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의 세계
마이크 언윈 지음, 류토 미야케 그림, 조은영 옮김 / 시공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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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보라볏투라코는 에스와티니와 남아프리카 북동부 인근 지역에서 상당히 흥한 편이고 북쪽으로는 멀리 동아프리카의 케냐 남부까지 분포한다. 이들은 수줍음이 많은 새로, 상록림과 숲 지대에 자주 나타나고 강가의 숲을 따라 사바나까지 들어간다. 또한 주위에서 풍성하게 열리는 돌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따서 통째로 삼킨다. 눈에 쉽게 띄지 않지만 "꿔, 꿔, 꿔" 하는 크고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이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배경음이다.              p.20~21 


지구 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새들이 있다. 우리가 아는 새라고는 손에 꼽을 만큼이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종 수만 총 1만 1,000종 정도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류 종이 분포하는 10개 나라 중 6개 나라가 남아메리카 대륙 북부에 있고, 그중 1위는 1,950종의 보금자리인 콜롬비아라고 하니 모든 종이 골고루 분포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새들은 사막과 산악지대에서부터 빙원과 외해까지, 지구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지역에도 있지만 가장 많이 서식하는 지역은 단연 열대림이다. 


새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기에 수백 년에 걸쳐 그 어떤 동물 집단보다도 많이 연구되었다. 진화론과 같은 근본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수단이 되었고, 수많은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어 셀 수 없이 많은 음악과 그림과 문학을 낳았다. 이 책은 그렇게 수많은 새들 중 80종의 이야기를 담았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삽화들이 특히나 시선을 사로잡는 덕분에 눈이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국민 새부터 바다를 떠도는 방랑자, 무시무시한 맹금류, 열대의 아름다운 새, 그리고 관심 대상종에서 절멸 위급종까지 희귀한 새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름의 유래부터 생김새, 사는 곳, 둥지를 짓는 방식, 먹이를 사냥하는 전략 등 각각의 새가 살아남기 위해 진화시켜 온 고유한 특성들을 디테일하고 생생하게 그려진 일러스트들과 함께 만나볼 수 있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새를 보고 싶은 탐조가라면 코스타리카의 몬테베르데 운무림 보호 지역이 가장 잘 알려진 장소다. 활동 지역 전체에서 서식지 소실은 위협적이다. 케찰이 번식하려면 둥지에 적합한 그루터기가 있고 교란되지 않은 숲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주 출몰한다고 하는 지역에서도 이 새를 보기란 힘들다. 조용히 앉아 있을 때는 초록색 깃털이 축축한 숲 지붕에서 반짝이는 나뭇잎과 완벽하게 섞이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p.131


화려한 표지만큼이나 페이지를 펼치면 다양한 색감들을 만날 수 있다. 오랫동안 왕족의 지위를 상징하며 받을어진 보라볏투라코의 강렬한 붉은 날개깃, 호수를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꼬마홍학들, 친근한 행동으로 여러 세대 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꼬까울새의 주황빛 가슴, 다정한 지저귐으로 여름의 아이콘이 된 제비의 푸른 빛깔, 긴 에메랄드색 바깥 꼬리 덮개가 인상적인 케찰의 초록빛이 페이지마다 색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다. 넘겨가며 일러스트만 구경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만드는 아름다운 조류 도감이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크 언윈은 새와 야생 동물을 찾아 지구 곳곳을 여행하며 자연사 책을 펴내는 작가이다. 이 책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여행은 물론이고 외출마저 어려웠던 시기에 쓰였다고 한다. 그가 어려서 처음으로 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빅토리아 시대 전시실에서였다고 한다. 지금은 수많은 문학 작품, TV 다큐멘터리, 유튜브 동영상 등 새를 다른 멋진 매체들이 많아 방구석에서도 새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 책도 큰 역할을 해줄 테고 말이다. 마당과 동네 공원, 출근길, 휴가철 바닷가 등 새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던 새들조차 전부 존재감이 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새들이 살아가는 경이로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자연과 맺고 있는 깊은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새들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 공존하는 지구가 되도록 환경을 생각하는 우리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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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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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 내 아들이 성장한 후에도 이 책상이 멀쩡히 보존된다면 아들에게 이것을 물려줄 것이다... 아이가 커 가정을 이룬다면 그 자식에게도 전해지겠지. 

역사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테지. 흠은 파내고 구실은 잘 덮으며.

