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다, 귀엽다, 착하다, 통통하다(응?) 아내가 지겹지 않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거다. 아내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웃기다’와는 결이 다르다. 결과적으로 웃음이 새 나오는 거야 비슷하겠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마음의 긴장이 풀리는 것.’ 이게 핵심이다.
꼬투리 잡히지 않게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무던한 사람인 척 행동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아내 앞에선 없다. 만약 집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여기가 내 집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해도 된다는 당연함. 나에겐 꽤나 낯선 감정이다. 아내는 ‘틀리다’는 말도 ‘다르다’라고 발음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힘껏 내가 될 수 있었다.

어릴 땐 사람이 없는 시간이 외로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다 보니 사람이 진짜 외로워지는 순간은 혼자일 때가 아니라, 함께 있음에도 여전히 혼자 같은 순간이었다. 내가 아니라 누군가가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을 때, 사람은 진심으로 외로워졌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아니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옆 사람이 아니었다. 내 사람이었다.

세월이라는 호르몬은 비누로는 닦아낼 수 없다. 기름기 없이 뽀득뽀득 몸을 닦아내도 몸 안에서 새 나오는 냄새에는 방도가 없다. 절망이란 이토록 일상적이다. 대단한 것에 실패할 때보다 당연한 것을 해내지 못할 때 인간은 더 크게 좌절한다.

늙어가는 게 싫다는 생각을 부쩍 자주 한다. 청년이라는 단어의 범주가 점점 넓어지면서 어찌저찌 다리 한쪽은 걸친 채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만은 벌써 중년이다. 젊음은 어느새 추억 같고 나도 이제 끝물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입에 담는다.

세월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노인의 삶은 분명 멋지다. 그러나 세월이라는 반격 불가능한 타격에 저항하는 삶 또한 존경스럽다. "어쩔 수 없지" "이런 게 인생인 걸"이라는 자조보다 여전히 눈앞의 문제에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삶이 어쩌면 가장 큰 젊음일 것이다.

초단기 기억상실은 흔한 질병이라고 한다.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이 아닌 고작 1분 전의 기억을 놓쳐버리는 질병으로 주요 원인은 나이가 아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보고 있는 ‘스마트폰’이다. 또 스마트폰이냐고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냐. 진짜로 안 좋은걸.

스마트폰을 하는 모든 순간 나는 내가 쉬고 있는 줄 알았다. 눈에 띄게 움직이는 것이라곤 손가락, 그중에서도 엄지와 검지밖에 없었기에 나는 내가 여유를 즐기는 줄 알았지만, 전혀. 내 머리통은 야근 중이었다.

감각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스마트폰, 티브이, 노트북, 지하철 플랫폼 소리, 옆 사람 다리 떠는 소리, 유튜브 자막 등등. 나노 초단위로 우리의 눈과 귀와 코와 뇌로 주입되는 정보에서 완벽히 해방되는 시간이 우리의 감각에겐 필요하다.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스마트폰과 컴퓨터로부터 눈과 귀를 차단하고, 너덜너덜해진 오감에게 조용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감각은 모든 노동자가 그렇듯 파업을 하기 때문이다. 뇌는 쇠파이프를 두들기며 두통을 만들 것이고 귀는 밤새도록 이명을 노래처럼 부를 것이다. 초단기 기억상실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잃지 않고 싶은 기억과 추억이 많아질수록 우린 보다 고요해져야 한다. 감각의 셔터를 내리고 조용히 더 조용히 스스로에게 정적을 제공해야 한다. 깨끗한 밤에만 활동하는 반딧불이처럼 그제야 감각은 스트레칭을 하고 차 한 잔을 즐길 테니까.

감각은 정지가 아니라 정적을 좋아하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어느새 어색하지 않고 편하다.

사람이 싫어진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더 좋아졌달까. 맞지 않는 관계에서 멀어지니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이 남게 됐다. 거기다 만남의 횟수까지 획기적으로 줄이니 만날 때마다 애틋해지는 것은 덤이다.

웃긴 일이다. 사람에게서 멀어지니 사람과 가까워졌다. 나와 내 사람들이다.

