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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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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이 사람들이 한 권의 책에 다 이름을 올린단 말입니까.

거의 친숙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솔제니친부터 첫 문장을 자꾸 읊고 싶게 만드는 그 소설 <롤리타>를 지은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물론이고 나딘 고디머나 조지 소로스까지 이 대단한 스펙트럼의 인물들이 등장해야 했던 이유가 이 사람, '리모노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100% 납득되지는 않습니다만...

500쪽이 넘는 두툼한 이야기로 이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쫓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요. 유독 이 책이 읽기 힘들었던 이유는 '대체 이 사람은 뭐냐...' 하는 생각이 자꾸 발목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목차에서부터 그렇죠. 우크라이나 → 모스크바 → 뉴욕 → 파리 → (다시)모스크바 → 하리코프 → 부코바르 → 사라예보 → (또)모스크바 → (다시)파리 → 크라이나세르비아공화국(이름 깁니다;;) → (또다시)모스크바 → 알타이 → 레포르토보 → 사라토프 → 엥겔스(이 무시무시한 곳들) → (마침내)모스크바 로 이어지는 이 다채로운 궤적이라니요.

 

하찮은 조연이 되기를 극도로 거부했던 사람, 질투심으로 자신을 성장시킨 사람, 프롤레타리아의 정체성을 늘 염두에 두었던 사람(굳건히 지킨 사람, 이라고 적었다 지운다), 리모노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보노라면 그저 세상은 넓고, 사람은 제각각이다, 라는 생각만 맴도는 것입니다.

 

도무지 어려운 이름들과 낯선 풍경에서 헤매던 저는 책을 포기할 수 없어 '러시아 근현대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어보자 다짐했지요. 그러니 좀 읽혔습니다. 국가 폭력과 독재, 반독재 시위나 지하 조직의 이야기, 또는 가난한 민중들의 삶과 유리된 정책들은 만국 공통이로구나 생각도 했고요.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책, 『리모노프』는 너무했습니다.

 

자신들의 아버지뻘, 아주 어린 처년들한테는 할아버지뻘이 되는 남자, 스무 살에는 누구나 한 번씩 꿈꾸는 모험적인 삶을 살아온 리모노프, 그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리고 이 전설의 요체, 청년들 모두에게 리모노프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가 수감 생활에서 보여 준 쿨한 영웅주의다. (35쪽)

이렇게 호감 가는 인물로 주인공을 소개해놓고는 막상 열어보니

 

뭐, 암으로 죽으라 그래, 그 꼬맹이, 엿 먹어! 그래, 잘생겼어, 그래, 불쌍해, 그래도 난 마찬가지야, 엿 먹어! 차라리 잘됐어. 죽어라, 부자 애비를 둔 녀석아, 난 덩실덩실 춤을 출 거다. 진지하고 개성적인 내 인생이 하나같이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한테 짓밟히는 이 마당에, 내가 왜 연민과 동정을 가장해야 하냐고? (220쪽)

이런 생각이나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가감없이 보여주었으니까요.

리모노프의 초특급울트라슈퍼대서사시에는 많은 젊은 러시아인들이 추종하는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의 과격함과 이중잣대는 그야말로 '단 하나의 규칙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명제로 수렴되기 때문이죠.

 

물론 누군가를 미화시키지 않고, 단순한 위인전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찾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살아남은 자는 누구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낭만적이거나 웅장한 결말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다양한 삶은 의미가 있겠지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토록 자신에 대한 신념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이 책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책은 자체로 의미가 있어요. 한 인간이 (스스로 믿는)시대적 사명을 따라 가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모습은 범인의 눈에는 그저 낯설고 불편하긴 하지만요. 어쩌면 모든 영웅이 이렇게 태어나고, 혹은 사라지고, 좌절하고, 이야기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런 미시적인 부분을 감수한다면, 그렇다면 리모노프는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만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살아온 데에는 그 자신의 기질뿐 아니라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자본주의로 사회가 개편되면서 겪어야 했던 동포(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지 고민이 됩니다만)들에 대한 연민과 소명의식도 분명 큰 역할을 했잖아요. 그는 서방세계에서 충분히 편안한 삶에 편입되어 살 기회가 있었지만 거부했죠. 민족볼셰비키당이라는 당을 창당하고, 청년들을 조직하고, 총을 들기도 한 데에는 그 나름의 애국심이 분연히 발현되었던 것이죠.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리모노프의 이야기는 끝까지 아찔합니다.

