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 수업을 들었다. 월요일 오전에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화요일부터 하는 대금수업을 같이 듣지 않을래? 친구의 급작스런 문자에 1분 가량 고민하고 오케이했다. 수업을 듣는 곳은 문화예술회관이다. 약국에서 걸어서 가자면 30분을 너끈히 넘기는지라 택시를 타고 갔다. 늘 친구가 약국으로 찾아왔고 한동안 수다를 떨다가 갔기에 친구의 일상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택시를 탈 때부터 생각이 저절로 되었다. 차를 잘 타지 못하는 나는 항상 뒷좌석을 탄다. 폐문을 하고 나오니 친구는 이미 택시를 잡아놨고 뒷좌석에 타고 있었다. 나도 같이 뒷좌석에 타려고 뒷문을 열었는데 친구가 앞으로 가라고 손짓을 한다. 아니 친구의 손짓 이전에 이미 내 눈이 보았다. 뒷좌석은 친구의 목발 한 쌍이 자리를 꽉 채워 내가 탈 공간이 없었다. 뒷문을 닫고 앞좌석에 탔지만 가슴에 이상한 느낌이 스멀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문화예술회관에 도착 후 계산을 하고 택시에서 내리고 차문까지 닫았는데 친구는 아직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친구가 앉은 뒷문을 열어주었고 하체에 힘이 없는 친구가 팔의 힘과 엉덩이의 힘으로 목발을 잡고 힘겹게 일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회관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친구는 목발을 한 쪽씩 차례로 다음 번 계단에 올린 다음 다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친구의 걸음은 한 살박이 아기의 아장아장 걸음보다 늦었고 친구의 옆에서 나는 이상한 느낌의 정체에 대해 낯설어했다. 회관에 도착한 우리는 등록을 하기 위해 3층의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친구와 같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렸다. 들어가야되는데 들어가지 못했고 문이 닫혔다. 내가 먼저 들어가야되는지 친구가 먼저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야되는지 판단을 하지 못해서 당황했다. 기계치여서 내가 먼저 들어갔다가 친구가 미처 들어오기 전에 문이 닫겼는데 내가 열림버튼을 찾지 못해 친구가 문 사이에 끼일까봐 두려웠다. 친구는 엘리베이터가 그렇게 빨리 닫히지는 않는다고 말을 해준다. 다시 문이 열렸고 과연 나와 친구가 모두 탈 때까지 문이 닫히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한 켠은 여전히 불안하다.

 

3층의 사무실에선 수강신청을 나중에 한다며 엘리베이터를 다시 내려가서 연습실로 가라고 말을 한다.

"사람을 힘들게 오라가라하고 말야."

나도 모르게 투덜거린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한 칸 밑으로 내려간 뒤 회관 본관의 넓은 홀을 지나쳐 뒷쪽으로 난 계단 쪽으로 올라갔다. 회관은 5층 건물이었고 연습실은 옥상이었다. 빨리 가면 1분이면 올라갈 거리를 친구는 10분에 걸쳐 올라갔고 난 중간에 친구가 혹시 넘어질까봐 불안했다. 내가 무엇을 도와주어야될지 몰라 당황했다.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게 친구에게 제일 편하겠다 싶어 이런저런 농담을 시작했고 친구 역시 농담을 받아치면서 한 계단씩 올랐지만 마음속에 빈 공간이 커져가는게 느껴졌다.

 

'아. 친구가 말했던게 바로 이거였구나.'

 

 

친구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나는 친구와 친하지 않았다. 나는 선머슴처럼 뛰어다니며 놀기 바빴고 친구는 발레를 하느라 조용하게 지냈다. 일년에 몇 번 있는 축제를 할 때면 친구는 아주 어른스러운 화장을 하고 발레를 선보였고 코흘리개 우리들은 두근거리며 친구의 발레를 구경했다. 중학교는 같은 중학교인지 아닌지조차 모를 정도로 지나쳤고 고등학교부터는 정말로 얼굴 한 번 못보고 얼마전까지 지냈다. 약국에 왠 여자가 목발을 짚고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도 나는 친구를 몰라봤다.

