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음악을 들을 때, 나는 자유롭지 - 백창우

 

 

좋은 음악은 향기가 있지

금방 알 수 있어

황폐한 스무 살, 창 없는 방에 엎드려

날마다 가위 눌릴 때

나를 깨워준 건 바로 음악이었어

좋은 음악은 나를 돌아보게 해 주지

금방 느낄 수 있어

무엇을 봐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하나하나 일러주지

음악은 나에게 이르는 길이야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나는 자유롭지

나를 둘러싼 모든 담장이 한순간 무너져내리고

그 사이로 길이 활짝 열리는 걸

막막한 어둠 속에 있을 때도 내가

푸른 하늘을 꿈꿀 수 있는 건

내 몸 어딘가에

내 마음 어딘가에

맑은 음악의 시냇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야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생의 비밀을 알게 되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에게 - 이병금

 


꼬옥 안아주고 싶다

구부러진 오늘의 등을
부드러운 저녁의 고양이털을

커다랗게 벌어진 저녁의 입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내일은 더 멀리까지 가 보자며

나 혼자서 걸어간다

오늘과 내일의 물방울이 만나
뒤섞이는 물소리를 들으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음의 발견 - 이문재

 

 

마음은 늘 먹이 쪽에 가 있다

먹고 나서도 매양 먹이 타령이다

마음에는 마음이 너무 많아서

잠깐 한눈 파는 사이

마음은 또 다른 마음에게 추파를 던진다

 

마음이 사회간접자본이었으면 좋겠다

공기나 별빛 또는 공룡시대처럼

거리에서 마주친 두살배기 아이의 웃음처럼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처럼

개인이 가질 수 없었으면 좋겠다

배타적 소유권이나 저작권을 너나없이

포기했으면 하는 것이다

 

왼종일 먹이를 잔뜩 먹고 돌아온

마음들이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

텔레비전이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마음들의 잔등이 왼쪽으로 휘어져 있다

마음들은 새우잠을 자면서도

머리맡에 휴대전화를 켜놓고 있다

마음은 언제나 온 온라인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는데 뭔가 물컹했다

국가였다 가슴에 늘 국가가 들어있는데도

매일 아침 깜빡깜빡 한다

 

내 속엔 마음이 너무도 많아

내 마음 쉴 곳이 없다

 

마음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낯선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투명한 힘 - 김종제

 

 

무엇에 놀랐는지

화들짝 핀 능소화 꽃들이

담벼락을 받치고 있다

저 힘을 어디서 보았을까

동네 한가운데 우루루 몰려들어

어둠을 향해

햇불을 들고 달려가는 저 힘을

한낮에 어깨동무하며

침묵으로 행진하는 저 힘을

심장을 꿰뚫어버리는

투명한 저 힘을 어디서 보았을까

헐벗은 시절이 길어

손 내미는 것들에게 떼어주느라

반듯하게 세워놓지 못한 것들이

바람 한 번 불거나

큰물 한 번 지나가면

뿌리가 자주 흔들렸으니

무너지는 것들 옆에

쓰러져가는 것들 사이에

든든한 기둥처럼 붙잡고 견디라고

꽃이 피는 것이다

마음 흐린 날이면

한꺼번에 내밀어준 힘이 있어

능소화에 등을 기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제대병 기형도

 

 

위병소를 내려오다가 문득 뒤돌아본 1982
827일의 부대 진입로 무엇이 따라오며
내 낡은 군복 뒤에서 소리쳐 부르고 있었을까
부르느냐 잡으면 탄피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사계
여름을 살면서 가을을 불시착하고 때로는
하찮은 슬픔 따위로 더러운 그리움으로
거꾸로 돌아가기도 했던 헝크러진 시침(時針)의 사열

떠나야 하리라
단호히 수입포 가득 음습한 시간의 녹 닦아내며
어차피 우리들 청춘이란 말없음표 몇 개로 묶어둔
모포처럼 개어둔 몇 장 슬픔 아니던가
많은 기다림의 직립(直立)과 살아 있지 않음들 또한 땅에 묻히리라
잊혀지리라 가끔씩 낯선 시간 속에서 뒤늦게 폭발하는
불발탄의 기억에 매운 눈물 흘리며
언젠가는 생을 낙오하는 조준선 위로 떠오르는
몇 소절 군가의 후렴에 눈살 찌푸리며 따라 일어설
추억들이란 간직할 것이 못 되었다.
물론 먼먼 훗날 계급장 떼어버린 더욱 각도 높은 경례의 날을
살아가다가 거리에서 문득 마주치는
군용 트럭 가득가득 실린 젊음의 중량 스쳐가며
마지못해 쓸쓸히 웃겠지만
그때까지 무엇이 살아 있어 내 젊은 날 눈시울 축축이 적셔주던
흙길의 군화 자국 위에서 솟구쳐올라
굳은 땅 그득히 흘려줄 내부의 눈물 간직할 건가

잘 있거라 돌아보면 여전히 서 있는 슬픔
또한 조그맣게 잘리며 아스라히 사거리(射距離)를 벗어나는
표적지처럼 멀어지거늘
이제 나는 어두운 생의 경계에 서서
밤낮으로 시간의 능선을 넘어오는 낮은 기침 소리 하나하나 생포하며
더욱 큰 공포와 마주서야 하는 초병(哨兵)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잘 있거라 내 젊은 날 언제나 가득히
그 자리 고여 있을 여름, 그 처연한 호각 소리여
훈련이란 우리들 행군간의 뒤돌아보지 않는 연습의 투사(透寫)일진대
,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발견하는 하늘
입간판을 돌아설 때 한꺼번에 총을 겨누는 사계
뒤돌아보면 쏜다. 그리하여 두 손 들고 내려오면 위병소
그 질척한 세월의 습곡(濕谷) 아아, 사나이로 태어나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