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야가의 밤 - 각성하는 시스터후드 첩혈쌍녀
오타니 아키라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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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야가의 밤

각성하는 시스터후드 |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역시 재미있다. 이것이 바로 장르소설의 힘일까? 주인공부터가 색다른 소설이다. 첩혈쌍녀 시리즈 중 하나로 구성된 [바바야가의 밤]... 앞으로 편집자는 10권만 만들고 끝장을 볼 생각이라는 데 독자로서 뭔가 아쉬워진다. 재잘거리면서 사건을 해결하는 두 여자라는 의미의 첩혈쌍녀... 이처럼 통쾌하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시원한 쾌감을 더 좀 더 알고 싶은데 말이다.

흔히들 여성이 강해지려면 이유가 필요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는 둥, 아이 잃은 여성의 뜨거운 모성애라는 둥, 왜 여성이 강해지려면 이유가 있어야 할까? 그저 그 자체로 강할 수는 없는 걸까? 그저 있는 대로 당당함으로 무장하고 강함 그 자체를 위해, 그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소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신도는 무도를 배우지 않았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오직 강함을 위해 손녀를 훈련시켰다. 싸움 그 자체의 희열을 신도에게 가르쳐주었다.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다. 무도에 들어서면 평생 싸움을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예의와 격식에서 의미를 찾는 쇼코와는 달리 신도는 자유로움, 그 자체를 느낀다. 야쿠자가 모여있는 집합소를 합법적으로 자신의 폭력성을 발산할 수 있는 놀이터로 생각하는 신도이다.

소설 속에는 신도가 어쩌다 할아버지로부터 그런 무지막지한 수련을 받게 되었는지, 그 부모가 누구인지는 나와있지 않다. 그리고 악인으로 묘사되는 쇼코의 아버지 나이키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그 부인과 정부의 모습 또한 떡밥으로 던져졌을 뿐 소설 속에서는 여타의 언급이 없다. 그저 독자 스스로 상상할 뿐이다. 나이키 자신과 그가 딸 쇼코의 사위로 점찍어둔 우타가와는 그저 악의 최고 선두일 뿐이다. 악 그 자체의 악 말이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신도가 그저 강함과 폭력만을 쾌감으로 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신도와 그녀를 일명 스카우트한 야나기와의 케미스트리이다. 사실상 읽으면서 그 둘을 응원한 독자였는데...ㅎㅎ 마지막에 신도와 쇼코가 그들만의 길을 가도록 야나기가 모른 척해주지만 왜 신도와 쇼코는 야나기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그 오랜 시간 그 둘 몰래 숨어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몹시 외롭지 않았을까? 아마 야나기의 도움을 받아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도와 쇼코가 야나기의 도움을 거절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어쨌건 신도는 송곳니가 없는 쇼코의 갑옷을 벗겨낸 장본인이었으니까 그녀의 갑옷이 될 결심을 한 것같다.

마지막에 신도는 정말로 바바야가 마귀할멈이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강하고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마귀할멈이지만 착하고 친절한 여자애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지 않는 지유로운 할머니...... . 그러나 신도에게 쇼코가 없다면, 그리고 쇼코에게 신도가 없다면 마귀할멈으로 산들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을 것 같다.

마귀할멈으로 살기에 신도는 강하지만 착했다. 신도가 되려 했던 바바야가의 마귀할멈도 결국은 개와 착한 소녀를 좋아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악인은 그저 악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선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선을 위한 폭력은 과연 정당한가? 그저 통쾌하게 끝나는 장르 소설만이 아니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이다. 응원한다. 첩혈쌍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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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세 딸
엘리프 샤팍 지음, 오은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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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세 딸

엘리프 사팍 지음 | 오은경 옮김 | 소담 출판사

내가 아는 친구는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 매주 일요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꼬박꼬박 십일조로 헌금을 하고, 사람들과 교제도 중요하게 생각해서 일주일에 한번 돌아가면서 각자의 집에서 예배도 드린다. 그에 비해 나는 그러하질 못한다. 몇 해 전에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다. 개종을 한 계기는 기존 교회를 비판하면서 더 이상 그 믿음에 같이 합류하는 것은 스스로 죄를 짓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왠지 스스로를 잉태한 부모에게 왜 나를 낳았느냐고 반항하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렇게 개종한 가톨릭에서도 난 내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를 핑계로 안 가기 시작하니 점점 가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고, 현재까지 냉담자로 살아오고 있다. 믿는 이유는 과연 무엇이고, 내 믿음의 증거는 무엇인지... 이제는 그런 모든 것마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여기 세 명의 여성들은 저마다 각기 다르다. 한 명은 독실한 이슬람교도로 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모나이다. 또 다른 한 명은 무신론자인 쉬린, 다른 한 명은 끊임없이 회의적인 질문을 쏟아내는 방황하는 영혼으로 일컬어지는 페리이다. 아마 이 세 명 중 나를 닮은 자는 페리이리라...... .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신의 존재에 대해, 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탐구했지만 결론은 항상 답은 없다는 것... 페리처럼 난 지금도 신을 찾아서 방황하고 있다.