최근엔 의도적으로 혼자가 된다. 의미 없는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려다 가족에게 써야 할 에너지까지 낭비하지는 않는다. 지인들의 때 묵은 감정 배설은 정중히 사양할 줄도 알게 되었다. 거기다 한 달 중 며칠은 나와의 대화를 갖기 위해 공실로 비워둔다. 외롭지만 생산적이다. 맞다. 생산적인 외로움이다.

뭐 그러다 가끔 놀랄 만큼 휑해진 일상에 겁을 먹고 무엇이든 채워볼까 고민도 하지만, 그전에 스스로에게 꼭 묻는다. 배터리가 얼마나 남았지? 나에게 쓸 용량 30%. 아내에게 쓸 용량 30%. 가족에게 20%. 그리고 남은 20%, 아니 혹시 모르니 10%의 용량만큼만 관계를 채운다. 감당할 수 없는 관계를 우걱우걱 삼키다 또 체하지 않도록. 깜지처럼 뻑뻑히 관계를 채우다 마음이 또 까매지지 않도록.

오늘도 나는 최대한 현명하게 외로워지려 한다.

나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 너무 걱정됐다. 오늘 잘 살았냐는 배부른 소리는 구겨서 저 멀리 버렸고, 내일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만을 머릿속에 꽉꽉 채웠다. 꼭 생존밖에 없는 유기견처럼 경계심이 강해졌다.

그래서 화를 냈다. 그것도 자주 냈다. 틈만 나면 절약을 요구하고 생필품도 다 사치처럼 보였다. 나도 이러는 내가 지지리도 싫었다. 너무 처량해서 보기 역했다. 그러나 오늘로 다시 되돌아오는 방법을 나는 배우지 못했다. 누가 좀 알려주길 절박하게 바랐는데 너무 커버린 내게 삶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살아내야 했다.

낭비하진 않지만 가족들이 원하는 것만큼은 통 크게 장만해줄 수 있는 멋진 가장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너무 어리석고 작아 아내의 마음에 가끔씩 골을 넣기도 했지만 이내 또 자살골을 넣기 바빴다. 다정함도 능력이라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몇 가지 남루한 노력밖에 없었다.

현명한 사람일수록 함부로 불행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현명함이란 의외로 행복의 양을 늘리는 것보다 불행의 양을 줄이는 데 더 많이 쓰인다. 일단 한번 불행으로 물든 마음은 어떤 행복으로도 쉽게 퇴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은 행복에 비해 너무 강하고, 구체적이다. 행복이 상상이라면 불행은 일상인 것이다. 어른이 될수록 불행에 대한 수비력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

내 인생은 생각만큼 불행하지 않고, 생각보다 행복하다.

나는 불행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고 하니 불행했기 때문이다. 부족했던 건 행복의 양이 아니라 일종의 기준점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불행이 발견되면 일단 연필로 기준점을 긋는다. 거기서 통과하지 못한 것들은 절대 불행으로 등록해주지 않는다. 이게 내가 불행을 수비하는 방식이다.

사람이란 의외로 행복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 불행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우린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 충분한 만족감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제 와 누군가 내게 행복이 뭐냐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불행이 없는 상태."

행복이란 짜릿함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편안함과 안도감. 안정감과 잔잔함. 깊은 밤 고민 없이 잠들 수 있는 감사함 또한 우린 행복이라 이름 붙일 수 있기에.

부쩍 불행하다는 기분이 자주 든다면, 나만 뒤처진 것 같다는 생각에 괴로워질 때가 많다면.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 스스로에게 한 번만 물어보자.

"내가 정말로 그렇게 불행해?"
세상이 주는 답에 잠시만 가위표로 반창고를 붙여보자.
행복이란 귀를 열 때보다
귀를 닫을 때 오히려 더 잘 찾아오니까.

에필로그

우린 너무 쓸데없이 불행하고
너무 복잡하게 행복하다

불행이란 기다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막아내야 하는 것이라는 것.

물론 위인들의 말처럼 추위도 이겨낼 만큼 튼튼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어떤 비교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마음을 키우는 건 또 어떻고. 그런 대단한 일을 이뤄내기 전에 아마도 나는 늙어 죽을 것이다. ‘인생은 불행한 거야’라는 슬픈 체념을 부정하지 못한 채.