그리고 언제까지고 내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중에서, p.22


1944년 히로타 마사히로는 <소년 구락부>에서 주간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우등상을 받는다. 결의에 찬 소년의 연설은 군인들의 박수 세례를 받았고, 한 달 뒤, 우등 상품으로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집으로 도착한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1980년, 벚나무 책상은 홍파동의 한 목조주택 서재로 옮겨지게 된다.  그리고 다시 40년이 지나 그 벚나무 책상은 나에게로 온다. 100년을 거스른 물건이라기엔 흠이 파인 곳도, 부식되거나 갈라진 흔적도 없이 멀쩡했기에, 나중에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기도 한 책상이었다. 그 책상을 둘러싸고 쥐의 두부가 무더기로 발견된다든지, 책상에 앉기만 해도 잠이 온다든지 하는 기묘한 일들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책상의 주인들은 대를 이어가며 크고 작은 악행을 벌이지만, 표면상으로 그들은 그 어떤 비난도, 멸시도, 형벌도 받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다. 작가는 말한다. '죄를 덮은 자리에는 꺼슬꺼슬한 흔적이 남는 법'이라고. 과연 그럴까. 


강이 내다보이는 신축 아파트와 증권사에서 일하는 남편, 드레스룸에 가득 찬 옷과 가방. 그녀에게 지금의 삶은 충족을 넘어 벅찼다. 새벽에 배송된 신선식품들로 남편을 위해 500칼로리가 조금 넘는 식단을 준비하는 걸로 시작된 아침 일과부터 늘 일정한 루틴으로 행동하는 남편의 리듬에 맞추어 사는 나날이 5년째 지속되고 있다. 그날은 미술품 수집을 하는 남편을 위해 경매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광고 배너가 눈에 들어온다. 삶이 버거우신가요? 흔한 광고 문구지만, 삶이 버거운 그녀를 홀리기에는 충분했고, 그렇게 '블루소셜클럽'이라는 경매장에 참석하게 된다. 그곳은 타인의 삶으 매수하거나, 자신의 삶을 매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낙찰받으면 그 동안 자신이 쌓아온 명성, 개인정보까지 이전 삶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매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 왜 사람들은 남의 일생을 사려는 걸까. 




삶이 버거우신가요?

흔한 광고 문구지만, 삶이 버거운 그녀의 구미를 동하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녀는 홀린 듯 배너를 클릭한다.

타인의 삶을 매수하세요. 당신의 삶을 매도하세요.

광고 하단엔 상호와 전화번호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게 적혀 있다. 매사 경계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어느 순간에는 판단이 흐려지곤 한다. 그녀에겐 지금이 그러하다.              - '매일' 중에서, p.100~101


아무리 나쁜 짓을 벌여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죄의 흔적이 새겨진 책상이 100년째 후손에게 건너오면서 아무런 흠집조차 없는 것처럼, 그들의 삶도 그렇게 흘러간다. 하얼빈의 비밀 실험실에서는 눈도 귀도 없는 잿빛 덩어리가 태어난다. 바이러스 실험에 동원된 피험자가 낮은 그 생명체는 치댄 밀가루를 얼기설기 뭉쳐놓은 형태에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짐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안드로이드가 등장하고,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복제하고, 기괴한 생명체가 실험실에서 태어나며, 전생을 믿는 기묘한 모임이 있으며, 로봇에게 밀려난 스턴트맨이 쓸쓸한 사투를 벌인다. 완벽한 악인도, 귀신도 없지만, 어쩐지 오싹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이었다. 작가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세 가지 시간의 축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역사와 죄의 흔적에 대해서, 삶을 욕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인간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책에 수록된 아홉 편의 작품에는 작가가 직접 쓴 아홉 편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을 쓰게 된 계기부터 배경과 창작의 과정, 주제에 대한 생각까지 담겨 있어 더 깊이 있게 작품을 이해하도록 해준다. 제목인 '인비인'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사람이 아닌 것, 혹은 사람이어야 마땅하나 사람이기를 스스로 멈춘 존재를 뜻하는 말이다. 작가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위태로운 존재들의 이야기를 '기담'이라는 장르적 형식을 빌려 기묘하고, 서늘하게 그려내고 있다. 강렬한 표지 이미지만큼이나 오싹한 일러스트들이 작품마다 수록되어 있고,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각 부마다 작가가 직접 고른 플레이리스트가 QR코드로 삽입되어 있다. 소설과 음악이 함께 흐르고, 독특한 일러스트들이 작품 속 여운을 깊고도 길게 만들어 준다. 덕분에 이 작품은 읽고, 보고, 듣는 세 가지 감각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무더운 이 계절을 시원하게 만들어줄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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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감촉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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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이 힘들다 해서 그 말이 죽음을 바란다는 뜻은 아니다. 많은 경우 삶의 반대말이 죽음은 아닌 것이다. 경선도 마찬가지였다. 육십오 년이라면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셈이었다. 거기에 무엇을 보탤 수 있을까. 남은 삶에 더 나은 것이 있으리라는 희망. 더 좋은 것을 해보고 싶다는 미련은 그다지 없었다. 지금의 내 삶과 작별하는 일이 엄청나게 아쉬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죽음이 두려웠다. 왜 그럴까. 그 이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일까.              p.64


