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영화관 ㅣ 환상 시리즈
호리카와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극장에 가서 자리에 앉았을 때의 즐거움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지. 자리에 앉아서 문득 뒤를 돌아보면 저 높은 곳에 자그마한 창문이 있는 거야. 극장 안이라는 게, 꼭 먼지가 떠다니잖니? ... 영사실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서 그 부분만 먼지나 티끌이 또렷하게 보이는 거야. 뭐, 먼지니 좋은 건 아니지. 하지만 어린 마음에는 마법 가루처럼 보였단다. 저 꼭대기 작은 곳에서 나오는 마법 가루가 영화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                 p.75


스미레는 아침 등교길에 노신사의 유령과 마주한다. 스미레가 유령을 보는 일은 신기하기는 하지만 결코 드문 일은 아니었다.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이미 학교는 지각이었다. 전철에서 내리는데, 옆 차량에서 내린 한 쌍의 남녀를 보며 깜짝 놀란다. 딱 봐도 불륜임을 알 수 있는 중년 남자와 상대 여성이었는데, 그 중년 남자가 바로 스미레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요즘 일주일에 절반은 집에 안 돌아오고, 늘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는 것이 수상했는데, 역시나였던 것이다. 화가 나서 아버지와 불륜 상대의 뒤를 쫓아가는데, 그곳은 옛날부터 좁은 2차선 차도 양옆으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상점가였다. 


그렇게 그들을 쫓아가다 무심코 들어간 곳은 오래된 잿빛 빌딩의 로비였다. 무척 오래된 서양 영화 포스터와 한산한 매점, 충전재가 튀어나온 긴 의자와, 게르마 전기관이라는 금색 간판, 그곳은 비좁고 낡아 빠진 영화관이었다.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맞닥뜨리고, 정신없이 달려가다 급기야 학교에도 가지 않고 영화를 보게 되다니... 열여섯 살 오늘날까지 바른길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스미레에게는 엄청난 하루였다. 그곳에서 영사 기사로 일하는 아름다운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만 스미레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는데, 마침 학교에서 친구도 없고, 따돌림을 당하던 차에 학교 대신 일을 하고 싶다고 집에 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스미레는 낡은 영화관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그곳은 여러 모로 이상한 일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해해 주는구나......"

마리코 씨가 갑자기 힘차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세상에서 '돌아온 사람'을 찾지 못하면 지배인님이 책임져야 해...... 그렇게 되면 내가 게르마 전기관에 눌러앉은 것도 들통날 테고, 큰일이야......"

"그래서 지배인님이 그렇게 당황했던 거군요? 그럼 저희도 '돌아온 사람'을 찾는 건가요? 완전 미인 유령과 소녀 탐정이네요." 

무서우면서도 설레는 일입니다. 긴장과 흥분으로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p.135~136


사람이 죽기 직전에 인생에서 겪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바로 그 '주마등'을 보여주는 영화관이 있다면 어떨까. 매달 달빛이 사라지는 초승달 밤에 죽은 사람들이 심야 상영을 보러 영화관에 모여든다. 그리고 다들 자기 인생의 '주마등'을 보면서 천국으로 떠난다. '게르마 전기관'이라는 이름의 이 영화관에는 두 개의 관이 있는데, 1관은 지나간 영화들을 상영하는 일반 영화관, 2관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 존재하며 주마등을 상영하는 곳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망자들이 방문하는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여고생 스미레가 극장에서 벌어진 불가사의한 일과 같은 반 친구의 할머니 유령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호리카와 아사코의 '환상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신의 계약서 및 망자의 유품 등 ‘경계’를 오가는 우체국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졌던 <환상 우체국>에 이어, 이번에는 망자가 방문하는 영화관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환상 영화관>이다. 각각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전작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해 원령이 되었던 마리코가 등장해 시리즈로서의 매력도 놓치지 않는다. 판타지적인 배경에 호러와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적절히 섞여 들어간 이 시리즈는 가볍게 읽히지만, 따뜻한 여운을 남겨주는 힐링 드라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담은 핵심 메시지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 도망쳐!"라고 말한다. 각자가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대할 때 '도피'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 지금 일상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면, 이 작품을 통해 잠시나마 쉬어 가는 시간을 가져보길,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는 뜻이다. 오싹한 힐링이 필요한 당신에게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배명은 지음 / 고블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남자가 뜻 모를 말로 투덜거렸다. 나는 죽었으나 살았다는 안도감에 울어버렸다. 눈물을 닦으려 팔을 들었는데, 손이 그 자리에 있다. 고개를 들어 하반신을 보니 다리도 제자리에 있었다. 잃어버렸던 내 몸이 다시 생긴 것이다. 

