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
김유진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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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분노와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복수를 하고 싶지만 세상 한가운데에 엄마의 슬픔을 전시할 수는 없었다. 누가 이곳을 뚜껑으로 잠가 버린 것일까. 산소가 다 빠져나가는 듯 숨이 턱 막혔다. 세계는 단단히 닫혔고 뜨거운 열기만 가득했다. 엄마에게 건네려던 그 꿈과 희망은 커다란 폭죽처럼 산산이 부서져 점점이 흩어졌다. 다 타 버린 잔재물만이 허공을 떠다녔다. 엄마는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우리에게 허락된 마지막 촛불도 훅 꺼져 버렸다.            p.214~215


브레인 임상연구센터의 레지던트 4년 차 김수오는 과거 기억을 잃은 엄마와 단둘이 살아왔다. 엄마는 수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는 점을 답답해했고, 기억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기억 회복술은 비용이 비쌌고, 후원을 받을 수 있는 대기순번에서도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엄마는 선발되지 않았고, 앵커 로봇도 곧 업데이트될 거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마침 수오의 팀 교수 세 명이 다음 주 해외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열흘간 자리를 비울 참이었다. 브레인 연구센터는 다른 팀과 달리 독립적으로 움직였으니, 흔치 않은 기회였다. 기록만 잘 지운다면 은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수오는 동료인 신진서에게 도움을 부탁하고, 교수들 몰래 수술을 하기로 한다.


그렇게 수오는 엄마에게 기억 회복술을 집도하는데, 그 과정에서 엄마가 뇌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엄마는 되찾은 기억으로 인해 오히려 힘들어 하는데, 수오는 자신이 되살린 것이 참혹한 진실과 엄마의 지옥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텅 빈 기억이 엄마를 지켜 주는 가장 안전한 보호막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다. 엄마는 수술 이후 외출을 꺼렸고, 한여름인데도 긴팔과 긴바지를 고수했다. 그날 수술실 앞에서 멈췄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지금보다 덜 고통스러웠을까. 결국 수오는 엄마를 위해 암암리에 기억 제거술을 시술해 주는 의사 주경재를 찾는데, 기억을 지우는 의사와 되살리는 의사가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죽은 사람은 이제 그만 놔주시죠.”

여러 생각들로 번잡했던 머릿속이 주경재의 침과 함께 고요해졌다. 나는 순식간에 주경재에게 압도되었다. 그간 영상으로만 보던 아득한 거리감이 걷히자 전율이 솟구쳤다. 그의 손에 들린 침은 지휘자의 지휘봉이었다. 자신만의 음악적 해석과 독특한 리듬, 남다른 호흡과 신들린 손놀림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거장처럼 그는 이 수술방을 꽉 차게 만들었다. 놀랍도록 충격적인 장면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06


네스트 신경외과의 주경재는 스스로를 '뇌를 디자인하는 화가'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도려내고 새로운 기억을 채워 주는 일이 자신의 업이기에, 그것이 신의 계시처럼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능력이라고 믿었다. 정계나 재계의 거물들, 시대를 선도하는 연예인이나 명망 있는 예술가들이 병원을 찾아와 기억 제거술을 받았고, 주경재는 그들에게 기억 삽입술을 함께 권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삭제하고, 뇌의 특정 역역에 기억이나 지식을 넣는 시술은 가벼운 수술이었다. 그는 환자들의 기억들을 모아 따로 보관했고, 자신의 전리품으로 여겼다. 이야기는 김수오와 주경재의 시선으로 교차 진행된다. 기억 손질에 대한 상반된 의술을 행하며 평행선처럼 살아가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느 시점에서 교차되면서 완벽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작품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기억 회복술'과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우는 '기억 제거술'이 가능한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 피부과에서 보톡스 한 방 맞는 것처럼 병원에 들러 기억을 환기하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면 말이다. 사기나 불륜의 기억을 지우고, 뺑소니 범죄, 학교 폭력 피해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좋아하는 연예인을 가까이서 본다거나 관광 명소를 다녀온 기분 좋은 추억을 심어 주는 것이 가능하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내가 이제껏 가지고 있던 기억이 누군가가 함부로 자르고 붙인 가짜 기억이었다면 어떨까. 기억의 복원과 삭제는 꼭 필요한 것일까. 법의 테두리 밖에서 악용된다면 그걸 어떻게 막아야 하는 걸까. 이 작품은 제13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의 최우수상 수상작이다. SF적인 세계관부터 캐릭터, 플롯, 반전까지 탄탄하게 잘 쓰인 작품이다. 도파민 터지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으로 영화로 만들어져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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