 

"친구야. 소식 들었어. 고향에 약국 차렸다며. 진작에 왔어야 하는데 이제사 와본다. 나, 초등학교 동창인데 혹시 기억하니?"

 

기억못했다. 통틀어 대화 열 마디도 안 해봤을 정도의 친구를 기억하겠는가. 한 반이 되었던 적이 있는지조차 기억 못하는 나인데. 그렇지만 내 소식을 듣고 먼저 다가와서 나에게 아는 척을 하는 친구가 신기했다. 친구 생각에도 우리가 친하지 않았던 사이라는걸 알텐데, 나를 찾으러 왔을 땐 친구는 분명 용기가 많은 쪽이었다. 기억 속의 새침한 인상이 사라지고 환하게 웃는 현재의 친구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같이 밝게 웃으며 매대를 나와 친구 옆에 앉았고 친구와 대화를 했다. 친구 옆엔 휠체어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약국엔 갖가지 사연으로 다쳐서 오는 사람들이 많기에 친구의 목발엔 아무 느낌이 없었다. 어디서 삐끗했겠거니. 접촉사고라도 났겠거니.

 

대화 끝에 무심히 친구에게 물었다.

"물리치료 받는 중이니?"

친구는 대답했다.

"아니. 이제는 물리치료는 더이상 받지 않아."

"아. 그래? 이제 다 나아가는거야?"

"아니. 이제 더이상 낫지 않아서. 그래서 물리치료가 필요없어. 가끔 상처가 곪을 때 병원 치료를 받기는 하지."

대화가 서로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는지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실은..나. 예전에 교통사고가 크게 났었어. 스물살 초반에.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목발이 내 다리야."

"그렇게 오래전에 사고가 났었어? 나는 몰랐어.."

 

친구는 그 뒤로도 종종 약국을 들렀고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는 많이 분발하고 하더라. 나처럼 이런 몸을 하고도 공부하러 다니고 뭐 배우러 다니는걸 보면서 멀쩡한 몸을 가진 자기들이 보고 배워야한다고 말야. 너도 그런 의미로 나와 대화할 때 뭘 배우고 싶다고 말을 하는거지?"

친구의 뜬금없는 말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생각나는대로 말했다. 그때 나는 스포츠마사지를 배우고 있었다.

"아니? 난 내가 그냥 배우고 싶어서 배우는건데? 내가 배우는거랑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너는 그냥 내 친구지. 뭘 너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해. 친구 아니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래나. 몰라. 암튼 나는 너를 보고 아무 생각도 한 적 없는데."

친구가 얼굴이 붉어졌다. 친구는 왜 그런 말을 나에게 했을까. 사람들이 친구에게 그런 말을 은연중에 많이 했던걸까.

 

 

계단을 오르는 10분동안 갖가지 생각들이 반추되었다. 친구의 힘겨움이 몸으로 느껴졌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없는 안타까움도 같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말한다는 친구의 대단함의 의미도 이해되었다. 이런 멋진 애가 내 친구구나, 라는 자부심이 어딘가에서 생겨났다. 우리는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나는 있지. 지난 해에 가야금 수업도 이렇게 들었어. 난 수업을 한 번도 빼먹지 않았지. 아주 착실하게 들었어."

나는 수업을 착실하게 들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뭐든지 듣다가 중간에 농띵이를 몇 번은 부려야했다. 착실함은 나와 거리가 아주 먼 단어였다.

"나도 한 번도 안 빼먹을께."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미처 머리가 생각이란 걸 하기도 전에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말이다. 자신은 없다. 오늘만 해도 약국 일에 지쳐서 갈까 가지 말까를 몇 번이나 망설였던가. 친구가 데리러 오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첫 날부터 수업을 제꼈을거다. 입에서 먼저 나오는 말들은 후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오늘은 머리보다 입이 더 기특한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하는 듯하다. 친구의 성실성 덕분에 나도 덩달아 성실해질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긴다. 다시 계단을 오른다. 계단엔 불도 켜놓지 않아서 깜깜하다. 다른 수강생들은 어디 있는지 그 10분의 시간 동안 마주치는 사람도 없다. 친구의 이마엔 진작부터 땀방울이 송골송골하다. 나는 마음 속으로만 친구의 땀방울을 닦아준다. 친구는 간만에 하는 운동이라고 계단오르기의 유익성에 대해 말을 쏟아낸다.

