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위하여
정혜신.진은영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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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이렇게 좋은데, 맛있는 음식이 이렇게나 많고, 아름다운 음악이 이리 많은데, 하고 느낄 때면 이런 세상을 미처 더 많이 들여다보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떠나보낸 사람들을 품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손 내미는 사람, 상처 주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하는 일이 잦아서 전체적으로 낮은 상태로 지내고 있습니다. 1년이 조금 넘은 것 같네요.

나이를 먹어서 알게 되는 감정들이 있지요. 차갑고 단단한 시멘트 바닥 틈 사이로 고갯짓하는 이름 모를 풀이라든가, 볕이 끌어당기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계절이 바뀌기 무섭게 퐁퐁 솟아나는 꽃들이라든가, 서로를 유혹하듯 공기 휘젓는 하얀 나비 한 쌍이라든가, 휠체어에 오래된 담요를 덮고 앉은 남편과 그 뒤에 휠체어를 밀고 산책하는 아내의 찰나라든가... 풍경처럼 지나쳤던 장면들이 이제는 사진처럼 눈에 박히고, 그곳까지 오게 된 어려운 시간들의 위대함을 느낍니다. 빛나는 한 순간을 관찰할 수 있게된 데 마음 깊이 감사하곤 해요. 

그것은 아마 '살아남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을 일도 없고, 운 좋게도 매일 몸 누일 집도 있고, 높은 사람을 욕하면 무조건 잡혀가는 때도 아닌데 어째서 살아남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화두가 되었는지 생각하면 허탈하기만 합니다. 집집마다 차가 있고, 모두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고, 개인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니 과거보다 객관적으로 발전된 사회가 아니냐, 많이 말하잖아요. 세상 참 좋아졌다, 하고요. 그런 것들이 개인을 더욱 소외시키고, 삶의 가치가 숫자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외면하면서 말이에요.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졌고, 계급 격차는 극복할 수 없을만큼 벌어졌고, 사회가 집중하는 가치는 무척이나 천박해졌는데도 말이에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라는 개인은 그저 무참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언제 발 딛은 이 땅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살아남는 것'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저는 '일베'도 그렇고 우리 사회에 자살이 많은 것도 결국 핵심은 주목받고 존중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고, 모두 도구화되고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중략)핵심은 우리 사회가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한 인간을 존중하고 집중할 줄 아는 사회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없으면 정말 지옥 같은 사회인 거죠. (124쪽)

자주 책을 모두 불태운 <화씨 451>의 세계가 떠오릅니다. 책이 사라진 자리는 온갖 감각적이고 화려한 영상 매체들이 존재감을 뽑냅니다. 개인은 그저 '소비자'로의 역할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아니, 못합니다. 더 큰 모니터를 하나 더 두는 것이 삶의 큰 목표가 됩니다. 그 삶에 만족하며 단절된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 이 디스토피아가 놀랍도록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건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치유라는 말이 진실의 무덤이 되는 방식으로 쓰여서는 안"(200쪽)된다고 한 진은영 시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타인의 고통에 접근하는 방법을 성실하게 가르쳐줍니다. '정신과의사'의 언어도, '시인'의 언어도 아닌 그저 타인의 고통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터득한 방법으로 말이에요. 덕분에 커다란 슬픔 앞에서 서로가 어떤 존재로 살아남아 같이 걸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 못했던 새로운 방향으로 따져보게 됐어요. '천사'에게 덧씌워진 화려한 수사 다 걷어내고 원래 천사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친구는 이 책 제목을 보고 냉소적으로 말하더군요. "천사는 없어"라고요.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사, 희망, 사랑 같은 단어에 낙관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걸 이제 어린 아이들도 알지 않습니까.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고, 사람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많이들 얘기하고요. 그 의견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도 지금의 현실입니다.

