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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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정말 많이 울었는데 아직도 제자리라니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분에게 간곡히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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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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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반영이라는 안경으로 집, 이 공간을 바라봅니다. 새삼스럽고, 특이한 곳이에요.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자리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생활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것들도,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네요. 이미 자리를 차지했다고 그에 해당하는 욕망이 끝나는가 하면 또 그건 아니라서 시끄러운 벽시계 대신 조용하고 아름다운 시계를 욕망하고, 풍문으로 들은 다양한 기능의 화분을 두고 죽이면서 또 두고 싶습니다. 자리를 찾지 못해 곁에 쌓여만 가는 책들도,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욕망이라는 것이, 언급한 것처럼 반드시 유형의 어떤 것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죠. 공간에 대한 선호는 성격에 따라 다르다는 연구도 있으니까요.(브라이언 리틀, <성격이란 무엇인가>, 챕터 8)

 

이 작은 공간이 그럴진대 유년기 강렬한 인상에 사로잡힌 꿈의 대저택이라면 어떨까, 어쩌면 저는 패러데이의 집착을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일찍이 어린 소년은 대저택에 홀려 (말 잘 듣는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저택 안을 잠입해 도토리 석조 조각을 강제로 떼어내기도 하는데요. 그것도 무척 애를 써서 일을 저지릅니다.

 

망가뜨릴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짓궂거나 뭔가를 함부로 때려 부수는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단지 그 집을 숭배하는 마음에서 집의 일부를 갖고 싶었을 뿐이다.(중략) 갑자기 사랑에 눈이 멀어 상대의 머리카락 몇 올을 갖고 싶어하는 남자의 심정이었달까.(13~14쪽)

아마 이때 이미 모종의 불안함이 움텄던 것 같습니다. "상대의 머리카락 몇 올을 갖고 싶어하는" 심정은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가 않죠. 실은 심각하게 안 건강해 보입니다.(불안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이 이렇게 비뚤어졌다면, 대환영입니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주인공이고, 이 불안을 뒷받침할 어떤 증거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불안함은 잠시 사그라드는 듯했습니다.

 

현재 꿈의 대저택은 애처로울 정도로 쇠락하는 중입니다. 헌드레즈라는 대지주의 주인들은 바로 그 헌드레즈와 싸우느라 바쁩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느라 다른 모든 것을 지켜내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처지. 에어즈 가문의 세 모자는 그렇게 세상과 고립되어 저들만의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간격, 민감하게 벌어진 틈새로 닥터 패러데이가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은 운명적이기까지 합니다. 패러데이에게 집을 구경시켜주는 캐럴라인, 이들의 대화는 운명이라는 고리를 짐작하기에 충분하죠. 심지어 집에 저당잡힌 이 생활을 투덜대는 캐럴라인에게 패러데이는 집이 "사랑스럽"다고까지 말을 합니다. 패러데이의 기저한 욕망.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어쩐지 여기에 많은 에너지를 쏟게 합니다.

 

그런가하면 이 '탐욕스러운' 집은 화려한 과거를 잊지 못하고 투정부리는 고약한 노인 같습니다. 어마어마한 덩치를 자랑하면서요.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이 집은 소설적 배경에 머무르지 않죠. 오히려 가장 적극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사람들을 갈등하게 만들고, 작품 전체에 지독한 긴장을 자아냅니다.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자꾸 자꾸 터져나오는 바람에 저는 패러데이에 대한 에너지를 거의 잃을 뻔하기까지 했어요. 캐럴라인이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씩 잃고 패러데이를 얻어가게 될 때까지는 말이죠.

 

패러데이는 캐럴라인과 결혼하려 합니다. 그것이 캐럴라인을 지키는 일이고, '헌드레즈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헌드레즈에 집착하는 패러데이는 헌드레즈만큼이나 기괴합니다. 혹시 이 기괴함은 모조리 패러데이의 것일까요? 그 때문에 캐럴라인은 모두에게서 도망치려한 것일까요? 에어즈 가에 드리운 헌드레즈의 저주는 과연 사실일까요? '리틀 스트레인저'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요?