그럴 바에 차라리 옷을 더 단단히 입고 집 안의 보일러를 낭낭하게 트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어떤 비교에도 흔들리는 좀생이 같은 내 마음을 너무 잘 알기에, 나를 작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서 멀어지는 쪽을 선택했다. 이 책에 나온 모든 이야기들은 그런 목적에서 쓰였다.

당신이 행복하기에 앞서 쉽게 불행해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즐겁기 이전에 별 탈 없는 삶을 이어가길 바란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여름철 모기마저 수행이라 버텨내는 사람이 아니라, 꼼꼼히 방충망을 치고 모기향을 켠 뒤 잔잔한 밤을 보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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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귀여워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귀여운 것을 보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요즘 사회에서 나를 죽이는 것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에게 폭언을 퍼붓고,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 때문에 스스로를 재우지 않는 우리의 마음은 늘 긴장과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그 불꽃같은 마음마저 살기 좋은 온도로 식혀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 바로 귀여운 것들이다.

가족이 가족을 위로하기도 힘든 세상이다. 서로에 대한 위로는커녕 서로의 불행을 바라지나 않으면 다행인 세상이다. 그런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내 마음을 지키는 것은 여간 벅찬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럴 때 속는 셈치고 귀여운 것을 한번 찾아보자. 고양이든 수달이든 아이든 캐릭터든. 뭐든 좋으니 귀여움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경직된 내 마음을 녹이는 그 작은 것들을 찾아가자.

귀여움은 모든 것을 이겨버리니까. 스트레스마저도.

나는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 사진 찍을 시간에 뭐 하나라도 눈에 더 담아야 옳게 된 여행이라 여겼고 추억이란 볼 때가 아니라 떠올릴 때 더 깊은 맛이 난다고 꼿꼿하게 강론했다. 오산이었다. 젊든 늙든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많은 추억을 남겨주지 않았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생각보다 더 추억으로 남지 못했다. 저화질로 풍화되어 내 머릿속 어딘가를 둥둥 유영하고 있을 뿐, 절대 인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지갑만큼이나 카메라를 잘 열어야 했다. 늙어서 돈이 없는 것만큼 서러운 게 추억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고작 10년 전만 해도 사람을 싫어하는 데는 꽤 큰 용기가 필요했다. 끊기보다는 맺기가 더 각광받았고 피치 못할 이유로 관계가 끊어지면 설사 피해자라도 불편한 마음을 가져야 했다. 모두의 합의가 이루어진 악인을 제외하면, 우린 사람을 싫어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표현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관계는 꼭 발효식품 같았다. 모든 발효식품이 으레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대체로 풍미 좋게 익어갔지만, 한번 썩어버리면 어떤 음식보다도 더 고약한 악취가 났다. 추억이라는 방부제를 아무리 쳐봐도 이미 썩은 관계 위에 핀 곰팡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붙잡을수록 더 괴로워지기만 했다. 인간관계에도 유통기한이 있었는데. 그땐 그걸 몰랐다.

때로는 소유하지 못한 고통보다 소유하는 불편함이 더 크다. 그 말처럼 빗금 쳐진 관계까지 끌어안으려다 소중한 마음까지 다치지는 않을 것이다. 놓아줄 것은 놓아주고 소중한 것에 더 집중하는 성숙함을 배울 것이다.

사람을 싫어해도 괜찮다. 소중한 것을 더 좋아하기 위해서.

사람의 진짜 우아함은 무너졌을 때 드러난다고 한다.

윗사람에게 깨진 날 후배를 대하는 태도나 안 좋은 일이 넘친 날 웃으며 인사할 줄 아는 여유에서 우린 그 사람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우아함이란 다시 말해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두 조각난 날에도 평소처럼 인사하고 웃고 공들여 사과할 수 있는 태도.

마음이 지옥 같은 날, 모든 게 실패한 것 같은 날일수록 보다 공들여 웃고 감사하고 인사하자. 나를 위해서.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 작은 태도가 어떤 말보다 강력한 신호가 되어줄 테니.

오늘 나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오늘 다시 시작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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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람에겐 때때로 말 없는 위로가 필요하다. 몇 마디 따끔한 말로 구성된 무정한 위로보다 너의 상처를 이해하고 있다는 깊은 끄덕임과, 진심으로 네 말에 공감하고 있다는 눈 마주침이 우리에겐 훨씬 더 절실할 때가 있다. 아니, 많다.