 

드디어 계단의 끝이 보인다. 굳게 닫힌 문을 열어보았다. 차가운 바깥 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친구의 땀방울에 시원한 바람이 스친다. 친구가 얼마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친구는 최근에 비정규직으로 관공서에 채용되었다.

"빨랑 돈을 모아야지. 돈이 모이면 나는 해외여행 갈거야. 프랑스에 있는 친구에게도 들르고, 영국도 가고, 죄다 가볼거야."

친구가 이 말을 지키는 여자라는 걸 왠지 알겠다. 저 머나먼 타국에서 친구가 보내오는 엽서를 받아드는 날이 언젠가 꼭 오리라. 옥상에 가건물로 세운 연습실에서 환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오늘은 우리의 첫 수업날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노아 2012-03-08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분 모두를 격하게 응원할 수밖에 없어요. 뭉클합니다.

달사르 2012-03-08 22:11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응원 캄사요~ 오늘도 연습하고 왔어요. 히.
오후에 피곤해서 갈까 말까를 열 번이나 반복했는데 결국 데리러 온 친구와 손잡고 같이 가서 배웠어요. 갔다오고나니 하루가 왜이렇게 뿌듯한지요. ^^

다락방 2012-03-0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도 멋지지만 글로서도 멋지네요. 어디에 먼저 감탄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우리의 첫 수업날이다, 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이 글이 참 좋으네요. 그러니까 글이 멋져서 내용이 멋진건지 내용이 멋져서 글이 멋진건지, 그것들이 상호보완작용을 한 건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좋은 것들인지, 여튼 정말 멋진 글이에요.

:)

달사르 2012-03-08 22:25   좋아요 0 | URL
느낌이 왔을 때 순식간에 휘리릭 쓴 글이 제 마음에도 더 오래 남아있는거 같애요. 진심이 좀더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느낌 때문일까요. 오늘은 두번째 친구와 동행이어선지 조금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친구의 목발에 신경이 계속 갔어요. 근데 수업 시간 접어드니 서로가 좀더 잘 불러야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불러제끼느라 정신이 홀딱 빠졌더랬어요. 수업 끝나고나니 목발에 더이상 신경이 가지 않아서 한결 홀가분해졌구요.

그러니까 친구의 목발은..친한 친구가 소개해주는 애인과의 첫 대면이 서먹한 것처럼, 그런 느낌인가봐요. ^^

하늘바람 2012-03-08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금 수업 멋지네요 말만 들어도요

달사르 2012-03-08 22: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하늘바람님.
넵! 대금소리가 이렇게 멋있는 소리인줄 몰랐어요. 테레비에서 들리는 소리로 내지는 시디 소리로만 듣다가, 아주 가아끔 공연으로 듣다가, 실지로 눈 앞에서 대화도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들려주는 대금 소리는 말이죠. 정말 사람의 말소리처럼 들렸어요. 그것도 높거나 새된 소리가 아니라 편안하게 대화하는 소리 말예요. 아직까지 구슬픈 소리를 느끼는 정도까진 못갔구요. 그저 편안하던데요. 헤헤.

2012-03-12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13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3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분도 멋지고 글도 좋고 달사르님도 멋지셔요. 대금수업 화이팅입니다~!^^

달사르 2012-04-04 19:1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섬님.
바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3월에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나서 더 바빠 버렸네요. 대금수업도 그래서 몇 번이나 빠졌답니다. 흑..이제 4월 접어들면서는 농띵이를 안 부려야 되는데 말이죠. 친구는 저보다 열씨미 수업을 듣고 있어요. 역시나 은근 짱인 친구더군요. 히.

섬님의 블록에서 본, 고향집에 만들어놓으신 책 선반이 제 마음에 쏘옥 들어서요. 제 방도 그렇게 운치있게 꾸몄으면 좋겠다..생각을 하곤 했어요. 근데 제 방은 너무 작아서 말이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