뇌의 지점에 따라, 읽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리 읽힌다. 심지어 같은 사람인 경우라도 다음에 다시 읽을 경우 그 내용이 크게 달라진다. 내가 지금 집중하고 싶은 건 마지막 부분이다. 심지어 같은 사람인 경우에조차 받아들여지는 지점이 달라지게 만드는 시의 정체. 그 시의 탄생이 궁금하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삶의 궤적을 이제 날이 밝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동안(이틀동안?) 그리움이 조금 쌓인 듯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