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 25 | 26 | 2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그대는 혼자가 아니니라 - 신현림

 

 

그대 슬픔 한 드럼통 내가 받으리라

감미로울 때까지 마시리라 평화로운 우유가 되어

그대에게 흐르리라 또한 태풍같이 휘몰아쳐

그대 삼키는 고통의 식인종을 몰아내고

모든 먹고 사는 고뇌는 단순화시켜 게우리라

술에 찌든 그대 대신 내가 술마시고

기쁜 내 마음 안주로 놓으리라

그대 병든 살 병든 뼈 바람으로 소독하리라

추억의 금고에서 아픈 기억의 동전은 없애고 말리라

그대 가는 길과 길마다 길 닦는 롤러가 되어

저녁이 내리면 그대 가슴의 시를 읊고

그대 죽이는 공포나 절망을 향한

테러리스트가 되리라 신성한 연장이 되어

희망의 폭동을 일으키리라

하느님이 희망봉일 수 있다면

물고기가 되어 교회로 헤엄쳐 가리라 험한 물결

뛰어 넘으리라 간절히 축복을 빌리라

그대는 혼자가 아니리라

영원히 홀로치 않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동백(미황사에서) - 박남준

동백의 숲까지 나는 간다
저 붉은 것
피를 토하며 매달리는 간절한 고통 같은 것
어떤 격렬한 열망이 이 겨울 꽃을 피우게 하는지
내 욕망의 그늘에도 동백이 숨어 피고 지고 있겠지
지는 것들이 길위에 누워 꽃길을 만드는 구나
동백의 숲에서는 꽃의 무상함도 일별 해야 했으나
견딜 수 없는 몸의 무게로 무너져 내린 동백을 보는일이란
곤두박질한 주검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일 같아서
두 눈은 동백 너머 푸른 바다 더듬이를 곤두세운다
옛날은 이렇게도 끈질기구나
동백을 보러갔던 건
거기 내안의 동백을 부리고자 했던 것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떨어지네
무수한 칼날을 들어 동백의 가지를 치고 또 친들
나를 아예 죽고 죽이지 않은들
저 동백 다시 피어나지 않겠는가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피어나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생이란 - 오세영

 

 

타박타박 들길을 간다.

자갈밭 틈새 호올로 타오르는

들꽃 같은 것,

 

절뚝절뚝 사막을 걷는다.

모래바람 흐린 허공에

살폿 내비치는 별빛 같은 것,

 

헤적헤적 강을 건넌다.

안개, 물안개, 갈대가 서걱인다.

대안(對岸)에 버려야 할 뗏목 같은 것,

 

쉬엄쉬엄 고개를 오른다.

() 너머 어두워지는 겨울 하늘

스러지는 노을 같은 것,

 

불꽃이라고 한다.

이슬이라고 한다.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독서   -김연숙

 

   

낡고 부드러운 쿠션에 코를 박듯 가볍게 국경을 넘어간다 일조량은 적으나 쾌적한 습도와 조도를 유지하는 이곳에선 숨쉬기가 편안하다 입국 이후 점차로 외부와 차단된다 숲으로 둘러싸인 성벽의 나라, 골목과 오솔길의 나라 도로표지판도 없이 골목이 골목을 가지치고 샛길이 샛길을 사다리 탄다 방음벽이 두텁다 시계도 없는 이곳에서 눈 비비며 둘러보면 격자무늬 담 밖으로 먼동이 트고 격자무늬 담 밖에서 끼니때가 지나간다 이 친숙한 중독의 나라에서 후미진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으면 오래 전에 죽었다는 사람과 마주칠 때도 있다 노동재해 보험국에 근무하며 처마 낮은 푸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도 만난 적 있다 모퉁이에 몸을 반쯤 감추고 유대인의 짙은 눈으로 뚫어지게 나를 보며 서 있었다

 

  멜크수도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 25 | 26 | 2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