세상이 이토록 작은 어긋남으로 직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아찔함을 거둘 수가 없어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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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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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밑이 자꾸 들썩입니다. 규칙적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미세한 들썩임이 신경을 갉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철분 부족 증상'이라고 간명하게 진단해버리고 말지만 쇠를 한 움큼 먹는다 해도 이 들썩임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습니다. 며칠째 계속된 들썩임은 이제 그 자체로 내가 된 듯합니다. 불안을 야기하는 예측 불가능의 불청객에 지배당합니다. 하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원래 나였던 듯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흑은 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백은 흑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는 내내 불안했습니다. 도저히 섞어들 수 없는 둘, 색의 대비만큼이나 선명한 둘의 태도가 '선셋 리미티드'의 철로처럼 끝까지 만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는 모습이 말이지요. 선이 만난다면 기차는 달리지 못할 테고, 계속 평행을 유지한다면 이 불안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눈 밑이 들썩여 불안이 더욱 커졌는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어째서 흑은 백을 놓아주지 못하고, 백은 흑에게 설득당하지 않는 겁니까. 왜 끝까지 둘은 닿는 듯 닿지 못하고. 서로를 발견하나 이해하진 못하고 흩어지는 말들을 늘어놓는 건지.

 

흑인 목사는 살인자, 전과범이자 마약과 알콜 문제를 가진 지인을 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지옥에서 천국을 설파하겠다는 사명의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에게 나타난 백인 교수는 어떤 이유에선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어요. 흑인 목사는 그를 구해내 자신의 장소로 데려옵니다. 백은 자살을 하려고 했던 자. 처음에는 균형추가 흑으로 기울어있는 듯합니다. 다즌즈 게임("형제들 둘이 서서 서로 욕을 하다가 먼저 열받는 쪽이 지는 거지" -71쪽)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흑은 그러나 백보다 먼저 승기를 잡은 듯해요. '골탕 구렁텅이'에 백을 빠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은 어째서 자살하려고 했나, 여기에 첫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아주 약했어요. 아주 부서지기 쉬웠지요. 나는 그걸 몰랐습니다. 절대 파괴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한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27쪽

세상은 구역질 나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안에서 작은 신호를 발견하거나 발견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흑인 목사가 자신의 삶을 그런대로 긍정하고 지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허름한 외면 안에는 나름의 신념과 자부심이 있어요. 우리는 대체로 그렇습니다. 지옥인지 모를 곳에서 천국의 그림자를 봐요. 그러니 흑은 백의 자살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어째서 자살을 하려 했는가. 그 의도의 가장 밑바닥을 드러내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면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백 역시 흑의 요구를 거부하는가 하면 일정부분 내놓기도 하는데, 그게 또 심상찮습니다.

백은 영리한 사람이니까요.

 

두 번째 질문, 흑은 백을 교화할 수 있는가.

이들의 대화는 치열한 게임 같습니다. 서로의 말을 되묻고 자신의 말을 숨기죠. 이들은 중요한 것을 대충 말하거나 사소한 것을 치밀하게 말하죠. 여기서 독자는 혼란을 느낍니다. 어째서 이 모든 대화가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이 제 멋대로인 듯한 계산된 의도대로 흘러가는가. 특히 저는 결국 흑인 목사에 동화되어, 조금씩 빗장을 여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백인 교수에 대해 막연한 희망을 감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긴 마라톤은 끝났다, 드디어 끝이 보인다, 고 말이지요.

 

하지만 끝내 흑은 이 게임에서 진 것 같습니다. 백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느꼈습니다)놀리듯이 자신의 고집을 내뱉고는 떠납니다. 다즌즈 게임의 규칙으로 보자면 백이 진 것이겠지만 좌절하는 것은 흑이니 흑이 진 것이 맞겠지요.

