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에 읽은 책에 조선의 왕위계승사에 관련된 책이 있다. <왕과 아들/
강문식, 한명기, 신병주 공저ㅣ책과 함께ㅣ 2013>인데, 그 책 속에는 조선의 왕위계승에 있어서 많은
이야기를 남긴 5 명의 아버지와 아들, 즉 왕과 왕세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태조와 태종, 태종과 양녕대군, 선조와 광해군, 인조와 소현세자,
영조와 사도세자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빼닮아서 아버지가 원하는 길을 간다면 이런 부자지간은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타인보다 더 못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왕권을 향한 야망 앞에서는 더 치열한 갈등이 있기 마련인데, 이 책에 소개되었던 태조와 태종, 즉 이성계와 이방원의 이야기가 <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에 담겨 있다.
그동안 이성계와 이방원의 이야기는 여러 책을 통해서 읽기는 했지만, 이 책처럼 집중적으로 다룬 책은 읽지를 못했기에 이 책은 좀 더 자세한
부자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이 책의 저자인 '이덕일'은 <조선 왕 독살사건>, <조선 왕을 말하다>, < 세상을 바꾼
여인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정도전과 그의 시대>등 조선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집필하였다.

이 책은 <태조실록>, <고려사>, <동각잡기>,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삼봉집>,<용비어천가>, <조선경국전>등의 역사적 자료를 사용하였다.
1장 : 이성계 일가의 등장, 2장 : 고려 500년, 최후의 날에서는
이성계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와 이성계가 고려말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집중적으로 살펴 본다.
이성계의 조부모는 고려출신이지만 원나라 사람으로 지냈다. 이성계는 공민왕 10년 고려로 귀화하면서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면서 무명(武名)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성계에게 고려는 마더랜드(Motrer land)가 아니었기에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그리 많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고려 명가 출신인 최영은 고려왕실과 운명을 같이 할 마음을 갖춘 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사실상 조선 개국의 계기가 된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에 자신의 이념과 정책의 외피를 입히게
되면서 비로소 혁명 무력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성계가 '말위의 사람'이라면 정도전은 '서재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군신관계를 뛰어
넘어 동지가 된다. 아니 정도전은 이성계 보다 나이는 7살 어리지만 이성계의 스승이 된다.
" 이성계는 우왕 9년 (1383) 함길도 함주까지 찾아온 정도전을 만나서 새 왕조
개창을 꿈꾸었지만, 역신이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자신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주위에서 추대해서 할 수 없이
즉위했다는 이미지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 (p. 144)

3장 : 이성계, 새 왕조를 열다 에서는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본다. 그러나 여기에 이방원이
없었다면 조선의 개국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이성계는 어떤 목표를 세우기는 하지만 그 결과가 가져 올 비난을 감수하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방원은 결단력과 행동력이 있고 상황
파악이 빠른 인물이다. 한 번 결단하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 점이 이성계와 이방원이 부자지간이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갈등을 빚게
되는 요인이다.
정몽주를 제거하는 방법에 있어서 부자의 갈등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방원은 조선 건국에 그 누구 못지 않게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니, 당연히 태조의 뒤를 이을 후계자는 이방원이어야 했다. 그런데 막내
이복동생인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고, 개국공신의 명단에서도 이방원의 이름이 빠지게 되니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된다.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방원의 실책은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정몽주를 무참하게 살해한 것이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사적 친분관계가 있었기에 정몽주를 설득하여 함께 조선을 건국하려고 했던 이성계는 이 사건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이방원이 정치적 실권에서 배제되는 것은 곧 아버지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순응할 이방원이 아니기에 그는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부자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된다. 조사의 난을 평정한 후에
최후의 승자가 된 태종은 아버지 태조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효 보다는 그것이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꼭
필요하기때문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골육상쟁의 아픔을 겪고 올라 갔던 왕의 자리였기에 그는 적장자인 양녕을 세자로 책봉하지만, 부자간의 갈등은
태조와 태종의 관계에서 태종과 양녕의 관계로 대물림된다.
태종에게 적장자를 후계자로 삼는 것은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자인 양녕은 학업에 소홀하고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았으며, 자신의 욕구를 적절히 통제하는 절제력도 부족했다. 잡희(雜戱)를 지나치게 즐기며 여자 문제가 끊이지 않았지만
태종은 양녕대군을 보호하고자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양녕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니 왕권은 3남인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러면 충녕대군에게는 정치적 야심이 없었을까, 그의 행적을 보면 문종 사후에 단종이 즉위하면서 종친의 큰 어른으로서의 정치활동이 시작된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를 지지하고 조카인 안평대군을 탄핵 등의 행적은 그가 정치적 야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아버지인
태종에게는 내쳐지는 아들이었지만 그는 그 이후 30여 년만에 세조의 집권을 도우면서 스스로 정치적 욕망을 다소나마 채운 것은 아닐까.
이방원은 조선 개국을 위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 놓기 위해, 수많은 악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형제를 죽이고,
부친에게 칼을 겨누고, 처남에게 사약을 내리는 등의 일을 하게 된다.
'조선의 성군'이라고 하면 세종을 떠올리게 되지만 태종이 그 기반을 갖추어 놓치 않았다면 조선이 반석 위에 서게 되는데는 더 많은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종 르네상스라 불리는 문화시대가 있을 수 있었던 바탕이 된 것이 바로 태종의 치세 동안에 이루어졌다.
" 태종은 권력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군주였습니다. 또한 군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던 군주였습니다. 하늘이 자신에게 천명을 내렸다면 그것은 악역을 하라고 내린 천명이라고 생각했던 군주였습니다. 태종은
누구나 걷기 싫어하는 악역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부친에게 칼을
켜누었고, 부인과 원수가 되었으며, 맏아들도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 못지않게 성군이 되기를 바랐던 군주가 태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태종은 세종 못지 않은 성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태평성대를 만들려고 누구보다 노력했던 군주였습니다. " (p.p.
229~230)
이 책은 이성계와 이방원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크게 보면 조선의 개국과 조선 초기의 정치상황과 태조와 태종의 치세를 살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