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한계 - 명위식

 

                       

살아오면서

할 말도 다 하지 못했고

못할 말도 참 많이 했다

말하기 싫어서 침묵했고

말하고 싶으면 수다를 떨었다

말하지 않아 오해를 부르고

함부로 말하다 상처받고

마음 아팠다

 

세파가 그칠 날 없는

복잡한 세상살이

언어의 한계를 통감한다

입에서 나간 말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돌아오는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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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전어 - 정일근


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듬뿍 썰어달라 하자
잔뼈를 넣어 듬성듬성한 크기로 썰어달라 하자
바다는 떼지어 헤엄치는 전어들로 하여 푸른 은빛으로 빛나고
그 바다를 그냥 떠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을을 어찌하지 못해 속살 불그스레 익어
제 몸 가득 서 말의 깨를 담고 찾아올 것이니
조선 콩 된장에 푹 찍어 가을 바다를 즐기자
제철을 아는 것들만이 아름다운 맛이 되고 약이 되느니
가을 햇살에 뭍에서는 대추가 달게 익어 약이 되고
바다에서는 전어가 고소하게 익어 맛이 된다
사람의 몸에서도 가을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법이니
그 빈자리에 가을 전어의 탄력 있는 속살을 채우자
맑은 소주 몇 잔으로 우리의 저녁은 도도해질 수 있으니
밤이 깊어지면 연탄 피워 석쇠 발갛게 달구어 전어를 굽자
생소금 뿌리며 구수한 가을 바다를 통째로 굽자
한반도 남쪽 바다에 앉아 우리나라 가을 전어 굽는 내음을
아시아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즐겁게 피워 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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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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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의 그 집 - 박 경 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서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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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빌린 배 박정대

 

 

인생은 빌린 배와 같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이 작은 배를 나는 언제 돌려주게 될까*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겨울, 생계가 어려워진 한 가족이 그들

의 집을 밧줄로 묶어서 눈발 위로 끌고 가고 있다, 그들은 이사

를 가고 있는 것이다

 

바닷가 전망 좋은 곳으로 집을 끌고 가서는 폭풍우에 집이

날아갈까 봐 다시 집을 땅 위에 밧줄로 꽁꽁 묶어둔다, 낡은 집

에 의해 바닷가 전망이 다소 가려진다

 

결국은 폭풍우에 낡은 집이 날아가 버리고 다시 전망이 좋아

진다, 는 내용의 영화가 있다

 

낡은 집에 관한 이야기 같은데 영화의 제목은 <쉬핑 뉴스>,

선적 소식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아직 신문기사의 헤드라인도 제대로 못 잡

<개미 버드>라는 신문의 초보 기자다, 개미 버드라니!

 

그 외에도 이 영화에는 더 많은 것들이 선적되어 있을 것이다

 

인생은 빌린 배와 같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이 작은 배를 타고 나는 어디까지 온 걸까

 

영화 속 주인공의 어투를 빌어 표현하자면, 오늘 이 글의 헤

드라인은

 

'이번 엔 시 같은 건 쓰지 마!'

 

쉬핑 뉴스 끝.

 

 *인생은 빌린 배와 같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이 작은 배를 나는 언제 돌려주게 될까 - 테오도르 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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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7 2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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