다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 적어도 천사들이 우리 옆집에 '산다'는 믿음을 가진 삶과 그렇지 않은 삶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생각합니다(천사가 원래 어떤 존재인지 따져보는 것을 포함해서요). 그러니까 이것은 삶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가깝겠지요.

향 좋은 차를 마십니다.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조심히 한 모금 마시고 숨을 내쉬면 가슴에 쌓였던 먼지가 조금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차 한 잔 하듯, 이 책을 읽었습니다. 먼지가 많이 빠져나간 것 같네요.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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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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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할 일이 많은 어느 날, 책을 들고 나섰습니다. 내릴 정류장을 놓칠 뻔하거나,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치거나, 이동하는 일이 귀찮게 되리라고 나설 때는 생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에요. (「관통」처럼)평범한 일상 어딘가에 미세한 틈 벌어진 곳을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소설 읽는 내내 말이죠.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일그러지고, 어긋나고,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삶은 안정되지 않을 뿐더러 피폐하기만 하고, 안전하게 발붙이고 설 조그만 땅뙈기 하나 없는 이들은 공격적이며 잔혹합니다. 그것은 완벽한 현실 인식이라서 섣부른 인사, 선의의 베풂 따위가 안 그래도 하찮기만 한 이 자리의 생활을 얼마나 쉽게 파괴하고 상처입힐 수 있는지 잘 알기 때문에 벌어지는 행위들이에요.

 

옆자리를 나눈다는 행위는 그 자리가 비어 있다고만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식우(蝕雨)」, 164쪽)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저대로 두면 그들은 녹아버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요. 그렇다고 옆자리를 비워주기엔 내 삶의 한 순간도 너무나 위태로워요. 그와 나의 삶은 아주 짧은 시간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비슷한 수순으로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으니까요. 아직 이 안에 있다고 해서 안심하지 않는 이유기도 해요. 그 낮은 상태, 그것은 나만이 아닐 겁니다.

 

자괴감은 느껴요. 사람이니까.

 

더러운 물 한 방울도 밟히는 순간만큼은 지우기 힘든 얼룩을 옷자락에 남기며 스스로를 주장할 줄 알았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11쪽)

그 시간은 길지 않죠. 총알 튀는 전장에서 그것은 그저 짧은 감상이고, 계속하다간 자칫 죽는 시간만 앞당길지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지척에 선 그가 도리어 총알이 되어 내 심장에 박힐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이미 너무 많이 그런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말이에요.

 

(전략), 적어도 지금 눈앞의 동물은 누군가에게 상처나 피해를 주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신체 활동인 소리와 움직임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사람보단 낫다는 것이다. (「이물(異物)」, 191쪽)

차라리 품 안에 작은 강아지, 정체 모를 동물, 우연히 만난 모조작품에 집중하고 그에 손 내미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이유입니다.

 

혹시 소설이 지나치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아주 건조하고 정확한 뉴스 기사를 읽는 것처럼 현실적이고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왜곡된 세계 안에 어느 개인이 일그러지지 않은모습으로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만일 일그러지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지나친 그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덧붙여 표지 말이에요. 책표지라는 게 참 신기해서, 책을 읽기 전까지는 도대체 의미를 찾기 힘든데 읽고 나면 작은 점 하나, 찢긴 틈새 하나도 큰 의미가 됩니다. 샛노란 배경 한 가운데 예리하게 벌어진 틈.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바라는 세상 모든 '나름대로의 삶'이 손짓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 멋진 표지예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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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3 0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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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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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조근조근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재의 고민에 대해 늘어놓다가 5년 후의 일을 상상합니다. 머릿속 시간은 아주 손쉽게 55세라는 시간에 닿습니다. 55세. 그 시간.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새로 어떤 것에 도전하기는 어려울 거야, 건강했으면 좋겠다, 향 좋은 차를 마시고 평화로운 햇살이 내리는 공원에서 볕을 쬐는 거야, 꽃밭을 가꾸는 건 어때, 하지만 돈을 많이 벌어놔야 하겠지, 그때도 일을 하고 싶진 않아, 세상은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을지도 모르지...

