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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평점 :
나는 한국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다. 잘난 척이나 괴짜 흉내가 아니라, 한국 소설 특유의 질척거리는 정서와 등장인물들의 논리적으로 모자라는 사유, 어슴푸레한 감정으로 행동하는 방식이 나하고 참 안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정말 좋았다. 이 작가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작가지만 진정 아깝고 서운했다.
이 작품은 드물게도 '죄의식'이라는 주제를 탐구한다. 문체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단순함이 그로테스크로 이어지고, 마지막 마무리는 사르트르의 단편 '어느 지도자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물론 장편과 단편이 다르고, 박지리의 소설이 더욱 복잡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건드린다).
오랜만에 읽은 역작이었다(원고지 2.900매에 달한다고 한다). 엘리트 소년들의 기숙사 학교라는 설정이 주는 고딕고딕함도 좋았고, 언뜻언뜻 보이는 BL적 요소와, 마냥 밝기만 한 청소년 시절을 보내는 듯한 주인공들이 순간순간 위선과 침묵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마음을 비트는 장면들도 좋았다. 이 작품은 부디 오래 남아 컬트적 사랑을 받는 고전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