그렇습니다. 흑은 좌절합니다. 백을 만나게 하고, 얘기를 듣게 하고, 끝내 그대로 떠나가게 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당신이 왜 나를 거기 내려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해를 못하겠어요. 내가 저 사람을 돕기를 원하셨다면 왜 나한테 할말을 주시지 않은 겁니까? 저 사람한테는 할말을 주셔놓고.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138쪽

 

자살하려고 한 자와 그를 구한 자, 세상을 믿지 않는 자와 신을 대변하려는 자. 이 단순한 소설적 상황에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겠지요. 다만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어 짐작하자면, 신과 세상에 대한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여보려 한 것은 아닐까요? 어떤 이에게는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가 스스로를 져버리려 할 때조차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 신. 가장 밑바닥에서 희망을 보는 사람과 많은 것을 이루고도 좌절 속에 사는 사람. 범인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게 그런 신과 세상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각자는 제각기 다른 모습의 신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세상은 좌절도 희망도 같은 듯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가까스로 더듬어 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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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창비세계문학 40
마리오 베네데티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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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내게 암울한 운명을 주신 건 분명하다. 잔혹하진 않다. 단지 암울할 뿐. 하느님이 내게 휴전을 허락하셨다는 건 분명하다. 처음엔 이러한 휴전이 행복이라면 믿지 않으려 했다.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굴복했고 그렇게 믿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휴전이었을 뿐, 행복은 아니었다. 이제 또다시 나의 운명에 휘말렸다. 전보다 더 암울하다. 훨씬 더. (219쪽) 

주인공 마르띤. 그는 삶이라는 전쟁에서 일찌감치 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랑과 섹스를 탐미했던 젊은 날, 아내 이사벨을 잃고 그는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 그저 묵묵히 삶을 살아왔습니다. 세 아이를 홀로 키웠고, 퇴직을 앞둔 시점까지 성실하게 직장에 다녔으며, 부족하지 않을 만큼 벌었고, 간절히 퇴직을 기다리며 휴식하는 순간에 대해 꼼꼼하게 생각합니다. 패전이랄까요. 전쟁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잘 알았던 그는 규칙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한 줌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다듬습니다. 예민하고 섬세하게 말이지요. 그것은 분명한 패자의 태도이며, 완벽한 항복의 의사표시입니다. 


하나 고백하자면, 난 대문자 M이나 소문자 b 같은 몇몇 글자의 생김새를 보면 기분이 좋다. 그래서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해본 적도 있다. 내 업무에서 그나마 덜 싫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일의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성격이다. (11쪽) 

그런 그가 자신에게 철저하게 냉소적이었던, 혹은 스스로 철저하게 냉소했던 신과 휴전을 맺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휴전을 허락' 받습니다. 그것이 휴전일 거라고 짐작하지만 휴전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자신은 없습니다. 긴장했고, 의심했고,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휴전은 휴전입니다. 그에게 허락된 휴전, 한 여자, 아베야네다입니다. 


아베야네다. 아베야네다는 누구인가요. 그녀는 어째서 마르띤에게 허락된 휴전인가요. 


그녀는 노장 마르띤 밑으로 들어온 신입사원입니다. 처음부터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마르띤은 서서히 그녀를 담습니다. 딸 블랑까와 비슷한 또래일지언정 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뜨거운 열기에 휩싸인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예의 침착한 태도로 담담하게 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곧 온전히 서로를 이해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함께 하는 삶을 꾸립니다. 


흥미로운 것은 전형적이지 않은 관계에서 발견하는 이상적인 관계의 발전 양상입니다. 쉽게 말해,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사랑하는 여자도, 어린 여자에게 빠진 늙은 남자도 아닌 그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자신만의 방법대로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한 두 자아가 보여주는 풍경 말입니다. 아름답고 편안합니다. 불타지 않아도 따뜻합니다. 주변에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가 펼쳐지고 있지만 이들만큼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빛을 발합니다. 마침내 마르띤은 아베야네다와의 결혼을 결심하지요. 


그러나 이것이, 다름 아닌 신이 허락한 휴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우리는 무척이나 충격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결 같던 마르띤 역시 극렬하게 혼란을 느낍니다. 잊고 있던, 혹은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던 하나님을 되뇌이면서 말이에요. 

마르띤의 사랑은 끝나고, 신과의 짧은 휴전도 끝이 납니다. 마르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때보다 겪고 난 지금, 훨씬 더 암울합니다. 


그리고 그의 일기도 끝이 나요. 


참 서늘합니다. 

일찍이 냉소를 알아버린 삶이라는 것이. 

냉소 외에 달리 이 삶을 보듬을 다정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르띤의 일기가 끝나버렸다는 것이 말이에요. 

