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추억이 깃든 책이다. 그동안 4 정도를 읽었는데, 그때 마다 마음 속에 울림이 조금씩은
다르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학창시절에, 어른이 되어서, 엄마가 되어서.
그리고 5년쯤 전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몇 권 사면서...
'헤르만 헤세'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는 작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정여울'의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ㅣ 아르테 ㅣ 2015>를 통해서 자세하게 알게 됐다. 그 이전에 읽은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헤르만 헤세ㅣ 웅진지식하우스
ㅣ2013>도 좋았다.
헤세는 독일의 칼프에서 태어났지만 인생을 마무리한 건 스위스의 몬타뇰라이다. 히틀러 통치하에서 작품활동을 할 수 없어서 스위스로 망명을
했기 때문이다.
헤세의 아버지는 선교사였고, 신학계 집안의 어머니 밑에서 성장을 한다. 그래서 헤세는 신학교에 입학을 하기는 하지만 적응을 하지 못하고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둔다.
그는 할아버지의 책들을 읽으면서 수도사가 아닌 시인이 되기를 원했고, 그것이 신학교를 뛰쳐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학교를 그만 둔 후에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에서 요양을 하기도 하고, 이듬해에는 김나지움에 입학을 하지만 다음 해에 학업을 중단한다. 서점
점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시계부품공장에서 수습공으로 일을 하기도 한다.
청소년기의 방황과 고뇌를 다룬 작품인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그래서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면 한스의 모습에서 헤르만 헤세의 청소년기를 보는 듯하다.
중고등학생들의 필독도서에 빠지지 않는 성장소설로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제롬 다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노트>가 있다.
이 소설들은 발표된 지는 오래됐지만 여전히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 아마도 청소년들은 이 작품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저 학교에서 읽으라고 하니까 읽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른이 돼서 다시 읽게 된다면, 자신의 청소년기를 뒤돌아 보는 계기가 되고, 이 소설들이 왜 세계적인 작품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을에서는 가장 똑똑한 아이, 재능이 뛰어난 아이, 지성으로 충만된 아이인 한스가 조금씩 삶의 무게가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은 슈바벤
신학교 시험을 보러 가면서 부터이다.
항상 머릿속에는 공부로 가득찬 아이이지만 각지에서 모인 아이들과 함께 보는 시험은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한스는 시험을 보면서 자신감이
없어지고 무력해짐을 느끼게 된다. 불합격할 것이라는 걱정을 하지만 , 다행히도 신학교에 2등으로 합격한다. 그래서 한스는 다시 공부에 대한
열정과 뜨거운 욕구가 솟아나기도 했지만, 새로운 학교 생활에는 적응을 못한다.
천재성을 지닌 한스에 대한 교장 선생님를 비롯한 선생님들의 기대는 크지만, 소년은 차츰 나락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다.
한스 기벤라트와 친구가 된 헤르만 하일너는 학교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짝이라는 인상을 준다.
성실한 아이와 경박한 아이, 천재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아이와 시적 능력을 가진 아이.
틀 속에 갇힌, 순종적이고 모범적인 한스 기벤파트.
관습과 제도에 저항하고 교칙을 어기고, 시를 쓰는 헤르만 하일너.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는 헤르만 헤세의 분신이다. 헤르만 헤세 역시 마음 속의 두 청소년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했으리라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의 만남은 소년을 반항심이 들끊는 소년기에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된다. 4년간의 수도원 학교 생활에서 궤도를
벗어나거나 끝없이 추락하는 소년들이 몇 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한스 기벤라트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한스를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기만당하고 억압당했던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봇물터지듯이 한꺼번에 용솟음쳤기 때문일까?
그렇게 고생하며 열심히 공부하던 한스. 작은 즐거움(낚시, 토끼 키우기)까지도 포기하고 공부에 몰두했던 한스.
그의 마음에 꽉 차 있던 자부심, 명예욕, 희망에 부푼 꿈은 대관절 어디로 다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아버지와 선생님은 그를 끝까지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었을까?
그 모든 것이 마음에 유리조각이 꽂히듯이 알알이 박힌다.
지독한 사춘기를 겪은 한스의 불운은 그 누구의 삶보다도 극명하게 극과 극을 치달린다.
책을 읽는 중간중간, 이전에 읽었을 때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살아난다. 그러나, 결말 부분에 가서는 갑자기 가슴에 멍울이 새겨진다.
'맞아, <수레바퀴 아래서>의 그 무거웠던 그 결말이 바로 이랬었지!'
너무도 가슴이 아픈 한스의 파란 작업복, 한스가 이런 작업복을 입으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차디찬 죽음으로 다가오는 결말에서 한스를 짓눌렀던 수레바퀴들이 내 가슴의 수레바퀴로 돌아온다.
한스는 수레를 끌지 못하고 수레바퀴 아래에 깔린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이렇게 무참하게 허물어지는 천재의 최후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학교가, 부모가 아이들의 꿈을 지켜 줘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을 향한 지나친 기대와 관심도 문제가 되지만, 활짝 피어날 수 있는 아름다운 꽃을 피지도 못하고 벌레가 파 먹거나, 꺾어 버리는 것도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한스에게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자상한 엄마가 있었다면, 올바른 길로 함께 갈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면, 소년은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훌륭한은 아니라도 평범한 인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스의 짧았던 삶이 그리도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소년에게는, 청춘에게는 꿈이 있고, 목표가 있다, 그것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어른의 힘이다.
어른들은 짓누르는 수레바퀴가 돼서는 안된다.
우리의 청소년들을 다시 한 번 눈여겨 보면 어떨까, 힘이 되어 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