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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토끼의 아리아
곽재식 지음 / 아작 / 2017년 5월
평점 :
곽재식의 작품은 명랑해서 좋다. 그의 작품에 비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들은 죽고, 상처입고, 실연하고, 사기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또 '박승휴 망해라'에서처럼 온 우주를 뒤덜을 만한 거대한 두뇌로 탈바꿈하고도 찌질한 원한 하나 때문에 우주의 운명을 바꾸려고 하기도 한다. 지구가 망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 작가의 작품들은 명랑하다. 자신이 주인공인 끔찍하고 기이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고도 남의 이야기처럼 맨 마지막에 '뭐 어때?' 하면서 어깨를 쓱 치켜올리는, 그런 맹랑함과 초연함이 있다. 그래서 곽재식의 작품에서는 우주가 망해도 마음이 편하다. 그가 풀어내는 인과의 끈을 술술 따라가다 보면 "이것도 나쁘지 않네." 하는 마음이 되어버린다.
시인 성석제가 처음 소설집을 냈을 때 그 '능청과 재담'에 문단 전체가 떠들썩했고, 소설 좀 본다는 사람들은 "어처구니 봤어? 어처구니?" 하고 물었다. 곽재식의 작품을 보면 바로 그 성석제의 소설이 생각난다. 엄청난 입담으로 얼을 빼놓다가도 맨 마지막에 하아 한숨을 내쉬며, 그러나 별로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중얼거리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고백했다. 내가 대학 때 그렇게 멍청해 보였던 것은 너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너를 보고 있으면, 네 생각을 하면, 그때부터는 아무리 해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고. 꿈을 꿀 때도, 다시 새 꿈을 찾아야 할 때도, 나는 온통 너를 생각하기만 했다고.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고, 내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이번에도 웃어 주었다.
...광학자는 일단 어린이들을 많이 낳아 놓으면 그중에서 새로운 뇌를 가진 사람이 한두 명은 나타나, 우리를 구해줄 새로운 생각을 해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중략) 그녀는 광학자의 발상은 전 재산을 도박으로 다 날린 도박꾼이 마지막 남은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로또 복권을 사면서 자기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주기를 꿈꾸는 것과 다름없는 처량한 짓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광학자가 말했다. "남은 재산은 한 푼도 없는데 내일 사채업자가 나를 잡으러 오고 있다면, 결국 지금은 로또 복권이라도 사러 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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