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呂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듯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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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름을 보다 - 이동식

 

                    
한때 나는 아름다운 꽃을 보면
꽃의 아름다움만 예찬했지
꽃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도록 도운
거름은 생각하지 못했지요.

한때 나는 거대한 나무를 보면
나무의 거대함만 감탄했지
나무가 거대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운
거름은 생각하지 못했지요.

그런데 이제 내 눈에도 거름이 보이네요.
내가 아름답다 예찬했던 꽃을 만든
내가 거대하다 감탄했던 나무를 만든
그 생각하지 못했던 거름이 보이네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혼란스런 세상이
그래도 버티고 버티며 돌아가는 것은
맡은바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는
거름 같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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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릴 수 없는 것들 - 박정대

  

 

나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너의 얼굴을 만지면 손에 하나 가득 가을이 만져지다 부서진다

쉽게 부서지는 사랑을 생이라고 부를 수 없어

나는 사랑보다 먼저 생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적막한, 적막해서

아득한 시간을 밟고 가는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본다

네 그림자 속에는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이 담겨 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끝내 사랑할 수가 없어

네 생각 속으로 함박눈이 내릴 때

나는 생의 안쪽에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만 볼 뿐

네 생각 속에서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 속에는 사랑이 없다

그리하여 너의 쓸쓸함엔 아무런 기원이 없다

기원도 없이 쓸쓸하다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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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의 나무 - 황 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 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測光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病名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다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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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는 배후가 없다 -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들어 선문(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노후(老後)!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반골(反骨)의 동지(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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