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을 잇는 바다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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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가야 쇼이치.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사람. 암석과 잔해로 가득 찬 빈집을 덜렁 남기고 사라진 무책임한 수집가. 그런 그에게 이제 살이 붙고 피가 흐른다. 그는 틀림없이 이곳에 살아 있었다. 자신도 피폭되어, 고독 속에서 남은 생명을 수집을 위해 남김없이 바치며 조용히 죽어 갔다.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지만, 한 사람쯤은 그의 인생을 끝까지 지켜봐도 괜찮지 않을까.                 - '기도의 파편' 중에서, p.189


대학에서 조교로 일하는 아유미는 지질 조사와 암석 연구를 위해 매년 두 번씩 미시마 섬을 찾는다. 학과 일 때문에 자신의 연구를 할 시간이 전혀 없어, 방학 때만 일주일 정도 머물고 있다. 암석과 연애한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연구에 대한 나름의 신념이 있지만, 밖에서 보기엔 성실한데 융통성이 없는 괴팍한 사람으로 치부될 뿐이다. 미시마는 화산섬으로 섬 전체가 두꺼운 용암과 화산분 출몰로 이루어져 있다. 곳곳에 암석 표면의 거칠 갈색과 그 위를 덮은 초록, 그 너머 바다의 군청이 아름답게 대비를 이루며 독특한 경관을 빚어내는 곳이다. 


일주일간 이곳에서 조사를 하며 아유미는 외부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를 자꾸만 마주친다. 오래전 사라진 흙을 찾기 위해 섬에 왔다는 남자는 시시껄렁한 태도에 신원도 불분명했지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어쩌다보니 함께 붉은 점토의 흔적을 찾아 섬을 다니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서로의 신념을 이해하게 된다. 아유미는 조교가 된 뒤 정부에서 주는 과학 연구비 지원금을 한 번도 따낸 적이 없다. 젊은 연구자들을 위한 소액 지원금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 연구비를 따내는지가 연구자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임에도, 아유미는 학계에 어필할 수 있는, 시류에 맞는 연구를 할 생각이 없었다. 빠른 시일 내에 커다란 발견을 하지는 못해도 혼자 답사를 거듭하며 조금씩 작은 사실들을 쌓아나가는 연구 방식이 좋았던 것이다.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 자신이 하는 연구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건 아닐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도자기를 빚는 남자를 통해 자신의 연구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그때 새끼 거북을 집에 데려갔는지. 왜 지금 또 알을 훔쳐 와 부화시키려는 건지. 히메가우라 바다거북을 보호하려는 게 아니다. 거북 수를 늘리려는 것도 아니다. 내 새끼 거북을 내 손으로 바다에 내보내고 싶을 뿐이다.

그럼 그 새끼 거북이 나 대신 히메가우라를 떠날 테니까.

구로시오해류를 타고 끝없이 넓은 바다로.

상상할 수도 없이 머나먼 세계로.             -'파랑을 잇는 바다' 중에서, p.328


제172회 나오키상 수상작이자 <달까지 3킬로미터>, <8월의 은빛 눈>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는 이요하라 신의 작품이다. 이요하라 신은 지구행성물리학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과학자의 시선으로 여러 작품을 써왔다. 전작들을 읽으며 문학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과학의 목소리를 너무도 아름답게 풀어내 감탄했던 기억이 있어 이번 신작도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다섯 편의 작품에는 무시해도 그만일지 모르는 가치 하나를 지키기 위해 신념을 세우고, 타인을 위해 위험을 떠안거나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켜주고자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소멸해가는 바닷가 마을에서 몰래 거북을 돌보는 소녀, 오래전 은둔 과학자가 살던 폐가를 조사하는 공무원, 사회생활에 실패하고 산골에서 생활을 하다 늑대를 만나게 되는 남자 등 다섯 편의 작품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요하라 신은 매번 인간의 삶에 대한 비유를 과학적 상상력으로 풀어내기 때문에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연구를 하고 생계와 무관한 일에 오랜 세월 몰두할 수 있는 우직한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준 시간이었다. 과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이요하라 신의 소설들은 특별하다. 이야기마다 과학적인 지식과 정보들이 배경에 깔려 있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녹아 들어가 있어 전혀 어렵거나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오히려 서정적인 느낌마저 든다. 다섯 편의 작품들을 읽으며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붙드는 끈질긴 마음과 자연의 순환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긴 여운처럼 남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세계로 떠나고 싶게 하는' 이 다정한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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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의 우주 - 당신의 집은 어디입니까?
최준석 지음 / 아트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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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에게 집은 뭘까요? 누군가에게는 지친 육체를 쉬게 하는 단순한 숙소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나와 함께 가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도 합니다. 집을 유기체로 느끼는 누군가에게는 복도 한구석에 놓인 오래된 의자가, 또는 비 오는 날 처마 밑 작은 테라스에 앉아 듣는 빗소리가 그런 요소가 될 수 있겠지요.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 각자 ‘나만의 규칙’으로 집 곳곳에 채워질 때 의미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p.37