 

답은 아무도 모릅니다. 패러데이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죠. 소설에서 적고 있는 것은 그뿐이기 때문에 힘 없는 독자로서는, 그저 그걸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음표를 한 쪽에 간직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나는 때때로 혼란스럽다. 나는 그 순했던 가엾은 지프를 기억한다. 로더릭의 방 천장과 벽면에 나 있던 이해할 수 없는 검은 그을음 자국을 기억한다. 에어즈 부인의 실크블라우스 위로 솟아나던, 내가 직접 목격한 세 방울의 피를 기억한다. 그리고 캐럴라인을 생각한다. 죽기 바로 전에 달빛 환한 계단참을 가로질러 걸어가던 순간의 캐럴라인을 생각한다. '당신!'이라고 외치는 그녀를 생각한다.(707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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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블 이야기
헬렌 맥도널드 지음, 공경희 옮김 / 판미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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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서럽다, 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혔습니다. 흡사 노래 <Lost stars>를 들었을 때의 서러움 같은 것이었는데요.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처연한 서러움이었습니다. 무척이나 울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상실과 회복에의 부단함, 좌절과 같은 감정들은 피하면 피할수록 좋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저자처럼 말이죠.

 

몇 주일이 흘렀다. 계절이 바뀌었다.(중략) 그리고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소위 '정상적인 애도' 중. 바로 그거였다. 별다른 일 없이 느릿느릿 상실 이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곧 다 나을 거야.' 내가 얼마나 쉽게 이 말을 믿었는지 돌이켜보면 지금도 쓴웃음이 나온다.(36쪽)

실은 망가지고 있습니다. 회복은 시간이 도와주지 않으니까요. 회복에 필요한 무언가,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무언가, 가 있다는 것은 그래서 행운입니다. 그게 여행이든 로봇강아지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참매든 간에 말이에요. 우리를 살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 후에는' 나는 친구들에게 나를 내버려 두라고 알려 두었다. 냉장고에 매의 먹이를 잔뜩 채우고 전화선을 뽑았다.(116쪽)

그야말로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내 삶에 목적이 생"(117쪽)긴 것이죠. 이것으로 버팁니다. 버티다가 이것이 전부가 된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과거의 상처들을 밝히고 그것들을 다시 찾아가 그 힘을 완화시키는 것."(129쪽) 그것만이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내게 역사는 소용없었다. 시간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내가 매를 길들이고 있는 것은 시간을 다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였다.(192쪽)

헬렌, 그에게 매는 훌륭한 피난처가 됩니다. "매 안에는 후회나 깊은 슬픔이 있을 수 없었"(257쪽)고 "오직 현재에 살았"(257쪽)기 때문이에요.

 

사실 우리는 모두 일그러진 존재들입니다. 돌연변이, 이방인이죠. 매는 그 사실을 매 순간 상기시킵니다. 늘 죽음을 떠오르게 합니다. 언제든지 끝날 수 있다는 공포, 그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일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는 메이블처럼, 헬렌처럼 일상화된 공포에 살고 있지 않나요? 죽음은 곁에 있고, 무한할 것 같은 삶은 나뭇가지처럼 푹 꺾이고 맙니다. 내가 떠날 것이, 곁이 떠날 것보다 두렵지 않을 때가 더 많죠. 아무도 자유롭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 냉소가, 현명하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나요?

 

서서히 이별하는 것들, 도저히 준비할 수 없는 그것들이 못 견디게 슬픕니다. 상상만으로도,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건 아름답고도, 황홀한 감정이기도 해요.

 

게다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들이 어떻게 고군분투하며 대화하는지 엿보는 일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메이블은 아름다운 존재여서, 헬렌과 꼭 어울리는 영혼의 짝이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런 존재가 하나쯤 곁을 지켜주었으면 좋겠어요.

꼭, 다시 한 번 읽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할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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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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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막힙니다. 기온은 어느새 38도를 가리킵니다. 냉방 장치는 없고, 선풍기뿐이지만 그도 무용지물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나를 덮은 피부마저 적으로 느껴집니다. 이 더위, 이 무더위가 말이에요.

 

삐걱거리는 의자가 있습니다. 의자에 앉은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큰 소리가 납니다. 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 좀 해! 시끄러워!" 하고 의자에 앉은 사람을 향해 소리칩니다. 소리를 낸 건 사람이 아니라 의자였지만 그는 의자에 앉은 사람에게 모든 잘못을 덧씌우고 화를 냅니다. 다시 말하지만, 탓해야 하는 것은 의자입니다.

 

미지의 공포가 주변을 서서히 잠식할 때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이것은 오래된 연구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카뮈가 <페스트>를 통해 그렸듯이, 많은 좀비 문학이 그렇듯이, 불가항력의 어떤 것, 죽음을 몰고 오는 낯설고 두려운 것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에 불과한지 우리는 좋은 작품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운이 나쁘게도, 얼마 전 실제로 겪기도 했고요.