 

지금 살고 있는 일상이 그렇듯, 55세의 시간 역시 낭만으로만 차 있진 않겠지요. 삶이란 그런 것이고 그 시간 역시 특별할 것 없이 소중한 나의 삶일 테니까요.

 

이런 생각을 따뜻하게 보듬어 준 건 <55세부터 헬로라이프>입니다.

 

누군가는 이혼을 하고 젊은 남자와의 하룻밤에서 자신을 찾고, 어떤 이는 노숙자가 되어버린 오랜 친구의 마지막을 지켜주고, 다른 사람은 반려견을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라본다... 그것은 특별한 일이 무시로 일어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담담히 말하고자 했던 작가의 따뜻한 인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에게서 내 부모를 보고, 나를 보고, 삶을 바라보게 돼요. 저기 지나가는 아저씨의 삶을 상상하고 언젠가 알고 지냈지만 소식이 끊긴 지인의 삶을 궁금해하게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삶이 주는 날카로움에 공격당하지 않고 소중한 것을 지키며 지내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누구나의 '라이프'는 '헬로'하고 가볍게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이상 없기를 꿈처럼 바랍니다.

 

차를 마셔요. 작가가 보여준대로 천천히, 따뜻한 음료를 후후 불어가며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음미합니다. 마음에 쌓였던 별 것 아닌 먼지들이 가볍게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다시 크게 숨을 쉬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십니다. 더구나 이 계절은 그렇게 어떤 시간을 누리기에 참 좋은 때니까요.

 

그렇게 날 선 작품을 쓰던 작가의 따뜻한 이야기가 마음을 크게 울리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 좋네요. 이런 아침.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할 때 먼저 마실 것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그것은 의식 같은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 (<결혼상담소>, 58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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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아이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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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을 너무 일찍 내놓은 탓에, 이제는 완연한 봄이 되었는데도 화분은 시들하기만 합니다. 뒤늦게 화분의 괴로움을 알아차려 해 드는 곳을 따라 화분을 옮겨보고, 영양제도 꽂아주고, 혹 목이 마를까 물도 듬뿍 주지만 어쩐지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만 합니다.

 

화분 이야기를 해야 했습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을 읽고 나서 말이지요.

 

사람이 살고, 원하는 것을 하고, 다투고, 죽기까지 시간이 똑같이 흘러도 같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시기'라고 부르겠습니다. 시기가 적절치 않아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뒤바뀝니다. 조금씩 틀어진 저들의 운명은 역사를 바꿔놓기도 하지요.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저들의 운명을 탓하고, 옛날 이야기를 그리워하며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버텨냅니다. 어째서 이들의 삶은 그토록 닮아 있는지 몰라요. 사막은 황량하기만 하고, 마을은 척박하기만 하죠. 마을을 내려다보는 '대저택'은 굳건하고 냉담해서 누구에게는 존재만으로 희망이기도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에게 대저택은 절망을 상기할 뿐입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찰나에 불과한 영광의 순간들은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요.

 

영광은 알아차릴 틈 없이 서서히 다가옵니다. 공명심 높은 개인이 사람들과 부대끼며 제 생각을 고양시키면 서서히 전운이 감돌죠.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피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대의'가 무엇인지 잊지 않는 영웅들과 지지자들은 끝내 그들의 영광을 이룩해요.

 

많은 이야기는 그 영광의 순간을 보여주고는 끝이 납니다. 독자는 희망을 꿈꾸고 현실을 탓함과 동시에 그 현실에 살아갈 동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절대로 그렇지 않죠. 다시 부조리의 싹이 트고, 이기심이 자라나면서 제자리로 가고 말아요. 혹은 후퇴한 채로 머물거나 말입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이 빛나는 것은 영광의 순간 이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우리 동네'를 꿋꿋하게 그려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거든요.