마치 일찍이 죽었으나 오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올해 귀신날도 이렇게 지나가는군,"

그렇게 닭이 세 번째로 울었다.              '1월 16일생' 중에서, p.116


졸업과 동시에 도시로 빠르게 떠났던 '나'는 오랜만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산속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싸락눈은 그친 지 오래지만 숲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날리는 눈이 시야를 가라는 날씨였다. 오래도록 방치되어 담장도 허물어지고, 외양간과 창고 지붕도 주저앉았으며, 장독대도 깨지고 부서져 온전치 못했다. 시간이 좀먹어 무너져버린 것들 사이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에 들어가니, 수척한 얼굴의 동생 다원이 보였다. 통통하고 잡티 하나 없던 뽀얀 얼굴은 살이 빠져 도드라진 광대뼈가 날카로워 보였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애교살이 있던 자리는 검게 그늘졌다. 머리카락은 푸석했고, 별로 좋아 보이는 꼴은 아니었다. 


깜빡 잠이 들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밤이었다. 부엌으로 가보니 다원이가 부산스레 움직이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미역국을 끓이며 사과와 배를 꺼내 담고, 접시에 잔뜩 쌓인 음식들을 보니 영락없이 제사상처럼 보였다. 내일이 생일이라 생일상을 차리는 줄 알았는데, 웬 장난이냐고 동생을 타박하는데, 밖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정월대보름이라 달집을 태우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밖에서 소리만 들려도 화들짝 놀라며 끊임없이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고, 큰아버지는 내일이 귀신날이라 집마다 귀신 쫓는 연기를 태울 것이니 다니기에 좋지 않다며 집에 있으라고 말한다. 그날 새벽, '나'는 낯선 남자를 부엌에서 발견하고 뒤쫓았지만 놓치고, 무서워하는 동생에게 그놈이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두려움을 몰아내진 못한다. 동생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게다가 이상한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신당에서 만난 수상한 남자의 정체는 뭘까. 




동해는 하품을 하고 멍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귀를 간질이는 신호음과 저 멀리 막힌 공간에서 부서지는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습관처럼 커피잔을 들어 미지근해진 커피를 들이켰다. 조금씩 시야에 뭔가가 들어왔다.

좁은 차 안, 차창 너머를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 설핏설핏 보이는 초록색 숲. 똑딱틱톡톡틱탁탁. 규칙적인 소음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쾅쾅! 동해는 갑작스러운 충격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신을 번쩍 차렸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중에서, p.237~238


일본군의 총칼에 사랑하는 외할머니를 잃은 소녀는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마적들로 인해 쑥대밭이 된 상황에 소중한 보따리를 도둑맞는다. 보따리를 찾기 위해 수상한 남자를 쫓아 기차에서 내린다.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와중에 총알이 난무하는 불 켜진 기차와 점점 멀어져 끝도 없는 숲속에 들어서게 된다. 빽빽이 들어찬 자작나무들을 붙들며 조심히 나아갔지만, 사위는 점점 어두워졌고, 눈이 쌓인 숲은 거기가 거기처럼 보인다. 결국 보따리를 되찾지만, 영원히 길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남자는 보따리에 뭐가 들었든 당장 버리라고, 그게 우릴 죽일 거라고 말하지만, 소녀에겐 소중한 것이었다. 주위엔 작고 푸른 빛들이 곳곳에 피어올랐고, 남자는 그것이 죽은 자들의 혼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두 사람은 깊은 숲속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전작들을 통해 신화와 설화 등을 현대적이고 장르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독보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던 배명은 작가의 신작이다.  초기작부터 최근 작까지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일제강점기로 시간 배경을 옮기고, 우리 나라 도깨비인 갓귀와 야강귀가 등장하고, 라푼젤에서 모티프를 얻어 측백나무와 울타리에 둘러싸인 집에서 벌어지는 공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담 너머 어둠의 세계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특히 귀신과 도깨비가 등장하는 토속 호러에 호기심이 많다. '직접적이지 않은 허구의 이야기로 안전한 두려움을 선사하는데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호러를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내면의 깊숙한 정서와 맞닿아 있어 매번 인상깊게 읽어 왔다. 초현실적인 공간과 현실적인 공간을 자유자재로 가로지르며 보여주는 공포가 익숙한 곳마저 낯설게 느껴지게 만들어 주곤 했다. 자, 환상적인 이야기로 지극히 현실적인 공포를 보여주는 배명은표 호러의 세계를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테니스나무
윤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과거의 어느 지점을 자꾸 맴돌다보면, 그 끊임없는 복기가 신비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그 파동이 저 아래 잠들어 있던 심해어들을 깨우고 결국 수면 위로 솟구치게 한다. 뒤늦게 알게 됐다. 40킬로미터를 넘어서면서부터 내가 줄곧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그건 이미 지나쳐버린 한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p.15