페리는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어머니와 회의론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유년기는 그야말로 혼란스러웠다. 매일 부모의 싸움을 목도해야 했으며, 그 사이에서 그녀 스스로 갈피를 못 잡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달라지는 시기는 옥스퍼드에 입학하면서부터가 아닐까 한다. 새로운 배움, 스승과의 만남, 진지한 토론 등이 그녀에게 다가왔고, 새로운 사고방식의 문을 열어주는 기회가 되었다.

아주르 교수는 담대한 철학을 거침없이 내놓는다. 그것으로 인해 오해도 있었지만 그는 신의 실존 여부는 사실상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탐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믿음과 종교의 광신도들을 경계했는데, 정의란 대목에 있어서는 특히 경계했다. 정의라는 이유와 그 명목으로 가장 극단적인 광신도와 맹신자 들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의를 저질렀다고 말이다. 이처럼 아주르는 정의란 사실상 복잡한 단어임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일명 태극기 부대, 극 보수 주의... 사실상 알고 보면 이들이 말하는 것 역시 정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상처받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고, 저마다 서로의 정의만이 옳다고 하는 때 아주르 교수가 말하는 정의라는 복잡성을 한번 제대로 탐구해 보고 싶어진다.

아직도 이란에는 히잡 시위가 진행 중이다. 최근 뉴스에서 이란 지도부가 히잡 시위대로 잡혀온 두 명을 사형시켰다고 한다. 지난해 9월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 사이로 머리카락이 보인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붙잡혀서 죽기까지 그 이후 이란에서는 죄 없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다. 신을 앞세운 지독한 공권력 앞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너무 무기력하다. 그들은 국제사회의 도움과 공조를 요청하고 있지만 서로의 이해관계를 중점에 둔 나라들은 이조차 매우 소극적이다.

과연 종교란 무엇이고, 믿음이란 무엇인가? 페리는 마지막으로 사랑에서 답을 찾는다. 사랑도 신앙이고, 모두를 쏟아붓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에 집착하거나 과장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사랑도 신앙도 적당해야 한다는 것... 제한된 스스로를 넘어서서 누군가와 연결되는 그 아름다움만을 생각하는 것... 페리의 옷장 밖으로의 한 발은 아마도 앞으로 나올 많은 여성들의 한 발과도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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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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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잃어버린 도시 | 위화 장편소설 | 푸른숲

얼마 전에 서태후에 대한 방송을 즐겨 보던 프로그램 중 하나인 [벌거벗은 세계사]를 통해 보았다. 청나라 말기에 호사를 누리고 나라의 국민들은 전쟁과 아편으로 죽어가는데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의 안위만 돌본 희대의 캐릭터였던 서태후... 소설을 읽으니 그때 청나라 사람들의 생활과 그들이 어떻게 견디고 살았을지 막막해져 온다. 사람들은 아편으로 찌들어가고, 전쟁은 여기저기서 나고, 나라는 막대한 세금만 걷기에 혈안이 되었으며, 곳곳에 도적떼들이 출몰해서 민심은 더욱더 흉흉해져 가는 때... 나라가 망하려고 하면 이 모든 것이 다 전조이리라...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만난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그는 그저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이었을 뿐인데 샤오메이를 만난 후 그는 새로운 도시 원청으로 떠나야 했다.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를, 정말 존재하는 지도 모를 그 미지의 곳으로 말이다. 어쩌면 샤오메이는 린샹푸가 세상을 탐험하고, 나서게 해 줄 운명의 연인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린샹푸가 떠날 일도 없었고 애초에 원청을 찾아서 갈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소설은 두 가지 시점에서 존재한다. 한 가지는 린샹푸의 시점, 또 한 가지는 샤오메이의 시점이다. 린샹푸는 자신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여인 샤오메이와 부부의 연을 맺지만 그것도 잠시 샤오메이는 말도 없이 그의 곁을 떠난다. 그 후 다시 돌아오지만 그에게 딸아이를 안겨준 후 다시 린샹푸를 버린다. 그렇게 샤오메이에게 두번이나 버림받은 린샹푸는 어린 딸을 안고 원청을 향해서, 샤오메이를 향해서 떠난다. 낯선 도시 시진에서 그는 구이민을 만나게 되고 딸 린바이자는 천융량 가족의 도움으로 동냥젖으로 키우게 된다. 그가 시진에서 겪은 일들을 어떻게 말로 다할까... 하지만 린샹푸에게는 사람의 덕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에게는 집사 텐다의 가족과 천융량의 가족들이 있었으니까 시전에서의 삶도 그저 운명처럼 여기면서 새로운 목공 기술을 배우면서 딸아이와 살아갈 수 있었으니...