 

순환하는 역사 안에서 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종교란 무엇인지, 과학과 무기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작가 나지브 마흐푸즈는 넓은 시선으로 '우리 동네'를 보여줌으로써 대단히 세밀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수장들(폭력배들), 관재인(재벌)과 마을 사람들이 대립하는 순간에 희망을 그리기도 하고요, 다시 새로운 영웅이 등장하기까지 순환하는 역사의 숙명적인 순간들을 담담히 적어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반복되는 이야기에 절망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들에서 오히려 희망을 얻었어요. 반복될지언정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어떤 순간은 언젠가 반드시 오리라고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죠. 다만 더 망가뜨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나빠지는 것을 막으려 노력하면서 다음 세대, 혹은 다다음 세대가 만날 영광의 순간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 어느 어른에게 들은 이런 삶의 자세로 씩씩하고 즐겁게 살아가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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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멍충한 - 기묘한 이야기에 담아낸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
한승재 지음 / 열린책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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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길이었는데, 아마 이른 시간 등교가 너무 힘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 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었을 겁니다. 목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고, 어쩐지 동작들이 만들어내는 푸득푸득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습니다. 의아했던 이유는 그 골목길이 인적이 드문 곳이고 이른 아침이라 길을 지나는 사람은 저뿐이었기 때문이에요. 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출처를 찾아 고개를 들었는데 저는 그만 돌고래가 부럽지 않은 엄청난 소리를 발산하고 말았습니다(그후 다시는 그 소리를 낸 적이 없어요). 제 어깨 정도 높이의 담벼락 위에 그야말로 빼곡하게(!) 비둘기들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 그때처럼 단어 본뜻에 가까운 공포를 느낀 적도 없었죠. 저는 뒤따라오던 할머니에게 강스파이크를 때리는 배구 선수 못지 않은 힘이 실린 손바닥으로 등짝을 얻어맞았고(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할머니), 즉시 그 골목길과 이별했습니다.


먼저 표지 얘기를 해야겠네요. 책을 다 읽고 책을 뒤적이다 발견했어요. 커버 일러스트가 작가의 작품이라고 써있더군요. 역시 재주 좋은 분입니다. 언뜻 만개한 꽃 같은데요, 실은 비둘기입니다. 비둘기...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비둘기는 그때부터 여전히 공포입니다. 그런데 비둘기 가득한 그림에 무려 <비둘기 파티>라는 작품을 읽어야 했을 때는 그야말로 괴로움이었죠. 공포란 참 불편한 녀석이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실은 슬픈 시기라 마음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너무 큰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 방법을 모르겠더군요. 책은 일찍부터 읽기 시작했지만 계속 다른 일들로 미뤄지곤 했습니다. 재미있는 책인데요. 재미있어도 되는 건가, 싶었거든요.

사실은 이 말을 가장 먼저 했어야 했는데 다른 말만 했네요. 이 책 재미있어요. 재미있습니다. 독특하고, 신선한 작품들이 줄줄이 나와요. 텔레파시로 대화하는 학대당한 인간들, 그들을 쫓는 형사의 잔혹함, 인간의 진화, 완전하지 않은 세상의 틈에 관한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 소재만으로도 흥미롭지 않습니까?


학생, 나는 말입니다. 딱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들으면 말이죠. 무조건 믿고 봐요. 게다가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착각인지 절대 확인하지 않습니다. 살아 숨 쉬는 것에 메스를 갖다 대는 순간 숨통은 끊어져 버리는 법 아니겠습니까? (22쪽, <검은 산>)


하지만 소재만으로 소설이 '재미있다'고 말하진 않죠. 잘 짜여진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 작가가 건축가라는 사실 마저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아주 좋은 발견을 했어요. 작가의 작품을 계속 기다리는 마음으로 마칩니다.


어려운 시기에, 이 책에 많은 도움을 받았네요.

*열린책들로부터 책 제공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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