생존 용품 회사에서 일하는 미아는 지하철 역사에서 유실물 관리를 하는 인턴 테오와 민원인과 담당자로 처음 만난다. 생존배낭의 부속 하나를 선로에 떨어뜨려 유실물을 찾기 위해 스쳤다가, 지하철 역사를 달리는 하프코스 러닝 대회 ‘라인런’을 진행하기 위한 거래처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된다. 미아가 직접 기획한 생존배낭이 라인런의 기념품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빠듯한 일정 속에서 대회를 준비하며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누군가 내 삶으로 들어오게 되면,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이전과 같을 수 없어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액자 같은 어둠도 놀랍도록 황홀해지고, 테니스코트 바닥에 떨어진 라임색 테스트공들은 새콤한 맛이 나는 싱그러운 열매들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로 등장하는 '홍해파리'라는 존재도 매우 흥미로웠다. 홍해파리는 필요할 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외부 환경이 좋지 않다고 느끼면 성체로 살아가기를 멈추고 다시 유년기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성체 이전의 폴립 형태로 돌아가 아이가 되는, 그러고는 정말 시간을 되돌린 듯 거기서부터 현재를 다시 시작하는 거다. 생물학적으로 불사인 존재가 실제한다니 너무 신기했다. 이거 조금 홍해파리 같은 얘긴데, 이런 홍해파리 같으니라고... 그러면서 오래전 풍경들을 소환하는 것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고명처럼 쓰이곤 했다. 그렇게 시간을 쌓아가며 두 사람은 러닝 대회를 잘 마무리하고, 이제 더 편하게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생존배낭을 메고 잠든 사람이 죽는 변사 사건이 벌어지고, 미아는 그때부터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건의 여파가 번져가면서 두 사람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천국의 끝에서 낭떠러지로 향하게 된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니, 어쩌면 그게 더 슬플까. 나는 어느새 음악을 사랑으로 바꿔 부르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에 들을 음악을 남겨두듯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 사랑의 총량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고, 지금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설령 안다고 해도 나중을 위해 사랑을 남겨둘 수 있나? 사랑은 바라봄과 풍덩 사이의 낙차, 그 힘으로 나아가는 것 아닌가. 나중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모든 것은 현재형의 파도뿐.               p.155


<밤의 여행자들>로 대거상을 수상했던 윤고은 작가의 신작이다. 소설 작품들에선 기발한 상상력을 선보이고, 에세이에서는 일상의 빈틈을 다정하게 보여주었는데, 작가의 최신작들을 읽지 못해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매우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제목인 '테니스나무'라는 설정부터 흥미로웠는데, 실제로 길을 걷다 테니스코트 울타리 너머로 라임빛 열매들이 떨어져 있는 풍경을 목격했고,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공이 바닥에 떨어져 있을까 기대하게 되었다고. 공이 아니라 낙과를 찾는 마음으로 말이다. 마치 제철 과일이라도 된 것처럼. '사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기꺼이 사로잡히고 싶은 마음, 그 추동의 안팎을 살피면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극중 두 사람도 하루치의 움직임을 모두 소진한 테니스코트에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테니스공들을 보며 나무에서 방금 떨어진 싱그러운 열매들같다고 느낀다. 한 입 베어 물면 여기까지 새콤한 맛이 쫙 뻗칠 것 같지 않냐고. 그렇게 두 사람은 테니스코트 옆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테니스나무로 지정해버린다. 


찬란한 시간은 왜 순식간에 과거형이 되는 걸까. 오직 그 시절에만 포착할 수 있는 빛을 붙잡을 수가 없기에, 문학이 필요한 게 아닐까. 이 작품 속 여자와 남자의 연애 이야기처럼 말이다. 힘들 때 나를 살게 만들었던, 서로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포개었던 사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서로를 모르는 시절로 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삶에 예기치 않은 균열이 생겼을 때, 우리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되돌릴 수도, 멈춰 세울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고은 작가의 신작은 담백하게 흘러가는 짧은 분량의 이야기였지만, 뭔가 사무치는 마음이 잔상처럼 남는 그런 작품이었다. '다정한 서성임으로부터 번져나가는 찬란한 파동'이라는 작품 소개문구처럼, 잔잔하게 휘몰아치는 이야기같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이상한 사로잡힘이 시작되었다가 사그라드는', 슬프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시절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멜볼딘 동물원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3
송섬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떻게 하면 현재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인지 물었을 때 너는 말했지.

