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만진 슬픔 - 이문재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들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금장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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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의 요물 - 성석제

 

 

졸면서 운전을 하다 죽을 뻔 했던 일을 생각하면서

 다시 졸다 큰일나지 하며 또 존다

 

 잠을 자면서 자는 꿈을 꾸면서 꿈속의 내가 다시 잠을

자는 걸 꿈꾸고

 

 술을 마시면서 술 끊는 이야기를 하고 술 끊기로 했던

일을 이야기하며 술을 마시고

 

  사랑하고

 

  이별,

 

  생각이 요물이며 요물 안에 생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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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 숨다 - 류 시화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는 없는 것
시간이 지나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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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이 도는 여름 - 이상국

 

 

역병이 도는 여름

이웃집 백일홍이 피자 동네가 환해졌다.

사람이 사람을 피해 다니든 말든

때가 되면 꽃은 사정없이 핀다.

 

꽃은 사람에게 겁먹지 않는다.

사랑하지도 않는다.

저 자신이 꽃일 뿐.

 

저들도 병들고 아플 때도 있겠지만

꽃은 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얼굴을 가리고

벌 받은 것처럼 조용한 여름

백일홍 꽃숭어리들이 바이러스처럼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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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취향 - 박정대

 

 

아네스 자우이의 영화, 우아하게 적셔주는 코미디[레인]을 보

면서 당신은 울었다

 <히말리야, 바람이 머무는 곳>에 나오는 최민식을 보면서도 당

신은 울었다

 아네스 자우이, 아네스 자우이, 아주 이국적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뭔가 울컥하는 마음을 명치끝 저편으로 자꾸만

삼켰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 울컥울컥 우기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그대의 우산 속으로 파고들

었다

아네스 자우이, 아네스 자우이, 자욱이 물빛 안개가 깔리는 거

리를 지나 코케인으로 걸었다

 코케인에서는 밥 딜런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칠월엔 당신의 우산이 되어드릴게요

 (그럼 팔월엔, 구월엔 누구의 우산이 될 건데?)

 나는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영원은 모든 순간 속에 있었다

 영원은 모든 순간 속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우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

고 처음으로 타인의 취향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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