"이제 뭘 하지?" 하는 고민으로 삶을 부정하는 주인공(혹은 우리 모두)이라니 말이에요. 

쓸쓸하고, 쓸쓸해서 견딜 수 없어 자꾸 쓸쓸함을 어루만지는 쓸쓸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르띤의 엄청나고 비극적인 로맨스 외에도 소설은 그가 거니는 일상의 궤적을 통해 바로 그 자리의 사회를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친구 아니발과의 대화, 딸과 딸의 남자친구와 나누는 대화 등을 통해 그 자리에 사는 삶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과 허무를 생활 언어로 보여줘요. 이것들은 일관되고 정직하게 저들이 발 딛은 사회를 그립니다. 덕분에 그들의 삶에 온전히 빠져들게 되는 현장성을 획득하게 되죠. 


사실 예나 지금이나 뇌물은 항상 존재했고 낙하산 인사나 부정 거래 따위도 마찬가지다. 그럼 뭐가 더 나빠졌나? 머리를 쥐어짠 끝에 더 나빠진 것은 체념하는 태도라는 결론을 얻었다. 반항아들은 어정쩡한 반항아들이 되었고 어정쩡한 반항아들은 체념하게 되었다. (71쪽) 

입체적이라는 점에서 <휴전>이 주는 단단한 매력은 주인공 마르띤의 성격만큼이나 꼼꼼하고 예민하게 잔상을 남깁니다. 주인공이 살았던 풍경, 친구 혹은 자녀들과 나눈 대화 모두가 <휴전>이라는 짧은 그림을 완성합니다. 비록 그림은 고독하고, 주인공은 소외되었지만 그것이 어쩌면 모두의 삶이 아닐까요. 가끔씩 오는 '휴전'의 순간들에 비척거리게 되는 그런 삶 말이에요. 



*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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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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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또 거짓말을 합니다.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정직함과 신념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거짓말 하고,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는 척 또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이 없다면 세상도 없을 겁니다. 물론 문학도, 예술도 없겠지요. 그래서 거짓말은 세상이고 세상은 어찌되지 않는 현실이니 거짓말은 결국 우리네 현실이자 진실입니다. 거짓말 투성이인 세상은 사실 절대로 안전하지 않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들려 날아가버리고 말 지푸라기로 지은 집인 겁니다. 실제로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기도 하거니와 우리네 삶이 얼마나 위태롭게 겨우 발바닥 크기의 땅 위를 버티고 섰는지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앉아 책에 대해 노닥거리는 짓 마저도 신의 축복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네요. 이런 역설이라니. 삶이란 참 괴짜 같고요.   


세상이 지푸라기로 지은 집이라는 거짓말을 플래너리 오코너만큼 일관되고 냉소적이고 흥미롭게 하는 작가가 어디 흔할까요. 종교와 법, 윤리를 비웃는 그녀의 작품들은 기괴하지만 통쾌합니다. 종교적 주제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된 환상, 즉 '선의'가 있다면 문제 없다는 그 말도 안되는 환상을 오코너는 산산히 조각냅니다. 삶의 테두리랄지 안전한 홈스윗홈은 세상 어디에도 없지요. 이상향 역시,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은 추악한 민낯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다닙니다. 


지금은 백인 편, 흑인 편 두 쪽밖에 없어요. 이 선거가 그렇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아요. (<이발사>, 25쪽)


그녀가 그린 위선적인 삶에 대해 생각해 봐요. 아들, 손자, 며느리가 모두 죽어가는 마당에도 끝까지 '부적응자'를 교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그를 감화하려는 할머니(<좋은 사람은 드물다>)와 딸의 의족을 들고 튀는 청년을 멀리서 보며 '우리 모두가 저렇게 순진하다면 세상이 훨씬 좋아질 거라고 말하는 엄마(<좋은 시골 사람들>)는 어떤가요. 그들의 참혹하고 우스꽝스러운 최후는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어째서 저토록 부조리한 사고의 인간들이란 말인지!  


교사 삼촌은 최후의 심판의 날에 십자가 표시를 단 시체가 전부 모일 거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을 거야. 바깥세상은 네가 배우고 자란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 (<죽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 404쪽)


그렇지만 할머니와 엄마 같은 사람들은 소설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씩 인간이란 존재가 필연적으로 뱉어내고 있는 부조리 사고를 목도하게 돼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요. 앞서 고백했듯, 나는 매일 거짓말을 하거든요. 


