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불교사 1
에띠엔 라모뜨 지음, 호진 옮김 / 시공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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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지 이미 수백년이라 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싯다릇타는 인도의 힌두교의 여러 신 중의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다. 오히려 불교는 이제 우리들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우리 민족 문화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쉽게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지금도 여러 권 남아 있는 원효의 저작들은 현전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보다 500년이나 빠르다. 역시 외래 종교였던 불교가 조선500년의 탄압과 근세의 타종교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면서 오히려 더 풍부한 문화 유산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는 불교라는 종교가 인도에서 만들어졌으나 실은 한국인들에게 더 적합한 종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런 나의 추정을 뒷받침하듯 초기불교의 사제격인 사문(samana) 이 바로 시베리아 일대의 유목민들의 무당인 샤먼과 같은 어원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따라서 오랜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우리 민족에게는 더 없이 적합했으리라 생각이 된다. 특히 가부좌 같은 것은 온돌방에서 생활하는 우리에게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근대 한국 불교계의 충격은 역시 인도와의 접촉일 것이다. 인도에서 들어왔다는 흔적조차 희미해진 불교가 다시 그 기원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범어나 파리어로 된 경전을 한역(漢譯)을 통하지 않고 직접 들여오고 있고 그러는 와중에서 여러가지 오류가 드러나고 있다. 이제 한역경전을 보는 것은 코미디를 보는 것과 같은 일로도 생각될 정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고타마와 그의 제자들이 걸었던 길에 대해서 전면적인 재인식을 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꽤 훌륭한 책으로 보인다.

고타마의 출발은 그가 카필라의 왕좌를 버리고 사문들에게 합류하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그는 극단적인 고행을 체험한 끝에 다시 생각을 고쳐서 극단적인 고행을 버리고 중도적인 생활을 도모하게 된다. 아시다시피 코타마 사상의 핵심은 팔정도, 사성제, 삼법인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팔정도야 말로 아라한의 이상이 잘 나타난 붓사시대 생생한 최고의 가르침이라 할 만 한다. 흔히 말하는 제법무아라를 자아의 부인이 왜 불교에서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이유는 아마도 인도철학과의 비교에 의해 더 분명해 진다. 인도 철학에서는 각기 브라흐마나 아트만 같은 어떤 초자아를 불변의 최고원리로 보고 여타 인도 전통의 인습들을 합리화하고 있기 때문에 정도정법을 추구하는 코타마의 입장에서 이들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단순히 자아를 부정하는 종교라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불교는 참자아를 바로 보고 그것이 병들었을 때는 정화를 통해 건전한 자아와 생활관을 확립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따지고 보면 사마나 즉 샤먼의 역할이 그것이 아닌가? 즉 카르마 업을 씻어내는 과정에서 참된 도에 의해 모든 것이 멸하여지는 경지 그것이야 말로 참자아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타마는 인생의 불행을 바깥에서 찾지 않은 사람이다. 즉 안에서 나에게서 찾았던 사람이었으며 그런 면에서 누구보다 참된 자유를 옹호했고 사상적인 면에서는 완전히 개방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고타마는 옳게 본 것이었다. 요즘 한국인들을 보라. 무슨 말을 하든 그들은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다. 뭐 대단찮은 사상가니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에게 한 번 자신들이 한 말에서 이러 저런한 의문점을 발견해서 그들에게 질문해 보라. 아마 90프로 이상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의 뜻을 자신도 모른다는 것을 시인하게 될 것이다. 자신도 모를 얘기를 곧 잘 지껄이는 사람들. 그들에게 주관이니 줏대가 있을리 없다. 남이 무슨 말을 하면 이리 저리 잘 쏠린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부처로 섬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혹하고 기대하는 탓이다. 그러나 고타마는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긍정한 사람이었으니 현대 한국인들은 오히려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섣불리 남과 같아지는 걸 좋아한다. 월드컵 때 너도 나도 똑같은 옷을 입고 익명성 안에서 절규하는 모습을. 이건 자기는 이렇다할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며 자신감이 없는 사람에게 개성이 있을리 없지 않은가.  우리는 조선중기 이후 500년을 이렇게 살아왔다. 소위 성리학자들을 보라. 아직도 이들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가 우습지만 그들의 이야기에서 어떤 진지하게 고려할 중요성을 갖는 주장이 있던가. 대단찮은 얘기를 하면서도 주자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생각은 피력하지도 못하는 하류들의 행진 바로 그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고타마 이후에도 그렇다. 부파 불교가 주장하는 개념들은 보다 복잡한 인도철학의 전개와 보조를 맞춘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껏 한역경전을 보았던 수준으로 불교를 평하는 것은 뱁새가 황새따라가기일 것이다. 물론 인도의 당대 다른 경쟁적 종교사상들과 불교 중에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를 말하는 것은 인도의 문헌연대가 불확실하므로 어려울 지라도 여러 학파의 논쟁 끝에 인도불교가 발전해 왔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이런 저런 이유로  요즘 한국 불교는 고타마 당시로 돌아가서 주체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누구나가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몰개성시대 고타마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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