생의 어떤 순간 불현듯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낯선 도시의 골목 안에서, 가을로 접어든 어느 날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리고 은희경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종종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의 삶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시간의 밀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만난 <시간의 감촉>은 <새의 선물>(1995), <빛의 과거>(2019)를 잇는 은희경 시간 3부작의 완결편이다. 유년기, 청장년기에 이어 이번에는 노년기의 인물들을 그린다.


60대 여성 안나와 경선은 서로에게 무심한 자매이다. 특별히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지만, 일 년 정도는 안 보고 지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사이다. 안나는 예순사다섯 살 생일을 맞이했다. 정년퇴임 이후 서울을 떠나 신도시의 아파트로 이사온 지 일 년이 조금 지났고, 온갖 동원과 참견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요즘이 편하고 좋았다. 가족이 없고 경제활동도 끝났고 빚도 없고 만날 사람도 만들지 않는 안나에게 어떤 삶이 남아 있을까. 경선은 우연히 전남편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된다. 갱년기 클리닉에서 처방받은 여성호르몬 약을 먹고 있으며,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여지껏 큰 병 없이 살아왔는데, 노화로 인해 얻게 되는 자잘한 증상들이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하다.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는 한 만나지 않는 두 사람이 조우하게 된 곳은 뜻밖에 병원이었다. 




밤의 도시 너머 먼 불빛을 바라보며 안나는 생각했다. ‘첫’은 ‘가장 오래된’이다. 안나와 경선의 ‘첫’은 점점 ‘가장 오래된’으로 수렴해간다. 경선의 말처럼 그 모든 게 다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은 매 순간이 ‘첫’이다. 안나와 경선에게도 첫 순간은 수없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경선이 틀렸다. ‘우리의 첫’에 대한 기억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             p.357


안나와 경선은 십일 개월 육 일의 차이를 두고 태어났는데, 연도로만 보면 같은 해였고 둘 다 겨울 출생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만큼 예쁜 아기였던 경선은 나이들어 받는 푸대접을 부당하게 여기는 노인이 되었다. 평범한 외모로 태어나 사람들의 무관심에 익숙했던 안나는 노인이 되어 익명의 존재가 되어가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다. 성격도, 외양도, 살아온 삶도 너무 다른 두 자매는 종양수술을 받게 된 경선을 안나가 간병하게 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병원에서 안나는 생각한다. 만약 경선이 사라진 뒤 자신만 살아남게 된다면 감당해야 할 고독이 어떨지,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기억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두려울지에 대해서 말이다. 경선은 수많은 불면의 밤과 비관주의자가 되곤 하는 아침의 침대에서 수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했지만, 그 순간에 보게 될 사람이 안나라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이제야 비로소 서로를 제대로 마주하게 된 자매의 이야기는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펼쳐진다. 


