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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성 ㅣ 책깃클래식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김재용 옮김 / 책깃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실에서는 늘 겁에 질리고 위축되고 억눌리고 무시당하는 밸런시였지만, 공상 속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거침없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 스털링 일가와 주변 친척들은 그 사실을 짐작조차 못 했다. 어머니와 스티클스 고모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밸런시의 집이 두 곳, 그러니까 엘름 가에 있는 흉한 붉은 벽돌 상자 같은 집과 스페인에 있는 푸른 성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밸런시는 기억이 미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 푸른 성에서 살았다. p.11
밸런시 스털링은 내일이면 스물아홉이지만, 어떤 남자의 고백도 받아본 적이 없는 노처녀였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란 남자를 구하는 데 실패한 사람일 뿐이라고 여기는 이웃과 친척들로 가득한 동네에 살고 있기에 밸런시의 일상은 슬프고 외로웠다.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집안에서 밸런시만 유일하게 평범한 소녀였다. 어머니는 딸이 노처녀 신세라고 평생을 매일 같이 창피해했고, 억압적이고 엄격한 대가족 틈에서 밸런시는 숨이 막혔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에게 심장병으로 인한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자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제는 하기 싫은 건 더 이상 하지 않고, 자유롭게,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현실에서는 늘 위축되고 무시당하는 밸런시였지만, 공상 속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거침없이 마음가는 대로 행동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마음속 푸른 성에 있는 밸선시의 방은, 방이라면 갖춰야 할 모든 것이 있는 곳이었다. 현실에서는 제약이 너무 많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기에 눈을 감으면 언제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푸른 성에서만큼은 자유로웠던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반기를 든 밸런시는 마을의 소문난 괴짜 바니에게 청혼을 한다. "저는 오래 살지 못해요. 어쩌면 몇 달.... 몇 주밖에 안 남았을 거예요. 전 그 시간을 제대로 살고 싶어요." 라고 말이다. 바니는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받아준다. "물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사랑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그래도 난 항상 당신이 좀 마음이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들 만의 아름다운 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과연 밸런시의 찬란한 자유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게 해줄까?

밸런시는 갑자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영혼을 휩쓸고 가는 듯했다.
"푸른 성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오, 나의 푸른 성이에요!"
그들은 카누를 타고 노를 저어 섬으로 향했다. 일상과 익숙한 것들의 영역을 뒤로하고 신비와 마법의 영역에 도착했다.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고...... 무엇이든 진실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바니는 카누에서 밸런시를 들어 올려 어린 소나무 아래 이끼 덮인 바위에 내려놓았다. p.229
이 작품은 <빨강머리 앤>으로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국내에서도 엄청난 사랑을 받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작품이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숨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출간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당대의 시선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의 독자들에게 살아 있는 의미와 감동을 전하는 고전문학 시리즈'라는 목적에 정말 잘 맞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여성에게 보수적이었던 당시의 가족 문화와 사회적 규범을 통쾌하게 부수는 여성 캐릭터가 너무도 매력적이고, 몽고메리 특유의 사랑스러운 유머가 고전의 문턱을 낮춰주며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시의성있게 공감대를 만들어 줄테니 말이다.
이번에 책깃의 고전문학 시리즈 ‘책깃클래식'이 새롭게 출간되면서, ‘여름’이라는 테마로 두 작품을 먼저 선보였다. 이디스 워튼의 <여름>과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푸른 성>, 두 작품 모두 가부장제와 사회적 규범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힌 여성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욕망을 긍정하고,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할 거야. 다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꾸며대며 살지 않겠어.“라는 극중 밸런시의 대사는 현대 여성들에게도 자유와 해방감을 고스란히 전달해준다. 현실에서는 늘 초라한 내모습이지만, 상상속 그 장소에서만큼은 자유롭고 온전히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푸른 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뭐라고 부르는지가 다를 뿐, 현실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비밀 장소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각자 자신만의 '푸른 성'을 찾아보면 어떨까. 자, 책깃의 고전문학 시리즈 ‘책깃클래식'이 앞으로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도 기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