아무 일도 없이 하루가 지났다.

조용한 게 좋다. 심심한 건 편안하다. 나른한 건 안정적이다. 짜릿함은 여전히 즐겁지만, 뭐랄까. 조금 피곤하다. 예상치 못한 일은 이제 기쁜 이벤트가 아닌 새로운 숙제다. 어제와 같은 하루가 나쁘지 않다. 즐거워할 일은 없지만 실망할 일도 없는 이 일상에 감사하게 된다. 나도 이제 어른이 다 됐나 보다.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짜릿함보다는 안도감에, 특별함보단 일상적임에 더 가깝다. 아무 탈 없이 일할 수 있어서, 아픈 곳 없이 가족과 통화할 수 있어서, 희망은 없어도 절망도 없이 내일을 또 살아갈 수 있어서 행복할 수 있는 게 지금의 내 삶이다. 누군가는 그토록 조용한 인생에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냐고 묻겠지만, 물론.

나는 서른다섯 먹고도 주식 하나 매수할 줄 몰랐다. 포토샵은 검색을 해야 겨우 네모칸을 만들 수 있었다. 초등학생도 만들 줄 아는 쇼츠는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했다. 어느새 어엿한 어른으로 평가받을 나이가 되었건만 나는 여전히 철부지 열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주변 어디에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 나이 먹고 그것도 몰라?" 그 한마디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릴 땐 모든 걸 물어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배려받고 싶다. 도움받고 싶다. 그러나 내가 내 가족에게조차 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바랄 수는 없다. 배려받을 염치가 없기에 나는 배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창피하지만 오늘도 직장을 피해, 지인을 피해 저기 먼 외딴 카페에 홀로 가 검색을 해본다.

"왕초보 쇼츠 영상 만드는 법"
배려도 배움도 받을 수 없던 그때의 할아버지가 요즘은 자주 생각난다.

조용함은 웃을 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울 일이 없는 상태니까. 기쁜 일이 없는 하루가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하루니까.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이 조용한 하루들은
우리 인생의 공백이 아닌,
여백이니까.

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아닌 저주를 내렸다. 그것도 ‘다 널 위해서야’라는 명목으로. 너무 가벼워서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땐 그걸 몰랐다. 말이었다.

나는 이제 내 사람들을 그렇게 위로해주고 싶다.

"살아"라는 무책임한 한마디가 아니라,
살아볼 만한 하루를 같이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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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000만 원과 경제적 자유, 그리고 불로소득. 요즘 시대에 이보다 더 달달한 단어가 있을까. ‘단시간에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그렇게 번 돈을 굴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만든다’니! 어딘가 비정상적인 꿈처럼 들린다. 그래서 이 단어를 만든 사람들은 한 가지 매우 강력한 조건을 내걸었다.

"내 강의만 들으면 돼."

나쁜 강연자는 희망을 팔아서 돈을 번다. 자신의 커리어가 아닌 타인의 성공을 예시 삼아 인생 역전의 용이함을 말하고 외제차와 아파트, 큰 매출만을 강조하며 듣는 사람들의 생각을 마비시킨다.
그들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경제적 자유와 불로소득을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음을 갈아야 하는지. 더러운 꼴은 또 얼마나 많이 견뎌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성의 가능성은 얼마나 작은 바늘구멍 사이에 놓여 있는지.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그건 안 팔리기 때문이다.

희망을 파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솔직히 이로운 일에 가까울 것이다. 희망만큼 요즘 세상에 절실한 가치는 많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책임지지 못할’ 희망을 파는 것은 악질 행위다. 타인의 인생을 담보로 자신의 지갑만 채우는 이기적인 행위다.

그래서 우린 좀 더 신중하게 희망을 사야 한다. 그 잘난 비법들을 왜 생면부지인 나에게만 이토록 쉽고 저렴하게 알려주려 하는지,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한다. 단순히 돈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의심해야 한다. 내 감정과 시간, 그리고 희망이다.

슬프지만 성공은 어렵다.
쉬운 건 성공이 쉽다는 말 한마디일 뿐이다.

인생에도 족보가 있다는 간편한 한마디에 쏟아붓기에 우리의 시간과 감정은 너무 소중하다.