후에 딸인 린바이자가 토비에게 납치될 뻔했으나 그녀를 대신해서 천융량의 아들인 천야오우가 잡혀가면서 그 인연이란 무엇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천야오우는 지독한 고문 끝에 스님이라 불린 토비 덕분에 살 게 되었으니, 그 연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내게 원청은 희디 흰 눈으로 기억된다. 왠일이지 눈밭에서의 샤오메이를 잊을 수가 없다. 다시 린샹푸를 만난다면 그때 그의 딸도, 그의 아들도 낳아주겠다던, 만일 아내 될 자격이 없다면 소와 말이 되어서라도 그를 위해 살겠다는 샤오메이의 마음...... . 아마 그 마음으로 린샹푸를 향한 고마움, 은혜를 대신 한 것이리라...... . 슬프다. 왜 사람은 고통받아야 하는가? 왜 정직하고 의롭고 정의로운 자가 고통받아야 하는가? 그 답은 알지 못하겠다. 영원히 스스로의 원청을 기다리면서 사는 인간의 삶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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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스 페이지터너스
그레이엄 그린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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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스

그레이엄 그린 지음 | 이영아 옮김 | 빛소굴

왜 이 소설이 아이티의 대통령 뒤발리에의 분노를 샀는지, 왜 그레이엄 그린이 그토록 악몽 공화국이었던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탐험했는지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물론 그린이 영국을 떠난 것은 세금을 덜 내기 위해서라는 정확한 이유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암울 속에서 견디기 위해서 프랑스로 간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프랑에서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고, 여러 이유로 인해 뿌리를 잃고 방황했다. 그가 남프랑스로 망명한 때에 아이티에 대한 작품 [코미디언스]가 탄생한 것이다. 이 작품을 읽고 이것이 비단 아이티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 남수단도 그러하고, 이러한 분쟁 지역은 작고도 많다. 뿌리없는 자신을 빗댄 것인가? 물론 그는 책 마지막 서한에서 작가와 주인공을 이입시키지 말라고 했지만.

소설은 화물선 메데이아호의 항해에서 시작된다. 아이티로 향하는 일부의 사람들... 그 인물들의 민낯으로 점점 들어가면서 독자는 이 자체가 혹시나 제목에서처럼 코미디가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스미스 부부의 과도한 채식주의의 사랑을 비롯해서 (스미스는 채식주의자를 대표로 대통령 선거에까지 나간 경력이 있다), 브라운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호텔이 아이티에 있어서 그곳으로 가는 중이며, 존스는 기회주의자로 그려진다. 존스, 스미스, 브라운... 이처럼 주변에서 흔하디 흔한 이름을 지닌 인물들이 모두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한 후 일은 시작된다. 모두 다 제 갈 길로 가는 듯 보이지만 좁은 이 나라에서 그들은 교차한다.

아이티인 닥터 필리포의 시신이 브라운의 수영장에서 발견된다. 이후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건에 연루되는 듯 보이지만 결국 필피포는 통통 마쿠트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자살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닥터 필리포의 조카와 브라운 호텔의 직원은 부두교 의식을 치른 후 반란군으로 합류한다. 브라운은 존스를 자신의 정부인 마르타로부터 떼어놀 결심으로 게릴라전으로 그를 끌어들이게 된다. 반란은 실패로 끝나지만 이 과정에서 존스는 영웅이 된다. 브라운은 장의사로 삶을 시작한다.