언젠가부터 집은 더이상 삶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잘 사고 잘 팔아야 하는 상품이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는지보다 어떤 차를 타고, 어떤 지역에 몇 평짜리 집을 갖고 있느냐에 모든 관심이 귀결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획일화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고유함을 찾겠다는 의지로 '나만의 집'을 짓는다. 아파트가 가치의 총합이 되어 신분과 계급이 되는 사회에서 단독주택을 짓겠다는 말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한 개인의 독립 선언이자 사회적 저항의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은 십수 년간 ‘나만의 집’을 꿈꾸는 건축주들을 만나 단독주택을 설계해온 건축가 최준석이 여덟 채의 집을 짓는 과정에서 마주한 고민과 생각을 담고 있다. 집 짓는 일을 '과거의 성찰'이자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설계 도면을 두고 빈 종이를 채워나가는 모든 과정을 통해 집을 물리적 공간을 넘어 각각 개인의 삶으로 완성시켜 나간다. 누군가에게는 지친 육체를 쉬게 하는 단순한 숙소에 불과한 것이, 또 누군가에게는 나와 함께 가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도 한 것이다. 거실은 꼭 필요한 것인가, 집 어딘가에 혼자 숨어 들어갈 공간이 작게라도 있다면 자연스럽게 나 자신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투영하는 반사체라는 생각이 든다... 등 저자의 말이 와 닿는 부분이 많아 공감하며 읽었다. 각종 건축 용어들이 등장하고, 전문적인 설계와 구도 등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이어지지만, 에세이처럼 편하게 풀어쓴 글이라 가독성도 참 좋았다. 




완공된 순간부터 집은 늙기 시작합니다. 벽에 붙어 있는 재료는 비바람에 삭고, 색은 바래며, 문짝은 삐걱거립니다. 하지만 집이 나이든다는 건 외형적 퇴색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집이 나이들수록 그 집에 살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가고 집에는 한 가족이 그곳에서 보낸 역사가 쌓여갑니다. 벽지의 낙서와 문틀에 새겨진 키재기 눈금들은 집이 거쳐온 시간을 웅변합니다... 낡은 것은 낡은 대로, 필요한 것은 새롭게 덧붙여 그 둘을 공존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오래된 일기장의 찢어진 페이지를 테이프로 조심스럽게 붙이고, 그 뒷장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p.189~190


우리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집안으로 관통하는 빛과 풍경, 창문 틈으로 새어드는 계절의 소리, 일상의 사소한 잔향 들이 우리 내면의 확대경 아래 놓이고, 우리는 집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연습한다. 바깥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격리된 공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 타인의 시선에 쪼그라들었던 본연의 모습을 다시 일으키고 마주할 수 있는 공간... 건축가가 쓴 책을 꽤 읽어본 편인데, 이 책의 저자는 정말 글을 잘 쓰는 작가처럼 느껴졌다. 좋은 집이란 무엇인지,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매 순간 고민하고, 사유한 결과물이 페이지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집에 개성을 부요하는 요소는 거주자의 취향과 건축가의 의도라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건축가라면 언젠가 집을 짓게 될 때 꼭 의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외부의 시선은 막고, 내부의 시선은 열고... 감춘 듯 보여주고, 보여준다면 멋지게 보이고 싶고, 외부에서 집 안이 보이는 건 싫지만 집 안에서는 바깥이 잘 보이는 집, 이런 집이 가능할까 싶지만 대부분의 단독주택 의뢰인이 원하는 집이 이런 집이라는 대목에서 사람 마음이란 원래 다 그런 거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그런 마음들을 이해하고, 거주자의 눈높이에서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가의 시선도 감동적이었고 말이다. 저자가 건축주와 함께 만들어온 여덟 채의 집을 통해 좋은 집, 그리고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그려보며, 쓸데없는 몽상과 쓸모 있는 고민 사이에서 무수한 선택을 하는 것이기에 결국 인생을 짓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만의 집, 나의 우주를 상상해 보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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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드렁크 픽션 ㅣ 위픽
서장원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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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럼 작가님은, 소설에서 마음에 안 드는 캐릭터는 삭제시키나요?"