결혼이란 한 사람과 비정상적으로 가까워지는 걸 의미한다. 일주일에 한 번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카페에 들러 기분 좋게 바이바이 하는 관계가 아니라, 매일 아침 부은 얼굴을 보고 쌓여 있는 설거지 때문에 다투기도 하며 혼자만의 시간은 일탈이 되는, 그런 삶을 말한다.
연인이라는 멋들어진 단어로 감춰온 민낯들은 에누리 없이 적나라하게 공개된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든다. 그러나 집에 갈 수는 없다. 거기가 우리 집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서로가 서로의 땅을 따먹는 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은 내가 100이 되면 오히려 패배하게 되는 모순적인 게임이었다. 그걸 알고부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린 서로에게 기분 좋게 져주기로 했다.

10년의 연애를 끝내고 결혼하던 순간 우린 진지하게 고민했다.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협상일까, 거래일까, 사랑일까, 포기일까. 여전히 그 의미를 다 알기엔 부족하지만 누군가 꼭 답을 내려야 한다고 묻는다면 이렇게 정의해보고 싶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변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관계. ‘너를 위해’라는 말랑말랑한 이유로 나를 포기하는 게 싫지 않다면, 그런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괜찮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결혼이란, 가족이란
기분 좋게 패배할 수 있는 게임이니까.

나만 뒤처진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안 한 지가 벌써 몇 년째다.

아직 한참 먹고 배우고 움직이고 익혀야 할 나이인데 무엇이든 움직이려고만 하면 이런 생각이 함께 일어났다. ‘근데, 이거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턱걸이 하나에 근육질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건만. 오늘도 나는 철부지 소년처럼 헛된 기대를 품고 또 좌절한다. 결국 달라지는 것은 더 늘어진 뱃살과 생각밖에 없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특징은 간단하다. 뭘 하든 완벽을 추구하기에 반대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잘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내일로 미루는 것을 선택하고,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기 위해 결국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병은 슬픈 병이다. 문제를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생기는 병이기 때문이다.

마치 끊임없이 울리는 사이렌 속에서 사는 삶과 같달까. 불을 꺼야 하는 건 알지만 내 힘으로는 끌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강하게 지배된다. 그래서 미루고 또 미룬다. 이 거대한 불도 한 번에 소화시켜 줄 강력한 소방차를 기다리지만 소방차는 절대 오지 않는다. 결국 커질 대로 커진 화재 앞에서 나는 부랴부랴 생수통을 붓거나, 될 대로 돼라 자포자기하며 타 죽는다. 그런 우리에게 심리학이 내리는 처방은 이렇다.

"너무 잘하고 싶어지면 반대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게 돼."

우린 시작이 어렵지 끝을 맺지 못하는 놈들은 아니다. 일단 뭐든 시작만 하면 퍼펙트하게 끝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기에 시작만 하면 스스로를 멈출 줄 모른다.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린 할 수 있는 일들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내는 사람들이다.

완벽을 제거하는 순간 오히려 모든 것이 다 가능해지는 모순덩어리의 인간. 그게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참모습인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무언가를 또 미루고 있을 게으른 완벽주의자들이여. 일단 눈앞에 보이는 것들 중 가장 비실한 목표를 데려오자. 절대 질 수 없는 게임을 시작하자. 내가 당신들을 대신해 이렇게 외쳐주겠다. 준비…

땅!
자, 눈앞의 가장 만만한 놈을 쥐어 팰 시간이다.

질투와 열등감. 어쩌면 내 인생의 절반은 그 감정들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내 질투심을 이겨낼 자신이 더 이상은 없다. 코인으로 인생이 피고 부동산으로 저 멀리 뛰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하지만 내 인생에는 나만의 행복이 있는 걸?(웃음)"이라고 말할 자신이 도저히 없다. 그래서 비겁하지만 내 해결책은 이렇다.

그냥 안 볼 거다. 내 마음의 건강을 위해 그들의 인생에서 과감히 눈을 돌릴 거다. 눈 감을 거다.

열아홉 살 래퍼가 한 달에 얼마를 버는지는커녕 당장 옆 동네 집값이 얼만지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기에 우린 자신의 인생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다. 모르는 것에는 질투를 느낄 수 없다.

우린 너무 많은 것에 질투를 느끼며 산다.