존스는 세상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고 말한다. 하나는 위 양반, 또 다른 하나는 잡것이다. 물론 자신은 바로 후자에 속한다고 말한다. 잡것들은 계속 눈치를 보면서 힘겹게 살아가야 한다. 존스와 브라운은 다른 듯 닮아있다. 존스가 기회주의자이듯 브라운 또한 그러하다. 그는 사실 자신의 호텔을 팔기 위해 뉴욕에 왔지만 결국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다시 돌아가는 것뿐이었고, 그의 이기심으로 그는 아이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떠돌이 신세에 대한 강점을 지니고 살아갈 뿐이다. 그의 방관자적 태도, 그것은 지독한 이기심이다.

아... 세상에 똑똑한 사람이 정치를 하고, 옳은 일을 할 것 같지만 결국 돌고 돈다. 모두가 스스로 짜인 각본에서 지독한 코미디 연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시도 때도 없이 정권만 바뀌면 모든 것이 물거품 되는 현실, 엎어졌다가 다시 뒤집어지고 반복이다. 멀쩡한 아스팔트 도로를 예산 소진을 위해 뒤집는 것처럼 다 헛짓거리처럼 보인다. 이렇게 살다가 헛짓만 하다가 가는 것일까? 인간으로 태어나서 위트 있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지만 희망 없는 코미디는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소설 [코미디언스]... 비단 아이티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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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클래식 1포옹 - 하루를 껴안는 음악의 힘 1일 1클래식
클레먼시 버턴힐 지음, 이석호 옮김 / 윌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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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클래식 1포옹

클레먼시 버턴힐 지음 | 이석호 옮김 | 윌북

자, 오늘은 어떤 음악을 들어볼까? 오늘이 몇 월 며칠이었지? 아... 오늘 아침을 시작하는 곡은 이것이구나... 바로 애나 메러디스의 라이트 아웃...

클래식을 온전히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나에게 클래식은 항상 가까이 갈 수 없는 산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뭣도 모르고 지인들 연주회다 합주회다.. 해서 따라다녔지만 내게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앉아있어야 한다는 것도 고역이었고, 도대체 어디서 끝나는 것인지, 그리고 박수는 언제 쳐야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다. 아..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좋으면 좋다고 느껴도 되는 것, 굳이 들으려고, 듣겠다고 애써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음악이란 그저 음악으로서 즐기면 될 뿐이다. 클래식이라고 하여도 어차피 음악이다. 피아노, 바이올린, 오르간, 첼로 등 온갖 악기들이 저마다의 소리에 화음을 주면서 들려주는 콘서트니까 말이다.

지금 내가 유일하게 듣는 클래식 시간은 바로 EBS 라디오를 통해서이다. 항상 반디 앱을 깔아놓고 틈날 때마다 (청소를 할 때나, 빨래를 할 때 등등) 듣고 있다. 그 속에서는 다채로운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작곡가의 생애에서부터 이 곡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 그리고 내가 몰랐던 제3세계 음악까지 말이다. 지금 여기 한 가지 추가해서 이 책 [1일 1클래식 포옹]으로 더욱더 클래식이란 존재가 풍부해졌다. 음악은 특별한 자들이 여가를 이용해서 즐기는 사치품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유튜브를 통해서 원하는 음악을 모두 찾아서 들을 수 있고, 정기적인 결재 시스템을 이용해서 애플 뮤직이나 멜론 등을 이용해서 원하는 음악을 무한대로 즐길 수 있는 일명 음악 무한화의 시대이니까...

한때 음악이 철저한 계급주의의 산물이라고 생각이 될 때가 있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만 해도 어깨에 큼지막한 악기를 매고 다니는 아이들은 좀 산다는 부잣집 아이들이었으니 말이다. 클래식은 부유함을 통한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랩은 가난 속에서 부유해지기 위해 몸부림치는 음악이라는 생각... ㅎㅎ 이 얼마나 단순한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지금은 안다. 그 경계를 짓는 것 또한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음악이 음악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도' 다음에 꼭' 레'가 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 소리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이다.

책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 음악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등등 이제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그 효능감만은 믿는다. 좋은 책 한 권, 좋은 멜로디... 그것으로 삶이라는 시간이 꽉 채워지고 살만하다 여겨지는 것...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닌가? 그저 오늘 하루 잘 살았다는 것에 위로받고자 하는 것으로 모든 예술은 그 효능을 다하는 것이리라... 꼭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이 나의 클래식 생활이다. 한 멜로디 와닿았으니 그것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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