"이 순간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해봐. 원망도 후회도, 낙관도 비관도 없이 지금뿐인 거야. 네 마음이 진실로 원하는 것에 지금을 바쳐야 해."

좋은 말이었지만 내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현재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지 않을 수 있어? 어떻게 미래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있는 거야? 그런 건 내게 사치처럼 느껴질 뿐이야.              p.89


수진과 연서가 재회한 것은 곡 16년 만의 일이었다. 수진이 시간강사로 일하는 대학교의 테니스 강좌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서해안의 작은 도시에 위치한 기독교 계통 미션 스쿨인 멜볼딘 여자고등학교를 나왔고, 학교엔 기숙사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오랜 세월이 있었지만, 둘 다 결혼 후 이혼했고, 아이가 없다는 공통점으로 다시 가까워진다. 이제 시간과 돈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나이였기에, 여러 곳을 다니며 단짝처럼 붙어 지낸다. 16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두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한가했고, 시간과 돈도 있었으며, 운전면허와 차도 있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곧 주말 여행이 그들의 일상이 된다. 


어느 날 연서는 "우리 편지를 쓰자"라고 대뜸 제안한다. 서로에게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이는데, 부치지는 않는 거다. 그렇게 서로에게 결코 하지 않을 고백과 지난 날의 추억과 생각의 편린들이 쌓인다. 어린 시절의 기억, 유년기의 에피소드, 기숙사의 소등 시간, 중간고사와 대학 진학에 대한 고민... 그들의 수많은 고백 중에는 말한 적 없지만 들은 적은 있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재회만큼, 연서는 사라져버리고, 10년 뒤 그녀의 딸이 수진을 찾아올 때까지 시간이 흐른다. 연서의 딸 표은은 그들이 서로 부치지 않기로 약속하고 썼던 편지가 담긴 노트를 들고 수진을 찾아온다. 한 사람의 부재에서부터 비롯된 만남은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 되는데... 연서가 사라졌던 이유는 뭘까. 부치지 않은 편지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




"연서를 사랑했느냐고 물었지? 그러고 싶었지만,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인색한 사람이었어. 늘 받기만 할 뿐 돌려줄 수가 없어. 그건 저주에 가까운 일이야. 나의 부족함은 어떤 좋은 사람들을 유인해 사랑으로 착각할 만큼의 온정을 베풀게 해. 그리고 사랑과 온정은 때로 유의어거든. 그래서 난 전부 그만뒀어. 기대하는 것도, 기대하게 하는 것도."

"......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픈 이야기예요."

"맞아. 슬픈 이야기야."                   p.259~260


이야기는 동물원에서 시작해서, 다시 동물원으로 향한다. 동물들이 다 떠난 폐업 중인 동물원과 마치 화성에 있는 것처럼 어딘가 황량한 체코의 작은 도시에 있는 별로 멋지지 않은 동물원. 동물이 없는 동물원도 동물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보내지 않을 편지는 어떻게 쓰는 걸까. 다시 만나기 위해서 헤어져야 하는 관계도 있을까. 우리가 없는 우리는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아름다운 표지에 이끌려 선택한 책이었는데, 담담하면서도 밀도있는 문장들이 참 좋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 속 수진과 연서처럼 학창 시절 친구들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사회 생활을 하면서, 결혼을 하거나 아이가 생기면서... 생활 반경이 달라지고, 관심사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지고, 사이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동창회를 주기적으로 나가거나, 강제성 있는 친구들 모임이 있지 않은 이상 그렇게 서로의 삶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돌아보면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눈가와 입가에 몇개인가의 주름을 얻고, 직장이 달라지고, 집이 바뀌고, 통장 잔고가 조금 불었다가 꺼지는 동안 우리는 나이를 먹어간다. 세상 모든 것들을 공유하고, 닮고 싶었고, 동경했던 친구와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멀어지게 되더라도 하루는 반복되고, 삶은 계속된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며 시종일관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들을, 지금은 멀어진 관계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시간을 거슬러 우리가 존재했던 장면 속으로 함께 걸어가 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
김유진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분노와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복수를 하고 싶지만 세상 한가운데에 엄마의 슬픔을 전시할 수는 없었다. 누가 이곳을 뚜껑으로 잠가 버린 것일까. 산소가 다 빠져나가는 듯 숨이 턱 막혔다. 세계는 단단히 닫혔고 뜨거운 열기만 가득했다. 엄마에게 건네려던 그 꿈과 희망은 커다란 폭죽처럼 산산이 부서져 점점이 흩어졌다. 다 타 버린 잔재물만이 허공을 떠다녔다. 엄마는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우리에게 허락된 마지막 촛불도 훅 꺼져 버렸다.            p.214~215


