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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나무
윤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과거의 어느 지점을 자꾸 맴돌다보면, 그 끊임없는 복기가 신비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그 파동이 저 아래 잠들어 있던 심해어들을 깨우고 결국 수면 위로 솟구치게 한다. 뒤늦게 알게 됐다. 40킬로미터를 넘어서면서부터 내가 줄곧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그건 이미 지나쳐버린 한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p.15
생존 용품 회사에서 일하는 미아는 지하철 역사에서 유실물 관리를 하는 인턴 테오와 민원인과 담당자로 처음 만난다. 생존배낭의 부속 하나를 선로에 떨어뜨려 유실물을 찾기 위해 스쳤다가, 지하철 역사를 달리는 하프코스 러닝 대회 ‘라인런’을 진행하기 위한 거래처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된다. 미아가 직접 기획한 생존배낭이 라인런의 기념품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빠듯한 일정 속에서 대회를 준비하며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누군가 내 삶으로 들어오게 되면,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이전과 같을 수 없어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액자 같은 어둠도 놀랍도록 황홀해지고, 테니스코트 바닥에 떨어진 라임색 테스트공들은 새콤한 맛이 나는 싱그러운 열매들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로 등장하는 '홍해파리'라는 존재도 매우 흥미로웠다. 홍해파리는 필요할 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외부 환경이 좋지 않다고 느끼면 성체로 살아가기를 멈추고 다시 유년기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성체 이전의 폴립 형태로 돌아가 아이가 되는, 그러고는 정말 시간을 되돌린 듯 거기서부터 현재를 다시 시작하는 거다. 생물학적으로 불사인 존재가 실제한다니 너무 신기했다. 이거 조금 홍해파리 같은 얘긴데, 이런 홍해파리 같으니라고... 그러면서 오래전 풍경들을 소환하는 것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고명처럼 쓰이곤 했다. 그렇게 시간을 쌓아가며 두 사람은 러닝 대회를 잘 마무리하고, 이제 더 편하게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생존배낭을 메고 잠든 사람이 죽는 변사 사건이 벌어지고, 미아는 그때부터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건의 여파가 번져가면서 두 사람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천국의 끝에서 낭떠러지로 향하게 된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니, 어쩌면 그게 더 슬플까. 나는 어느새 음악을 사랑으로 바꿔 부르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에 들을 음악을 남겨두듯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 사랑의 총량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고, 지금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설령 안다고 해도 나중을 위해 사랑을 남겨둘 수 있나? 사랑은 바라봄과 풍덩 사이의 낙차, 그 힘으로 나아가는 것 아닌가. 나중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모든 것은 현재형의 파도뿐. p.155
<밤의 여행자들>로 대거상을 수상했던 윤고은 작가의 신작이다. 소설 작품들에선 기발한 상상력을 선보이고, 에세이에서는 일상의 빈틈을 다정하게 보여주었는데, 작가의 최신작들을 읽지 못해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매우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제목인 '테니스나무'라는 설정부터 흥미로웠는데, 실제로 길을 걷다 테니스코트 울타리 너머로 라임빛 열매들이 떨어져 있는 풍경을 목격했고,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공이 바닥에 떨어져 있을까 기대하게 되었다고. 공이 아니라 낙과를 찾는 마음으로 말이다. 마치 제철 과일이라도 된 것처럼. '사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기꺼이 사로잡히고 싶은 마음, 그 추동의 안팎을 살피면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극중 두 사람도 하루치의 움직임을 모두 소진한 테니스코트에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테니스공들을 보며 나무에서 방금 떨어진 싱그러운 열매들같다고 느낀다. 한 입 베어 물면 여기까지 새콤한 맛이 쫙 뻗칠 것 같지 않냐고. 그렇게 두 사람은 테니스코트 옆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테니스나무로 지정해버린다.
찬란한 시간은 왜 순식간에 과거형이 되는 걸까. 오직 그 시절에만 포착할 수 있는 빛을 붙잡을 수가 없기에, 문학이 필요한 게 아닐까. 이 작품 속 여자와 남자의 연애 이야기처럼 말이다. 힘들 때 나를 살게 만들었던, 서로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포개었던 사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서로를 모르는 시절로 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삶에 예기치 않은 균열이 생겼을 때, 우리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되돌릴 수도, 멈춰 세울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고은 작가의 신작은 담백하게 흘러가는 짧은 분량의 이야기였지만, 뭔가 사무치는 마음이 잔상처럼 남는 그런 작품이었다. '다정한 서성임으로부터 번져나가는 찬란한 파동'이라는 작품 소개문구처럼, 잔잔하게 휘몰아치는 이야기같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이상한 사로잡힘이 시작되었다가 사그라드는', 슬프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시절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