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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멍충한 - 기묘한 이야기에 담아낸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
한승재 지음 / 열린책들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학교 가는 길이었는데, 아마 이른 시간 등교가 너무 힘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 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었을 겁니다. 목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고, 어쩐지 동작들이 만들어내는 푸득푸득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습니다. 의아했던 이유는 그 골목길이 인적이 드문 곳이고 이른 아침이라 길을 지나는 사람은 저뿐이었기 때문이에요. 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출처를 찾아 고개를 들었는데 저는 그만 돌고래가 부럽지 않은 엄청난 소리를 발산하고 말았습니다(그후 다시는 그 소리를 낸 적이 없어요). 제 어깨 정도 높이의 담벼락 위에 그야말로 빼곡하게(!) 비둘기들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 그때처럼 단어 본뜻에 가까운 공포를 느낀 적도 없었죠. 저는 뒤따라오던 할머니에게 강스파이크를 때리는 배구 선수 못지 않은 힘이 실린 손바닥으로 등짝을 얻어맞았고(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할머니), 즉시 그 골목길과 이별했습니다.
먼저 표지 얘기를 해야겠네요. 책을 다 읽고 책을 뒤적이다 발견했어요. 커버 일러스트가 작가의 작품이라고 써있더군요. 역시 재주 좋은 분입니다. 언뜻 만개한 꽃 같은데요, 실은 비둘기입니다. 비둘기...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비둘기는 그때부터 여전히 공포입니다. 그런데 비둘기 가득한 그림에 무려 <비둘기 파티>라는 작품을 읽어야 했을 때는 그야말로 괴로움이었죠. 공포란 참 불편한 녀석이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실은 슬픈 시기라 마음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너무 큰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 방법을 모르겠더군요. 책은 일찍부터 읽기 시작했지만 계속 다른 일들로 미뤄지곤 했습니다. 재미있는 책인데요. 재미있어도 되는 건가, 싶었거든요.
사실은 이 말을 가장 먼저 했어야 했는데 다른 말만 했네요. 이 책 재미있어요. 재미있습니다. 독특하고, 신선한 작품들이 줄줄이 나와요. 텔레파시로 대화하는 학대당한 인간들, 그들을 쫓는 형사의 잔혹함, 인간의 진화, 완전하지 않은 세상의 틈에 관한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 소재만으로도 흥미롭지 않습니까?
학생, 나는 말입니다. 딱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들으면 말이죠. 무조건 믿고 봐요. 게다가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착각인지 절대 확인하지 않습니다. 살아 숨 쉬는 것에 메스를 갖다 대는 순간 숨통은 끊어져 버리는 법 아니겠습니까? (22쪽, <검은 산>)
하지만 소재만으로 소설이 '재미있다'고 말하진 않죠. 잘 짜여진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 작가가 건축가라는 사실 마저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아주 좋은 발견을 했어요. 작가의 작품을 계속 기다리는 마음으로 마칩니다.
어려운 시기에, 이 책에 많은 도움을 받았네요.
*열린책들로부터 책 제공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