그래서 비겁해도 할 수 없다. 나는 내 세계관을 줄일 것이다. 나를 병들게 하는 너에게서 도망칠 것이다. 너의 성공에서 눈을 돌리고 네 행복에도 무관심할 것이다. 이 풍진 세상에서 내 마음이 더는 상하지 않도록, 나는 너를 보지 않을 거다.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내 인생을 살기 위해.

공감은 단순한 감성을 넘어 지적 능력까지 필요한 영역이 되었다. 요즘 시대의 공감이란 전혀 다른 상황에서도 비슷한 경험과 감정을 유추할 수 있는, 꼼꼼한 이해가 필요한 능력이 됐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타인의 취향을 무시하며 보기 흉한 우월에 젖겠지만(마치 나처럼), 사실 가장 저열한 지능의 소유자는 자기 세상밖에 없는 그 자신이다. ‘판다 한 마리가 뭐길래’ 조롱하며 웃겠지만 그 잔인한 논리는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 돌아올 뿐이다.

배려 없는 조롱의 종착지는 지금 웃고 있는 나의 입 앞이다.

S가 진심으로 자신을 믿게 된 순간은 의외로 주변의 응원을 마음껏 받은 순간이 아니라, 처음으로 학교 쪽지시험에서 만점을 받아냈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결국 받은 응원의 양이 아닌 해낸 성공들의 합이었다. 그게 아무리 작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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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한 예민과 청결은 어느 곳에서는 예능이, 또 어떤 곳에서는 질병이 됐다. 왜 이리 해석이 다를까. 며칠을 고민하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아, 어떤 문제는 뒤집으면 능력이 된다."

<청소광>에서는 예민함의 긍정적 측면을, <금쪽 상담소>에서는 부정적 측면을 보다 굵게 비췄다. 같은 대상이어도 비추는 조명의 위치에 따라 다름은 틀림도 특별함도 될 수 있었다. 상대적인 것이었다.

사람의 얼굴은 조명의 위치에 따라 천차만별로 보인다. 뚜렷했던 턱선도 빛이 조금만 틀어지면 왕주걱턱으로 왜곡되고 귀여웠던 콧망울도 빛이 어긋나면 호박코로 변신한다. 성격이라고 다를까. 성격의 장단도 그 자체보단 그걸 비춰보는 나에 의해 결정된다.

성격은 동전의 양면처럼 장단이 붙어 있다. 예쁘게 놓인 양말 자수도 뒤집으면 괴물로 보이는 것처럼 내가 보고 신고 입고 뒤집는 방향에 따라 못난 성격 역시 얼마든지 예쁜 그림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단점을 뒤집으면 뭐가 나올까.
‘부정적이다 ↔ 신중하다’ ‘예민하다 ↔ 섬세하다’ ‘성급하다 ↔ 추진력 있다’ ‘냉정하다 ↔ 객관적이다’ ‘겁이 많다 ↔ 안정적이다’

무엇이 되었든 생각보다 훨씬 더 근사한 면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Call Phobia)란 쉽게 말해 타인과의 통화가 두려워지는 현상을 말한다. 가수 아이유 씨가 고백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증상으로 주로 스마트폰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왜 유독 젊은 세대에게 많이 나타날까? 통화보단 문자에 익숙해서?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세대는 유독 ‘작은 실패’에 더 큰 수치심을 느낀다. ‘되’와 ‘돼’ 같은 맞춤법을 틀린다거나 옆 나라의 수도가 어디인지 맞히지 못할 때 우린 상상 이상의 조롱을 만나게 된다. 회사 일도 비슷하다. 뜬구름 잡는 기획은 참아줄 수 있다. 말 그대로 신입이니까. 그런데 복사를 못하는 건 뭐랄까… 어딘가 급이 다른 한심함을 느끼게 한달까?

콜포비아, 소셜포비아, 발음하는 것조차 어려운 디다스칼리아이노포비아(Didaskaleinophobia). 해마다 별의별 포비아가 출시되는 이유도 다 거기 있을 것이다. 남들은 잘만 하는 걸 나만 못할 때 우린 더 큰 자존감의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자란 건 해학이 되지만 나만 모자란 건 조롱이 된다. 그래서 우린 그럴듯한 포비아를 끊임없이 생산하며 말해왔다.