시간은 우리 몸에 숨길 수도 지울 수도 없는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몸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한때는 그토록 찬란했던 빛이었건만 이제는 덧없이 사라져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이 노년의 나이에 가장 크게 와닿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사랑은 식어 버리고, 남루하고 무정한 일상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고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이를 먹는 일이 아닐까. 작가는 '몸은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고 사랑의 꿈과 왜곡을 간직한 도서관'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그렇게 우리 몸에 남는 시간의 흔적들을 섬세하고, 다정하게 그려내고 있다. '현재가 최근이지만 가장 오래된 날이듯이', 아직 오지 않은 매 순간이 첫 순간이 된다는 설레임으로 앞으로의 시간들을 채워나가야겠다. 그리고 은희경 작가님이 오래 오래 작품을 써주시길 늘 응원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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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단백질 - 탄생, 사랑, 변신, 그리고 죽음을 순환하는 생명의 과학
샤히르 S. 리즈크.매기 M. 핑크 지음, 홍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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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전자는 세포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잠들어 있고, 어떤 유전자는 깨어나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비유하자면 모든 세포는 같은 악보를 가지고 있지만, 각자 자신에게 맞는 악기만 골라 연주한다. 그래서 세포 안의 DNA는 그 세포가 누구의 것인지를 알려주고, 세포가 실제로 만들어내는 단백질은 그 세포가 어떤 세포인지를 알려준다. 각 세포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데, DNA가 대본이라면 단백질은 그 이야기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주인공이다.             p.30


'춤추는 단백질'이라니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다. 화학과 생물학을 다루는 책의 제목치고는 지나치게 밝은 느낌이라, 더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기도 했다. 이 책은 생물학계의 라이징 스타이자 시인이며 화가인 두 저자가 생명이 순환하는 모든 순간을 분자의 언어와 아름다운 그림으로 풀어낸 것이다. 아름다운 표지 이미지를 비롯해 책에 수록된 다양한 삽화들 모두 두 저자의 작품이다. 또한 각 삽화 아래에는 고유 ID가 적혀 있는데, 단백질데이터뱅크에 등록된 고유 코드이므로 PDB 웹사이트에서 코드를 입력하면 단백질 구조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단백질의 세계는 인간의 감각 경험을 훌쩍 뛰어넘는다. 철새가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는 것은 눈 속 단백질 덕분에 지구 자기장을 색깔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개는 인간이 맡지 못하는 냄새 분자를 포착하는 후각 수용체 단백질을 수백만 개 더 가지고 있고, 문어는 피부에 분포된 단백질로 빛을 감지해 순식간에 주변 환경과 똑같은 색과 무늬로 변신한다. 물로기와 개구리가 한겨울 혹독한 추위에도 얼어 죽지 않는 것은 혈액 속 얼음 결정의 성장을 막아주는 단백질이 있기 때문이며, 뱀과 전갈은 단백질로 먹이의 신경과 근육을 순식간에 마비시키는 독을 만들어 낸다. 어떤 단백질은 식물과 박테리아에게 기억하는 능력을 부여하고, 결함 있는 단백질은 질병을 유발하거나 죽음을 초래하는 신호가 되기도 하고,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입하는 첨병이 되기도 한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소를 가졌다는 이유로 우리는 쉽게 뱀과 전갈을 독성 생물이라 부른다. 하지만 단백질 차원에서 보면 우리 인간 역시 살인병기다.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박테리아가 우리의 피부, 침, 호흡기 조직 표면에서 만들어지는 독성 단백질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생존하기 위해 죽어야 하는 세상에서 모든 생명체는 어느 정도 독성을 띠는 존재다. 삶이라는 극장에서 살인은 이야기의 줄거리이고, 단백질은 주연을 맡는다. 결국 막이 내리면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찾아오며, 그 배후에는 어김없이 단백질이 있다.                p.294~295


사실 단백질이라고 하면 보통 음식부터 떠올리게 마련이다. 운동을 할 때, 식단 관리를 할 때, 몸을 만들어야 할 때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하게 되니 말이다. 닭가슴살, 삶은 달걀, 콩, 두부 등 단백질 음식을 일부러 챙겨 먹어본 적이 있는 나로서도 단백질을 식품 성분표 기준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단백질에 대해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DNA가 생명의 설계도라면, 단백질은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다. 세포 안의 아주 작은 일꾼인 단백질은 이 땅에 존재한 모든 생명체들이 거의 모든 생물학적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그 원동력이 되어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단백질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주변 세상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깊이 관여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단백질은 우리 주위에서 매일 작은 기적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간세포 속의 효소는 독소를 무해한 분자로 바꾸고, 디펜신은 감염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며, 빛 수용체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밝혀진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모든 생명체 안에서 단백질은 역동적이고 서로 호응하며 끊임없이 미시 세계의 기적을 행하는 존재들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단순히 과학적으로 놀라운 사실들을 들려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과학과 서사를 근사하게 조화시켜 풀어내는 방식때문이다. 두 저자는 과학자인 동시에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각자의 친구와 가족과의 관계,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경험과 단백질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준 과학자들의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개인적인 서사를 풀어놓는다고 해서 에세이처럼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이야기로 시작해 결국 단백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목적인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우 수월하게 잘 읽히고, 누구나 단백질의 경이로움에 대해서 깨닫게 해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난해한 것을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이 놀라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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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성 책깃클래식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김재용 옮김 / 책깃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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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는 늘 겁에 질리고 위축되고 억눌리고 무시당하는 밸런시였지만, 공상 속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거침없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 스털링 일가와 주변 친척들은 그 사실을 짐작조차 못 했다. 어머니와 스티클스 고모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밸런시의 집이 두 곳, 그러니까 엘름 가에 있는 흉한 붉은 벽돌 상자 같은 집과 스페인에 있는 푸른 성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밸런시는 기억이 미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 푸른 성에서 살았다.                p.11