나는 뜻밖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지만 곧 그렇지 않다고, 내 소설에서 누가 죽거나 사라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렇게 안 하려고 해요. 제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다 제가 만든 건데요, 뭐."              p.36


서울에서 조그만 광고 회사를 다니던 소설가 정원은 소설에 집중할 시간을 가져보기 위해 아내와 함께 진주로 내려왔다. 문학지원사업으로 이용료를 면제받아 공유 오피스를 드나들며 글을 쓰려고 했지만, 소설은 쓰지 못하고 커피만 축내며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원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이 너무 심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잘한 갈등과 마찰에, 편견과 소외가 드러나는 순간들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세계의 부조리를 납득하지 못하는 인물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번번이 가로막혀 한글창을 닫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는 격투기 체육관에서 코치로 일하는 격투기 선수 조성을 만나게 된다. 그를 통해 종합격투기 경기를 보며 정원은 자신에게 필요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강인해 보이는 조성과 그가 속한 격투기 세계가 자신의 소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거라는 기대를 품는다. 하지만 종합격투기 세계는 비열한 반칙과 폭력, 혐오가 난무하는 세계였다. 퀴어 혐오, 여성 혐오를 비롯해서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며 상대방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약하다고 비아냥대는 것도 일상이었다. 혐오로 점철된 각종 영상과 댓글들을 보며 정원은 '개소리하는 사람들만 걸리는 역병이 돌았으면 좋겠어.'라고 아내에게 말할 정도로 그들을 경멸한다. 




"그럼 이 소설은 뭔데요?"

"이건, 펀치 드렁크 증후군을 가진 사람이 주인공이에요. 펀치 드렁크 증후군 때문에 자기한테 초능력이 있다고 믿는 전직 격투기 선수요. 주인공은 자기가 물건이든 생명체든 손에 잡히는 건 전부 다 감쪽같이 없애버릴 수 있다고 믿어요."

조성 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그냥, 그렇게 믿으면서 사는 거죠."             p.70


조성은 스파링하다 머리를 다쳐 구급차레 실려 가고, 며칠 뒤 그의 문병을 간 정원은 체육관에 반칙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뒷머리를 때리면 반칙이었는데, 조성이 그에게 뒷머리를 좀 심하게 맞아 후두엽에 미세 출혈이 생긴 것이다. 그의 문병을 가서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을 혐오하고 조롱하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어떻게 20년 넘게 머물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조성은 퇴원 후 반칙왕과의 시합에 정원을 심판으로 부르고, 일요일 오후의 고요한 체육관에서 시합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정원은 경기 중에 반칙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조성 씨가 바닥에 깔린 채로 반칙왕을 껴안고, 단 몇 초 만에 반칙왕의 모습이 잠깐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단 한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어 판형이 작고 가볍지만, 양장본이라 튼튼하고 색감이 예뻐 소장용으로 너무 멋진 '위픽 시리즈' 신작이다. 구병모 작가의 <파쇄>를 시작으로 그 동안 무려 백 편이 넘는 작품들이 위픽 시리즈로 나왔다. 나도 꽤 많이 읽어 왔는데, 디자인도 예쁜데다 골라 읽는 재미가 있어 너무 좋아하는 시리즈이다. 이번 신작은 서장원 작가의 <펀치 드렁크 픽션>으로 인간은 선인 혹은 악인으로 쉽게 나눌 수 없는 입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자 같다’ ‘게이 같다’는 말이 상대를 조롱하는 관용어로 쓰이는 종합격투기 세계에서 조성은 어떻게 커밍아웃하지 않은 성소수자로 살아온 것일까. 자신의 정체성을 혐오하고, 그 혐오감을 마음껏 과시하는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오랜 시간 버텨온 것일까. 그런 시간들이 쌓여 '어떤 사람들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만약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을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떨까. 하지만 나쁜 것을 판단하고 벌을 주는 판단은 어떤 기준으로 내려야 하는 것일까. 짧은 분량임에도 긴 여운이 남는 이야기였다. 자,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 위픽과 함께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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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 리버 - 인류 문명을 만든 일곱 개의 강 이야기
버네사 테일러 지음, 박은영 옮김 / 미래의창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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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강과 자연을 문화적으로 어머니 같은 존재로 여겨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생태계와 생물 다양성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강은 그 자체로 매우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도 위에 그어진 경계선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강은 서로 다른 인식과 주장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p.232


