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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볼딘 동물원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3
송섬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떻게 하면 현재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인지 물었을 때 너는 말했지.
"이 순간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해봐. 원망도 후회도, 낙관도 비관도 없이 지금뿐인 거야. 네 마음이 진실로 원하는 것에 지금을 바쳐야 해."
좋은 말이었지만 내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현재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지 않을 수 있어? 어떻게 미래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있는 거야? 그런 건 내게 사치처럼 느껴질 뿐이야. p.89
수진과 연서가 재회한 것은 곡 16년 만의 일이었다. 수진이 시간강사로 일하는 대학교의 테니스 강좌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서해안의 작은 도시에 위치한 기독교 계통 미션 스쿨인 멜볼딘 여자고등학교를 나왔고, 학교엔 기숙사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오랜 세월이 있었지만, 둘 다 결혼 후 이혼했고, 아이가 없다는 공통점으로 다시 가까워진다. 이제 시간과 돈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나이였기에, 여러 곳을 다니며 단짝처럼 붙어 지낸다. 16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두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한가했고, 시간과 돈도 있었으며, 운전면허와 차도 있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곧 주말 여행이 그들의 일상이 된다.
어느 날 연서는 "우리 편지를 쓰자"라고 대뜸 제안한다. 서로에게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이는데, 부치지는 않는 거다. 그렇게 서로에게 결코 하지 않을 고백과 지난 날의 추억과 생각의 편린들이 쌓인다. 어린 시절의 기억, 유년기의 에피소드, 기숙사의 소등 시간, 중간고사와 대학 진학에 대한 고민... 그들의 수많은 고백 중에는 말한 적 없지만 들은 적은 있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재회만큼, 연서는 사라져버리고, 10년 뒤 그녀의 딸이 수진을 찾아올 때까지 시간이 흐른다. 연서의 딸 표은은 그들이 서로 부치지 않기로 약속하고 썼던 편지가 담긴 노트를 들고 수진을 찾아온다. 한 사람의 부재에서부터 비롯된 만남은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 되는데... 연서가 사라졌던 이유는 뭘까. 부치지 않은 편지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

"연서를 사랑했느냐고 물었지? 그러고 싶었지만,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인색한 사람이었어. 늘 받기만 할 뿐 돌려줄 수가 없어. 그건 저주에 가까운 일이야. 나의 부족함은 어떤 좋은 사람들을 유인해 사랑으로 착각할 만큼의 온정을 베풀게 해. 그리고 사랑과 온정은 때로 유의어거든. 그래서 난 전부 그만뒀어. 기대하는 것도, 기대하게 하는 것도."
"......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픈 이야기예요."
"맞아. 슬픈 이야기야." p.259~260
이야기는 동물원에서 시작해서, 다시 동물원으로 향한다. 동물들이 다 떠난 폐업 중인 동물원과 마치 화성에 있는 것처럼 어딘가 황량한 체코의 작은 도시에 있는 별로 멋지지 않은 동물원. 동물이 없는 동물원도 동물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보내지 않을 편지는 어떻게 쓰는 걸까. 다시 만나기 위해서 헤어져야 하는 관계도 있을까. 우리가 없는 우리는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아름다운 표지에 이끌려 선택한 책이었는데, 담담하면서도 밀도있는 문장들이 참 좋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 속 수진과 연서처럼 학창 시절 친구들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사회 생활을 하면서, 결혼을 하거나 아이가 생기면서... 생활 반경이 달라지고, 관심사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지고, 사이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동창회를 주기적으로 나가거나, 강제성 있는 친구들 모임이 있지 않은 이상 그렇게 서로의 삶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돌아보면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눈가와 입가에 몇개인가의 주름을 얻고, 직장이 달라지고, 집이 바뀌고, 통장 잔고가 조금 불었다가 꺼지는 동안 우리는 나이를 먹어간다. 세상 모든 것들을 공유하고, 닮고 싶었고, 동경했던 친구와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멀어지게 되더라도 하루는 반복되고, 삶은 계속된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며 시종일관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들을, 지금은 멀어진 관계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시간을 거슬러 우리가 존재했던 장면 속으로 함께 걸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