가만 보면 세상은 내가 아프길 원하는 것 같다. 콜포비아이길 바라고 번아웃이 오길 바라고 등교가 어려운 심약한 사람으로 지칭되길 바란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명명되는 순간, 내 단점은 오히려 보살핌의 이유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과 우리가 원하는 그 보살핌이 혹시 매 순간 조롱받을까 걱정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편안히 살 수 있는 상태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정확하고 어려운 진단명이 아니다. ‘따뜻한 무관심’이다. 통화가 불편하다는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콜포비아라는 감정 없는 진단명이 아니라, "그래? 그럼 문자로 하자."라는 다정한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 우리가 병이라고 지칭하는 것들 중 대부분은 사는 데 지장 없는 성격이나 개성인 경우가 더 많고, 진짜로 치료가 필요한 건 오히려 그토록 작은 것조차 쉽게 넘어가지 않는 사회적 시선이다.

별것 아닌 것은 별것 아니게 둬야 한다.
늘려야 할 건 포비아가 아닌 성향이다.

우린 그렇게 많은 곳이 아프지 않다.

학교폭력의 진짜 무서움은 고통의 강도가 아닌 아무도 내 고통에 관심이 없다는 것에서 오는 적막함이라고 한다.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를 내고 잘 보이는 곳에 피멍울이 져도 사람들은 웃으면서 잘 산다. 내 폭력은 오직 나에게만 당연하지 않다.
뉴스에선 친구들끼리 합심해 "멈춰!"라고 크게 외쳐주라 말하지만, 그랬다면 외친 모두가 그날 로우킥을 맞았을 것이다. 학교폭력은 절대 피해자가 멈출 수 없다. 가해자도 멈추지 않는다. <더 글로리> 연진의 말처럼 너는 그래도 되는 애고, 나는 이래도 되는 애니까.

요즘도 그날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때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맞아 죽더라도 뜯어서 말렸어야 했을까. 날아간 어금니의 주인이 나였다면 속이라도 좀 편했을까. 모르겠다. 그때도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불합리한 폭력을 멈출 세련된 방법을. 2005년의 그날, 맞고 있던 친구를 바라보던 나를 의자에서 일으키게 할 묘안을.
잊지 않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고작 그것밖에 할 일이 없어서 무력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매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끔은 폭력보다 무관심이 더 아프니까.

꼭 돈이 많은 사람만이 결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정한 경제력이 없이 결혼을 완성하는 사람을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보지 못했다. 말쑥한 아파트와 브랜드 있는 결혼반지가 최소한의 행복이 된 요즘, 일정 수준의 경제력은 필요충분조건을 넘어 핵심 그 자체가 되었다. 가족은 점점 더 부와 여유의 상징으로 변질되어 갔다.

행복에는 개별성이란 것이 존재했다.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저마다 자신만의 행복 한 줌쯤은 잃어버리지 않고 살았다. 행복은 신념과도 같아서 타인이 건들 수 없는 고유의 영역으로서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모두가 공장에서 찍어낸 규격화된 행복만을 원하며 그 컨베이어 벨트에서 이탈한 인생은 각종 멸칭으로 멸시를 받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불행한 우리들에 의해서. 우린 서로의 행복을 야금야금 빼앗아 먹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나만 불행한 건 아니라는 슬픈 위안을 덮고.

사회 보장은 좀 더 디테일한 부분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혐오와 멸시를 퍼뜨리는 콘텐츠의 제작자들도 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돈이 전부라는 단순한 논리에서 벗어날 힘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고작 20년 전만 해도 가난한 행복은 전설이 아닌 실제였으니까.

어린 시절 할머니는 말했다. 살다 보니 세상에서 젤로 힘든 게 성공이 아닌 만족이라고.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던 그 말이 이제 와 사무친다. 그 뜻을 좀 더 빨리 이해했으면 좋으련만. 어린 날의 나는 그저 흔한 자장가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눈이 다 감길 때쯤 할머니는 더 작게 독백했다.

"그러니께 이담에 키가 훌쩍 자라도 너무 높은 곳만 보고 살지는 말어. 너는 위, 아래가 아니라 앞, 뒤를 보고 사는 거야. 네가 살아온 거, 그리고 살아갈 거. 그렇게 눈을 돌려야 보이더라고.

내 인생에도 이쁜 것이 참 많았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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