브레인 임상연구센터의 레지던트 4년 차 김수오는 과거 기억을 잃은 엄마와 단둘이 살아왔다. 엄마는 수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는 점을 답답해했고, 기억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기억 회복술은 비용이 비쌌고, 후원을 받을 수 있는 대기순번에서도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엄마는 선발되지 않았고, 앵커 로봇도 곧 업데이트될 거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마침 수오의 팀 교수 세 명이 다음 주 해외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열흘간 자리를 비울 참이었다. 브레인 연구센터는 다른 팀과 달리 독립적으로 움직였으니, 흔치 않은 기회였다. 기록만 잘 지운다면 은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수오는 동료인 신진서에게 도움을 부탁하고, 교수들 몰래 수술을 하기로 한다.


그렇게 수오는 엄마에게 기억 회복술을 집도하는데, 그 과정에서 엄마가 뇌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엄마는 되찾은 기억으로 인해 오히려 힘들어 하는데, 수오는 자신이 되살린 것이 참혹한 진실과 엄마의 지옥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텅 빈 기억이 엄마를 지켜 주는 가장 안전한 보호막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다. 엄마는 수술 이후 외출을 꺼렸고, 한여름인데도 긴팔과 긴바지를 고수했다. 그날 수술실 앞에서 멈췄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지금보다 덜 고통스러웠을까. 결국 수오는 엄마를 위해 암암리에 기억 제거술을 시술해 주는 의사 주경재를 찾는데, 기억을 지우는 의사와 되살리는 의사가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죽은 사람은 이제 그만 놔주시죠.”

여러 생각들로 번잡했던 머릿속이 주경재의 침과 함께 고요해졌다. 나는 순식간에 주경재에게 압도되었다. 그간 영상으로만 보던 아득한 거리감이 걷히자 전율이 솟구쳤다. 그의 손에 들린 침은 지휘자의 지휘봉이었다. 자신만의 음악적 해석과 독특한 리듬, 남다른 호흡과 신들린 손놀림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거장처럼 그는 이 수술방을 꽉 차게 만들었다. 놀랍도록 충격적인 장면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06


네스트 신경외과의 주경재는 스스로를 '뇌를 디자인하는 화가'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도려내고 새로운 기억을 채워 주는 일이 자신의 업이기에, 그것이 신의 계시처럼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능력이라고 믿었다. 정계나 재계의 거물들, 시대를 선도하는 연예인이나 명망 있는 예술가들이 병원을 찾아와 기억 제거술을 받았고, 주경재는 그들에게 기억 삽입술을 함께 권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삭제하고, 뇌의 특정 역역에 기억이나 지식을 넣는 시술은 가벼운 수술이었다. 그는 환자들의 기억들을 모아 따로 보관했고, 자신의 전리품으로 여겼다. 이야기는 김수오와 주경재의 시선으로 교차 진행된다. 기억 손질에 대한 상반된 의술을 행하며 평행선처럼 살아가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느 시점에서 교차되면서 완벽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작품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기억 회복술'과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우는 '기억 제거술'이 가능한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 피부과에서 보톡스 한 방 맞는 것처럼 병원에 들러 기억을 환기하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면 말이다. 사기나 불륜의 기억을 지우고, 뺑소니 범죄, 학교 폭력 피해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좋아하는 연예인을 가까이서 본다거나 관광 명소를 다녀온 기분 좋은 추억을 심어 주는 것이 가능하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내가 이제껏 가지고 있던 기억이 누군가가 함부로 자르고 붙인 가짜 기억이었다면 어떨까. 기억의 복원과 삭제는 꼭 필요한 것일까. 법의 테두리 밖에서 악용된다면 그걸 어떻게 막아야 하는 걸까. 이 작품은 제13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의 최우수상 수상작이다. SF적인 세계관부터 캐릭터, 플롯, 반전까지 탄탄하게 잘 쓰인 작품이다. 도파민 터지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으로 영화로 만들어져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