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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드렁크 픽션 ㅣ 위픽
서장원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럼 작가님은, 소설에서 마음에 안 드는 캐릭터는 삭제시키나요?"
나는 뜻밖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지만 곧 그렇지 않다고, 내 소설에서 누가 죽거나 사라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렇게 안 하려고 해요. 제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다 제가 만든 건데요, 뭐." p.36
서울에서 조그만 광고 회사를 다니던 소설가 정원은 소설에 집중할 시간을 가져보기 위해 아내와 함께 진주로 내려왔다. 문학지원사업으로 이용료를 면제받아 공유 오피스를 드나들며 글을 쓰려고 했지만, 소설은 쓰지 못하고 커피만 축내며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원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이 너무 심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잘한 갈등과 마찰에, 편견과 소외가 드러나는 순간들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세계의 부조리를 납득하지 못하는 인물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번번이 가로막혀 한글창을 닫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는 격투기 체육관에서 코치로 일하는 격투기 선수 조성을 만나게 된다. 그를 통해 종합격투기 경기를 보며 정원은 자신에게 필요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강인해 보이는 조성과 그가 속한 격투기 세계가 자신의 소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거라는 기대를 품는다. 하지만 종합격투기 세계는 비열한 반칙과 폭력, 혐오가 난무하는 세계였다. 퀴어 혐오, 여성 혐오를 비롯해서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며 상대방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약하다고 비아냥대는 것도 일상이었다. 혐오로 점철된 각종 영상과 댓글들을 보며 정원은 '개소리하는 사람들만 걸리는 역병이 돌았으면 좋겠어.'라고 아내에게 말할 정도로 그들을 경멸한다.

"그럼 이 소설은 뭔데요?"
"이건, 펀치 드렁크 증후군을 가진 사람이 주인공이에요. 펀치 드렁크 증후군 때문에 자기한테 초능력이 있다고 믿는 전직 격투기 선수요. 주인공은 자기가 물건이든 생명체든 손에 잡히는 건 전부 다 감쪽같이 없애버릴 수 있다고 믿어요."
조성 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그냥, 그렇게 믿으면서 사는 거죠." p.70
조성은 스파링하다 머리를 다쳐 구급차레 실려 가고, 며칠 뒤 그의 문병을 간 정원은 체육관에 반칙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뒷머리를 때리면 반칙이었는데, 조성이 그에게 뒷머리를 좀 심하게 맞아 후두엽에 미세 출혈이 생긴 것이다. 그의 문병을 가서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을 혐오하고 조롱하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어떻게 20년 넘게 머물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조성은 퇴원 후 반칙왕과의 시합에 정원을 심판으로 부르고, 일요일 오후의 고요한 체육관에서 시합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정원은 경기 중에 반칙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조성 씨가 바닥에 깔린 채로 반칙왕을 껴안고, 단 몇 초 만에 반칙왕의 모습이 잠깐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단 한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어 판형이 작고 가볍지만, 양장본이라 튼튼하고 색감이 예뻐 소장용으로 너무 멋진 '위픽 시리즈' 신작이다. 구병모 작가의 <파쇄>를 시작으로 그 동안 무려 백 편이 넘는 작품들이 위픽 시리즈로 나왔다. 나도 꽤 많이 읽어 왔는데, 디자인도 예쁜데다 골라 읽는 재미가 있어 너무 좋아하는 시리즈이다. 이번 신작은 서장원 작가의 <펀치 드렁크 픽션>으로 인간은 선인 혹은 악인으로 쉽게 나눌 수 없는 입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자 같다’ ‘게이 같다’는 말이 상대를 조롱하는 관용어로 쓰이는 종합격투기 세계에서 조성은 어떻게 커밍아웃하지 않은 성소수자로 살아온 것일까. 자신의 정체성을 혐오하고, 그 혐오감을 마음껏 과시하는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오랜 시간 버텨온 것일까. 그런 시간들이 쌓여 '어떤 사람들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만약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을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떨까. 하지만 나쁜 것을 판단하고 벌을 주는 판단은 어떤 기준으로 내려야 하는 것일까. 짧은 분량임에도 긴 여운이 남는 이야기였다. 자,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 위픽과 함께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