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  

                 
                                                                        기형도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아..정말 멋지다..내 졸시에 비하니 빛이 반짝반짝, 하늘의 별처럼 총총한 느낌이다. 부끄럽지만 두 개 같이 놔두고 비교하면서 기형도의 시상에 풍덩 빠져야겠다.  

 

청춘의 기억 

 

약봉지를 뜯는다
약알이 데구르르 흩어진다
물을 먹다 아차차, 앞섶이 흥건하다
약사가 다시 약을 지어 휴지로 입가며 소매며 닦아준다
고운 아가씨다 울 엄마처럼. 나도 예전엔 저렇게 고왔더랬지

약사 선상님, 뭐라고?
뭐라고? 잘 안 들려
좀더 큰소리로 말해줄 수 없겠나
약사의 작은 입이 하마 입맨치로 커졌다
이제 겨우 들린다. 나도 예전엔 앵앵 모기 소리도 들었더랬지

약값을 계산한다
한손으로 돈을 꺼내려니 힘이 든다
콤바인에 손가락이 짤린 뒤로 애로사항이 많다
눈치 빠른 약사가 음료수도 까서 주고 잔돈도 호주머니에 넣어준다
그래야지 암. 나도 예전엔 누가 불편해뵈면 바리바리 도와줬었지


청춘의 기억은
쭈그러진 가죽거죽 안
여즉 고맙게도 뛰어주는
심장보다 더 깊숙한 그곳에 곱게 접어 꼭꼭 숨어라!
추억 속에 매 순간 되살아나 봄빛같이 푸르게 스쳐 지나간다

나도 예전엔
나도 예전엔

스치는 추억이
모두 지나가고 남은 자리에
하회탈 미소의 낯선 늙은이가
꼬부랑 지팡이를 쥐고 콩콩콩 길을 나선다
썩 비켰거라, 온 대지가 벌떡 일어나 그를 경배한다

...조금씩 고쳐나갈 생각...내지는, 전면 수정. ㅎㅎㅎ ...

 

'입 속의 검은 잎' 이란 비슷한 발음이 연거푸 나는 신기한 제목의 시를 지은 시인이라고 들었다. 요절했다고도, 그래서 천재라고들 한다고도 들었다. 오래도록 그의 이름만 알았지만 최근에 이웃님 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더 미룰 수 없이 사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적어놓고보니 이 글을 읽는 입장에서는 이웃님 글에서 가슴을 찌르르하게 만드는 어떤 문구라도 발견해서?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별 내용이 없었다. 그냥 자기가 좋아한다, 정도였을까. 글을 잘 쓰시는 분임이 확실한데 오히려 말을 아끼셨다. 그래서 기형도를, 기형도의 시를 아낀다는 느낌이 더 들었나보다. 나는 그 느낌이 마음에 들어 책을 샀고, 조금 시간이 흘러 읽어보았다. 아! 나도 기형도에 풍덩 빠지는 느낌이다. 최근 좋아지고 있는 허수경의 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랄까. 

허수경에게는 사막의 무심한 듯 보이는 모래의 건조함과 그 속에 품은 오아시스, 천년의 시간을 잘 견디어내어 상처 위에 덕지덕지 두꺼운 딱지자국과, 두터운 퇴적층 밑에 감춰진 유적같은 비밀스러움이 느껴지는데.. 기형도에게선 입 밖으로 내는 말이 족족 '시어'가 되는 천상시인이 느껴진다. 허무, 의 시인이라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도 같은데 잘못 들은걸까. '병'이라는 위의 시를 보고서 단박에 알았다. 그의 따뜻한 마음을. 그의 다른 시,'늙은 사람'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세상의 약자, 세상의 약한 것들에 대한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붉게 단풍 들어 최고의 절정기에 달한 순간에 미련도 없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모습. 자신의 영화를 계속 고집하지 않고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 그 아름다운 모습이야말로 곱게 물든 단풍의 마지막 가는 길이다. 우리네 인생에서도 '병'은 어쩜 단풍의 위치와 같다. 약하기 때문에 밀쳐버리고 뭉개버리는 것이 아니라, 약하기 때문에 더 곱게 갈무리하게 해주는 것. '허무'처럼 보이는 얇은 막을 걷어올리면 그 아래에 살짜기 보일듯 말듯 나타나는, 안개의 강을 건너는 자의 엷은 미소,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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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8-07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예전에 구입해서 이 책 읽었었네요.
극장에서 쓸쓸히 삶의 마지막을 장식한 모습이 여전히 인상적인 시인.

달사르 2011-08-08 20:22   좋아요 0 | URL
아..그루님은 그 모습을 인상적으로 가지고 계시는군요. 저는 아직까지는 시를 몇 편 안 읽어봐서요. 아무래도, 노인들, 아픔..에 대해 쓴 시가 눈이 가더라구요. 저도 시를 더 읽게 된다면, 그루님처럼 기형도에 대한 인상적인 모습이 생기겠지요? 음..삶의 마지막은..확실히 인상적이긴 해요.

기형도 관련 포스팅은 두 자리 수 넘게까지 계속 제 속에서 나왔으면..하고 바란답니당. 히.

hnine 2011-08-08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연, 6연이 저는 특히 좋습니다 ^^

달사르 2011-08-08 20:23   좋아요 0 | URL
헤헤헤. 거듭! 감사드려요. ^^
저때 이후로 진도 나간게 없어서..계속 대기모드 중입니당. 대신 다른 시인들의 멋진 시가 눈에 계속 들어오는 중이어서 무척 다행이에요.

2011-08-14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4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