 

<네메시스>도 그렇습니다. 공포상황 발발 1단계는 고양이 박멸이었죠.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원인이라고 '예측이 되는' 대상을 공격하는 행태입니다. 그러다 어떤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람들의 두려움과 적은 정보와 결합하면 큰 파장을 낳기도 하고요. 이탈리아인들이라는 공공의 적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2단계입니다. 정말 이탈리아인들이 폴리오를 퍼뜨렸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이유를 알고 싶고, 알아낸 이유를 피하고 싶습니다. 옆집 아이가 죽었다면 그곳을 격리하길 내심 바랍니다. 격리하지 않는, 더 적극적으로 도망치라고 말하지 않는 당국에 분노를 쏟아냅니다.

 

사실 이 사회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것은 폴리오가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병원균"(44쪽)인 것이지요.

 

여기서 버키의 태도가 눈길을 끕니다. 일상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함을 굳은 태도로 강변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위퀘이크 자체가 피해자가 돼"라고 말하기도 하죠.

(아마 이 태도가 더욱 눈길을 끌었던 것은 우리가 겪었던 직전의 상황에서 보이지 않았던 단 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진짜 화를 내야 할 대상이 의자에 앉은 사람인지, 의자인지를 통찰하고, 건강하고 단호한 태도로 일상을 유지하는 것을 말하며,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단단함이 무척이나 그리웠다는 것을 버키를 보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버키는 꺾입니다. 외면하고 있던 두려움과 직면하고 왜곡된 책임감을 자신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이 단단한 남자의 삶이 우두둑 꺾이는 소리가 존재를 뒤흔듭니다. 이제 그는 의자에 앉은 사람이 자신이고, 자신에게 모든 죄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것은 일어난 일이고, 이제 그는 그간 자신에게 균열을 냈던 미세한 책임감까지도 모두 포함해 전체를 다 끌어안고 속죄의 삶을 살아가기로 합니다.

 

그를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의 단단한 몸, 그 몸이 일으키는 경외심, 폭발하는 것 같은 근육들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떠올립니다. 폴리오라는 저주가 그를 덮치기 전 거의 완벽에 가까웠던 그의 정신과 몸을 생각합니다. 그런 그를 무너뜨린 것이 폴리오인지 그 자신인지 결코 알아내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오직 아이들만 다른 생각을 할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100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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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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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조금 울었다는 지인의 말에, 아아 그런 것이구나, 했습니다. 이 생이, 이놈의 삶이 이토록 나를 괴롭히고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 나라 때문이다, 라는 생각을 종종 나누곤 했으니까요. 어쩜 매일 같이 이런 후진 뉴스들이 나오는지, 어쩜 이렇게 창의적인 불합리가 판을 치는 곳인지, 얼마나 이 나라가 분노와 경쟁을 동력 삼아 굴러가는 나라인지. 우리는 매일 투덜거리고 '계나처럼'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말(만)하고 지냈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생존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요. 이 이야기를 들은 또 다른 지인은 당신들이 너무 열심히 살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더군요. 투덜이에게 내재된 사회 진보와 개선에 대한 욕망, 으로 분석한 것일까요. 새로운 접근이긴 했죠.  

 

문득 나라를 탓하기가 얼마나 쉬운 일인지 깨닫습니다. 그저 안전한 감옥의 수인이 되어 계절에 맞는 가장 싱싱한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으로 행복할 수 있는 존재로 사는 것이 어떤 일인지 생각합니다. 혹은 사회 안에서의 나, 그러니까 이 나라에 사는 구성원으로서의 자아가 택할 수 있는 가장 발전적인 선택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계나처럼 '한국이 싫어'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 정답일까요.

 

사실 <한국이 싫어서>는 그대로 읽을 수 없는 소설이죠. 드러난 이야기 자체가 우리 상황에 발 붙이고 있지만 뿌리를 쫓아가면 '한국'이라는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니까요. 이 소설은 그야말로 대단히 상징적인 설정으로 우리가 떠나온 것과 떠나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민주주의를 위시한 소수 권력 계층의 지배, 자본의 횡포, 소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노예냐 감독 노예냐 하는 것 정도라는 불편한 사실, 아직도 그 안에서 개인의 재능을 사회가 인정해주는 날을 꿈꾸는 낭만과 정신승리가 모두 읽히는 것은 저뿐만 아닐 겁니다.

 

그것이 또 대단히 쉬운 언어로 읽히기 때문에 '가볍다'는 평도 있을 수 있겠지만요. 저는 그것만으로는 반쪽짜리 독서가 될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오히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읽고 난 후 찾아오는 답답함이 이 소설의 내공이라 생각하고 있거든요.

 

답답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는 이런 문장이 주는 어떤 성찰 때문일 겁니다.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예비 낙하산을 펴면 되지만,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그럴 시간도 없어.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125쪽)

 

그래서 저 역시 울컥하고, 끝나지 않은, 어쩌면 이제 시작일 계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덮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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