강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었다. 식수를 제공하고, 항로와 교역의 길을 열어주었다. 또한 권력과 부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혀 있었다. 누가 수로와 운하, 강 하구의 군선들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결정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강은 문명을 잉태하고, 제국을 키우며,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왔다. 또한 강은 신성한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고고학자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강이나 샘, 습지 같은 장소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잇는 영적인 경계로 여겨졌다고 분석한다. 


이 책은 세계를 바꾼 일곱 개의 강을 따라 인류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나일강, 다뉴브강, 갠지스강, 템스강, 미시시피강, 니제르강, 양쯔강이다. 세계사를 연대기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강을 통해서 읽어 내는 거라 굉장히 색다른 역사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일곱 개의 강을 일곱 개의 파트로 구분했고, 각 장이 시작하기 전에 지도 수록되어 있어 위치부터 확인해볼 수 있도록 했다. 강과 유역들을 둘러싼 각기 다른 서사들이 펼쳐지는데, 각각의 강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이 달라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지질학적 기원에서부터 시작하는 강도 있고, 인간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차지한 위치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 강도 있다. 강의 이름에 얽힌 비밀과 그 속에 층층히 쌓인 언어의 역사를 파헤치기도 하고, 인간의 시간을 잇는 기후변화의 현장으로, 매끄러운 교통로이자 생기 넘치는 생태계로 살펴보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강이 우리 삶에서 맡는 역할도 달라졌다. 강은 물건을 나르는 핵심 통로였지만, 이제는 다른 수단들이 그 자리를 채우거나 보완하고 있다. 19세기에 지어진 다뉴브강 계속 철도부터 최근의 라인-마인-다뉴브 운하 그리고 중국의 '21세기 실크로드'라 불리는 일대일로 사업이 대표적이다. 또한 지난 250년 동안 강줄기를 따라 각종 배관(파이프라인)이 설치되면서 강의 기능을 보완하기도 했다.                   p.539