밸런시 스털링은 내일이면 스물아홉이지만, 어떤 남자의 고백도 받아본 적이 없는 노처녀였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란 남자를 구하는 데 실패한 사람일 뿐이라고 여기는 이웃과 친척들로 가득한 동네에 살고 있기에 밸런시의 일상은 슬프고 외로웠다.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집안에서 밸런시만 유일하게 평범한 소녀였다. 어머니는 딸이 노처녀 신세라고 평생을 매일 같이 창피해했고, 억압적이고 엄격한 대가족 틈에서 밸런시는 숨이 막혔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에게 심장병으로 인한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자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제는 하기 싫은 건 더 이상 하지 않고, 자유롭게,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현실에서는 늘 위축되고 무시당하는 밸런시였지만, 공상 속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거침없이 마음가는 대로 행동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마음속 푸른 성에 있는 밸선시의 방은, 방이라면 갖춰야 할 모든 것이 있는 곳이었다. 현실에서는 제약이 너무 많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기에 눈을 감으면 언제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푸른 성에서만큼은 자유로웠던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반기를 든 밸런시는 마을의 소문난 괴짜 바니에게 청혼을 한다. "저는 오래 살지 못해요. 어쩌면 몇 달.... 몇 주밖에 안 남았을 거예요. 전 그 시간을 제대로 살고 싶어요." 라고 말이다. 바니는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받아준다. "물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사랑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그래도 난 항상 당신이 좀 마음이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들 만의 아름다운 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과연 밸런시의 찬란한 자유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게 해줄까? 




밸런시는 갑자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영혼을 휩쓸고 가는 듯했다.

"푸른 성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오, 나의 푸른 성이에요!"

그들은 카누를 타고 노를 저어 섬으로 향했다. 일상과 익숙한 것들의 영역을 뒤로하고 신비와 마법의 영역에 도착했다.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고...... 무엇이든 진실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바니는 카누에서 밸런시를 들어 올려 어린 소나무 아래 이끼 덮인 바위에 내려놓았다.                    p.229


이 작품은 <빨강머리 앤>으로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국내에서도 엄청난 사랑을 받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작품이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숨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출간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당대의 시선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의 독자들에게 살아 있는 의미와 감동을 전하는 고전문학 시리즈'라는 목적에 정말 잘 맞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여성에게 보수적이었던 당시의 가족 문화와 사회적 규범을 통쾌하게 부수는 여성 캐릭터가 너무도 매력적이고, 몽고메리 특유의 사랑스러운 유머가 고전의 문턱을 낮춰주며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시의성있게 공감대를 만들어 줄테니 말이다. 


이번에 책깃의 고전문학 시리즈 ‘책깃클래식'이 새롭게 출간되면서, ‘여름’이라는 테마로 두 작품을 먼저 선보였다. 이디스 워튼의 <여름>과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푸른 성>, 두 작품 모두 가부장제와 사회적 규범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힌 여성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욕망을 긍정하고,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할 거야. 다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꾸며대며 살지 않겠어.“라는 극중 밸런시의 대사는 현대 여성들에게도 자유와 해방감을 고스란히 전달해준다. 현실에서는 늘 초라한 내모습이지만, 상상속 그 장소에서만큼은 자유롭고 온전히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푸른 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뭐라고 부르는지가 다를 뿐, 현실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비밀 장소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각자 자신만의 '푸른 성'을 찾아보면 어떨까. 자, 책깃의 고전문학 시리즈 ‘책깃클래식'이 앞으로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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