플래너리 오코너가 보여준 냉소는 달리 보면 희망적입니다. 소설 같은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어떤 위안이 찾아들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단편들이고 압축적인 이야기들이니 매순간, 삶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세상 만사가 귀찮을 때 오코너의 세계 안으로 깊게 몸 담그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겠네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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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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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서로에게 감상을 이야기합니다. "그 장면은 진짜 깜짝 놀랐어"라든지 "주인공 연기 대단하네" 하는 식이죠. 친구 얘기에 맞장구 치기도 하지만 내심 놀랍니다. 같은 공간, 같은 장면을 있었는데 우리가 본 영화는 달랐으니까요. 책도 그렇죠. 정말 좋아하는 책을 추천했는데 상대 반응이 심드렁할 때, 진짜 재미있다는데 '응?'하게 되는 책을 읽을 때, '아.. 역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하게 됩니다.  

각자의 세상은 자기 외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게, 혹은 자신조차도 상상할 수 없게 편집되어 있습니다. 놀랄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쉽게 직원을 자르고 어떤 사람은 추운 겨울에 굴뚝 위로 올라가는 선택을 하겠죠. 각자의 세상이 똑같이 않다는 것은 그래서 축복이자 저주일 겁니다. 


데이비드 실즈는 책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모든 비평은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했어요. 인간에게로 시선을 넓혀봅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기억은 비평이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닐지 모릅니다. 당신에게만 그런 사람이었을 거예요. 나라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일까요? 내가 생각하는 내가 내가 아니라면요?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130쪽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나'란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존재입니다. 하물며 '나'에게 조각난 채로 남은 '그녀'는 어떻겠어요. 작가는 아예 적극적으로 '조각난 존재'와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내세웁니다. 잘게 쪼개져 조각난 기억에 의지해 과거를 추적합니다. 기억을 의심하고 떠오른 기억을 점검하면서 차츰 '그녀'에게로 향하는 여정이 바로 <지평>입니다.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는 상처 입은 사람들입니다. 오래된 상처를 안은 대도시의 삶. 공간과 자신을 연결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부유하는 익명의 존재들이 서로를 알아본 걸까요. 보스망스는 그녀와 익명의 도시에서 "서로를 보지 못한 채 스쳐지나갔을 것"(93쪽)이라는 사실을 직감합니다. 이제야 안개에서 퍼뜩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그는 그녀를 꼭 쥐고 싶습니다. 불가능하리란 예감이 늘 있었지만 말이죠.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의 과거를 처음부터 막연하게 느꼈던 것 같거든요. 그는 마르가레트가 "군중 속에 사라질"까봐 "순간순간 그런 두려움을 품었었"죠. "그녀를 처음 만난 날부터 그랬"(20쪽)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보스망스의 그런 예감이 더욱 애달픈 이유예요. 


사실 그녀를 찾지 못한다 해도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찾을 거라는 희망만 있다면요. 


적어도 의혹이 있는 한 아직 일종의 희망이, 먼 지평을 향한 탈주로가 남은 것이다. (153쪽)

보스망스에게 마르가레트는 과거의 파편이자 미래로 가는 지평입니다. 실제로 마르가레트가 어디 있는지, 그녀가 보스망스를 기억하는지, 기억 한다면 어떻게 기억하는지, 살아있기는 한 건지는 크게 상관 없습니다. 보스망스 안에 그런 조각이 떠돌고 있고 조각을 딛어 조금씩 걸어나갈 수만 있다면 말이죠. 생의 한 교차로에 있는 남자의 모습이 외롭고 고통스럽게만은 느껴지지 않는 이유일 겁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짧은 이야기를 풍성하게 합니다. 서글프고, 위협적일 때도 있고, 가만히 미소지을 만큼 평화롭고, 그저 아름다운 문장들이 열심히 과거를 지나오기 때문에 현재가 어디 있는지 또는 미래가 어떤 모양인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져요. 오히려 지금의 나, 이곳의 내가 이 소설을 만날 때마다 소설은 몇 번이고 변하고 다른 이야기를 건넬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지평>과 타인의 기억속 <지평>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 모여사는 수백만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긴 시간차를 두고, 그것도 매번 먼젓번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는 놀라웠다. (중략)그래서 보스망스는 운명이 때로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같은 사람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마주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 우리가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그건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18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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