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조용한 아침이다. 평일 출근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 음악을 열었다. 까페오레 같은 음악을 들으니 뜨거운 것이 생각나 차를 타서 마셨다. 깨끗하게 빨아서 밤새 말간 물에 담궈논 가벼운 속옷들을 세탁기에 넣어 탈수시켰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다. 풍성하게 아침을 채우던 음악이 조용하게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폰의 사진을 컴퓨터로 옮겼다. 봄의 노란 개나리처럼 가을의 노란 은행잎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창문을 열어 대지 위에 잔뜩 쌓여있는 은행잎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늙은 은행 나무 두 그루가 토해낸 은행잎들을 양팔 가득 모아서 은행잎침대를 만들어 혼자만의 공간에서 작은 행복을 즐기던 시간이 떠오른다.
약간의 청소를 했다. 빈 공간을 채울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몇 달 간 빈 곳으로 놔둔 그 공간에 무엇이 들어올지 궁금했다.
공간을 채울 것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산책을 나갔다. 바람은 서늘했고 공기는 햇볕을 받아 따뜻했다. 집 앞 강변의 징검다리를 건넜다. 징검다리 사이를 지나치는 강물의 재재거리는 소리에 웃음이 슬몃 나왔다.
노란색 은행잎의 낙하를 보는 것 만으로도 흥분되는데 붉게 타들어가는 단풍잎을 보는 건 또다른 두근거림이다. 길의 가장자리에 깔린 낙엽을 일부러 밟으며 귀의 간지러움을 즐겼다. 동행한 조카 역시 흥분되는지 쉼없이 재잘거린다.
추수가 끝이 난 가을 들녘엔 상투머리들이 그득하다. 얼마전 친구와 같이 구매한 우관중의 작품이 떠올라 혼자 키득거렸다.
저녁이 되었다.
하늘엔 달이 떴고 빈 공간이 채워졌다. 이영진 시인을 알게 되면서부터 마음에 품고 있는 시가 떠올랐다. 잠시 거처로 삼았던 아파트에서 온갖 소음과 불면에 시달리며 밤마다 읽었던 시. 작품 뒤로 불빛에 비춰 보이는 또하나의 작품은 마치 몸 밖으로 뜨는 달 처럼 보였다. 실체의 내가 투영된 허공의 공간, 그러나 눈에 확연히 실감이 느껴지는 그 허상의 공간. 몸 속의 달이 나일까, 몸 밖으로 뜨는 달이 나일까.
<몸 밖으로 뜨는 달>
쫓기다 보면 쫓기는 일에 맛이 들어 가락이 생긴다지. 잠시 잠깐 몸 붙이는 땅바닥에 잔뿌리 몇줄 내린다고 눈뜨고 마주한 어둠이 가실까. 허공 위의 방 한 칸, 아파트 15층 베란다에 나와 담배를 빼어 물면 화분 속에 앉아 온몸에 바늘을 세우는 선인장이 문득 허공으로 둥둥 떠 흘러가고 아, 오랫동안 친숙했던 때묻은 살림살이, 모두 허공에 떠 있었어. 고속 엘리베이터로 깊숙이 하강해봐도 발 내어딛을 흙 한줌 보이지 않고, 뿌리 또한 멀기만 해. 사십년이 넘도록 달은 몸 밖으로만 뜨데.
...부제 불면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