고대 이집트의 나일강을 따라 이어진 30개 왕조는 3,0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통치를 이어갔다. 그 어떤 강 문명도 나일강처럼 수천 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자연을 다스리며 번영을 누리고, 그토록 강력한 존재감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또한 나일강은 수많은 기원과 신화가 피어난 거대한 발원지이자 무대이기도 했다. 강이라는 존재가 그 물줄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목마른 이들에게 물을 내어주고 메마른 땅을 옥토로 바꾸며, 교역로와 군사 수송로가 되어주는 생명의 통로인 동시에 그 자체로 단단한 방어벽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러다 강이 천연의 국경으로 선포되는 순간, 그곳은 순식간에 사투의 현장으로 변모한다. 전 유럽을 가로지르는 2,850킬로비터의 다뉴브강 또한 수많은 세력을 끌어들이며 분쟁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미시시피강은 매우 오래된 강이다. 최소 2억 5,000만 년 전, 지구의 모든 땅덩어리가 하나로 뭉쳐 있던 초대륙 판게아 시절의 지층 흔적 속에서도 지질학자들은 원시 미시시피강이 남긴 흔적을 찾아냈다. 재미있는 것은 지질학적 스케일로는 최고참 격인 미시시피강도 인류사의 관점으로 보면 이 책에 등장하는 일곱 강 중 가장 막내 격이라는 점이다. 아메리카 대륙 그 어디에서도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보다 앞선 인류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은 상상 속에서 집단 기억을 매개하는 거대한 은유이자, 아득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강을 다스리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수없이 변해왔다. 이제는 오늘날 강과 인류가 마주한 현실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미래의 강줄기에 어떤 이야기가 쓰여질지 정해질 테니 말이다. 자, 일곱 개의 강에 담긴 우리 인류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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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지 않아도 괜찮아 물리학 ㅣ 물화생지 문해력 기르기
이승재.오영훈 지음, 오얼수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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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물리학의 진짜 묘미는 바로 이 세상의 어떠한 복잡한 현상도 단순하고 친숙한 현상에 비유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단순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용수철의 조화운동은 사실 수많은 물리 현상과 유사한 수학적 규칙을 따릅니다. 예를 들어 단진자라고 부르는, 쇠구슬을 실에 매달아놓은 장치는 모습이 용수철과는 매우 다르지만 용수철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p.79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아는 물질은 전체의 약 5퍼센트밖에 되지 않고, 우주에 존재하는 것의 대부분을 직접 보지도 못했으며, 정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에게 과학이 필요하다. 현대물리학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95퍼센트는 그만큼 앞으로 우리가 탐험해야 할 영역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물화생지 문해력 기르기' 시리즈로 지구과학에 이어 물리학 편이 나왔다. <외우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제목처럼 암기하는 원리가 아니라,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책이다. 100여 컷의 사이언티픽 일러스트가 컬러로 수록되어 있어서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4대 역학'을 다루고 있다. 고전역학, 전자기학, 양자역학, 열역학, 그리고 현대 우주론까지 담았다.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 뉴턴 역학을 시작으로 전자 기기가 작동하는 원리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전자기학, 오늘날 현대물리학의 두 기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엔트로피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열역학을 살펴본다. 양자역학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다양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던 덕분에 과학책이 관심이 많은 나도 다양한 버전의 양자역학 책들을 읽어 왔다. 그럼에도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았다. 리처드 파인먼도 '양자역학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난해한 학문이니 말이다. 이 책 속에서도 양자역학 파트가 있어 굉장히 기대하며 읽었다. 확실히 친근하고 쉽게 풀어내고 있어 양자역학에 한층 더 가까이 가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한 가지 여운을 남깁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흐릿하고 역동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리학에서 무無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진공에서 가상 입자가 태어나고 소멸하는 가장 역동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이 열려 있는 한, 양자역학은 계속될 것입니다.               p.255


과학의 진짜 매력은 '상상하는 즐거움'에 있다. 위대한 과학적 발견들 또한 끊임없이 고민하고, 상상하며 만들어진 생각에서 출발한 것들이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새삼 그 즐거움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물리학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는 것, 세상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디서 왔는지를 궁금해하며 수많은 사유를 통해 더 나은 이론들을 쌓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물리학은 어렵고 딱딱한 학문이다. 흔히 떠오르는 어려운 수식들 때문일 것이다. 수식은 분명 물리학의 중요한 도구이지만, 이것 또한 결국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물리학의 진짜 재미는 수식 너머에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수학과 친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공식과 원리들을 외우지 않아도 괜찮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속에 담긴 사유를 이해하고 고민하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물리학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리학이 막막하게 느껴졌었다면 암기해야 할 지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물리학을 통해 상상하며 고민하는 즐거움을 되찾게 만들어 준다. 방금 읽은 개념들을 바로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잘 정리된 그림들이 이끌어 주고, 복잡한 과학 원리들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뉴턴, 아인슈타인 등 곳곳에 깨알같이 등장하는 '고양이 과학자' 캐릭터들을 만나는 재미도 집중도를 높여준다. 초중고 교과서 핵심 개념을 바탕으로 최신 데이터까지 모두 담긴 버전이라 청소년들의 문해력에도 도움이 되고, 성인들의 과학 교양서로도 훌륭하다. 읽다 보면 저절로 쌓이는 지식과 교양! 부담없이 물리학을 시작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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