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혹은 배반에 대하여 - 박상천

 

 행운을 가져다 줄 거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행운목 한 그루씩을 키운다


 그의 발치에 정성스레 물을 붓고

 분무기로 물안개를 만들어 

 푸른 잎을 닦아주며

 우리는 행운목이라는 이름의 나무를 키운다.


 행운목은

 우리의 믿음만큼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우리의 의심을 덮을 만큼

 무성하게 잎을 드리운다.


  어디선가 꽃을 피웠다는

 그 꽃의 향기가

  백합의 향기보다 진하다는 

 소문이 멀리서들려 올 때마다 

 행운목이

 꽃을 피우고 행운을 가져올 거라는

 우리의 믿음은 견고해진다.


 행운목이 가져다 줄 행운을 꿈꾸며 

 행운목이 피워낼 꽃을 꿈꾸며 

 우리는 행운목이라는 이름의 

 나무 한 그루씩을 

 가슴에 담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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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균

 

 

 

 

풀잎이 살짝 스쳤을 뿐인데

손을 베었다

 

나는 종이에도 잘 베이고

작은 상자나 책받침

플라스틱 모서리에도 잘 베인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깃털에도

잘 베이고

창 밖에 내리는 어둠에도

잘 베인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베이고

아득한 절벽과 비탈길에도

잘 베인다

 

빗물이 닿으면

베인 곳은 

더욱 더

쓰라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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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르다 - 나희덕


 

 좋아하는 동사를 묻자 그는

 흐르다, 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 동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 가 흘러내리다, 의 동의어라는 것을

 

 그저 수평적 움직임이라고만 생각했다

 몇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눈물의 수직성을

 

 눈에서 입술로, 상류에서 하류로, 젊음에서 늙음으로,

 아 있음에서 죽음으로, 높은 지대에서 낮은 지대로, 어제에

 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 최초의 순간에서 점점 멀어지는

 방식으로,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방향으로, 기억

 의 밀도가 높은 시간에서 낮은 시간으로

 

 흐르는 모든 존재는

 흐르는 동시에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아래로 아래로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흘러오르다, 라는 말이 어디 있는가

 

 고여 있거나

 갇혀 있지 않는 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물과 흙

 피와 눈물

 세포와 원소

 사랑과 우정

 또는 시간과 기억

 

 원치 않았지만 그것이 끝내 우리를 데려다 부려놓는 곳

 어떤 하류의 퇴적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 라는 동사는 흐르지 못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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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 짐 자무시 67행성 - 박정대




9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 뜨거운 차를 마시고 덥혀진 몸으로 그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오래 이야기하고 싶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그 바람에 밀려 아득히 먼 곳으로 흘러가는 구름에 대하여, 덜컹거리는 창문과 덜컹거리며 달려가는 겨울 야간열차에 대하여, 대륙을 횡단하는 생에 대하여 

  

10 

사물의 상태, 내가 만지고 쓰다듬는 사물의 상태,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물의 상태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모든 사물들은 뜨겁고 동시에 차갑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호응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정렬하는 것이다, 내가 밤에 당도한 것이 아니라 밤과 내가 지금 여기에 당도한 것이다그냥 당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꿈꾸었기에 지금 여기에 내가 고요한 사물의 상태로 당도해 있다 

 

11  

담배연기로 사색을 한다, 담배연기로 항해를 한다, 참 많은 유령들의 시간이 지났다, 퇴근할 시간이다, 많은 것들이 변형되고 더 많은 것들이 추가될 것이다,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아우라를 부정하고 마후라를 목에 휘감고 펄럭이며 퇴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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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편지 고두현




 날마다 네 안에서


 해가 뜨고 달이 지듯


 그렇게 봄 산이


 부풀었다 가라앉듯

 

오늘도 네 속에서


먼저 피고 먼저 지는


 꽃 소식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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