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풍주점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소년은 타마가 한 또 다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은 낯선 사람을 대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하지만 마음을 열기도 해야 한다는 것. 다른 동물과 달리, 사람은 먼저 호의를 보여야 상대도 마음의 문을 닫지 않기 때문이다. 또 사람은 나무에게도, 구름에게도, 산에게도 인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산이 멧돼지를 주고, 강이 물고기를 주며, 구름이 비를 내려준다고.                p.23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영특했던 소녀는 오늘 밤 집을 나갈 예정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나이든 남자에게 비싸게 팔아 넘기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함께 일하던 인부와 시비가 붙어 한쪽 팔을 잃었고, 그 이후로 소녀와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세상 전체를 원망했다. 작은 여자애가 다른 집으로 팔려 가면 어떤 일을 겪는지 보고 들어 왔기에, 소녀는 무서웠다.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잰걸음으로 달려간 소녀는 한 동굴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한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목에 고무줄이 끼인 작은 개를 구하기 위해 동굴까지 오게 되었던 거였다. 다음날 산의 양 쪽에서 소년과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소년은 소녀를 위해 서로 방향을 바꿔 나가기로 한다. 


"그러니까 우린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는 거야... 나는 네가 들어온 구멍으로 나갈게. 넌 내가 들어온 구멍으로 나가."


소년은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깊은 계곡물 같은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돕고 싶었다. 소녀가 안전한 곳에 다다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소녀는 소년의 제안에 마음이 따뜻해지며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떠나기 전 소년은 물건을 하나씩 교환하자고 말한다. 신비한 곳에서 신비한 일을 겪었을 때는 뭐든 하나 남겨둬야 안전하게 떠날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년은 아버지가 준 단도를 건넸고, 소녀는 아버지 몰래 숨겨두었던 작은 책을 건넨다. 그렇게 소녀는 해풍촌으로, 소년은 대인촌으로 서로 마을을 바꿔 도착하게 된다. 훗날 소년과 소녀가 다시 자신의 마을로 가게 되었을 때 어른들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두 마을은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강을 몇 개나 건너야 하고, 기차로 몇 정거장이나 가야 하는 곳이라 절대 동굴이 거기까지 이어질 수 없었던 거리다. 사실 인간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두 아이를 만나게 한 것은 거인이었기 대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소녀는 어른이 되어 자신을 도와주었던 소년이 살던 해풍촌을 찾는다. 다시 마주한 마을은 전과 같지 않았지만, 소년은 어린 시절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른 새벽 햇빛과 맑은 달빛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 달빛은 어느 한 부분만 비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햇빛은 온 세상 구석구석 아주 작은 틈새까지 무자비하게 파고든다. 투누흐가 뒤를 돌아보자 마을 전체와 그 뒤의 산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산의 능선을 눈으로 천천히 더듬으며 마을이 변해버렸음을 마침내 인정해야 했다. 변화란 일단 일어나면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인간이 붙잡을 수 있는 건 고작 눈앞의 그 한 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한 줌조차 온전히 쥘 수 없을 수도 있다.                 p.322~323


<도둑맞은 자전거>, <복안인>으로 만났던 우밍이 작가의 신작이다. 우밍이는 대만 최초로 맨부커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대만의 국민작가이다. 그는 이 작품 출간 후, 독립서점에 대한 응원과 지지의 마음을 담아 56일 동안 6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오가며 타이완 전역의 독립서점에서 총 86회의 북토크를 진행했다. 가오슝의 한 서점에서는 좌석이 오픈되자마자 표가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대기 수요로 인해 시스템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사랑받는 작가일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신화적 존재인 거인을 통해 현실의 벽은 높고 두꺼우며 그 앞에 선 인간은 너무도 작고 유약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는 해풍촌 사람들의 목소리로 전개되는 현실의 시간과 산의 형상으로 숨어 지내온 멸종 직전의 거인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대대로 지켜온 땅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마을 사람들의 서사와 인간과 자연을 굽어보는 신화적 존재인 거인의 이야기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얼핏 우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도시화를 목적으로 거대한 자본을 투입해 깎고 부수려는 산이 거인 그 자체이므로, 신화적 존재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인해 사라지는 자연의 목소리와도 같다. 우밍이의 작품은 서정적이고 우아한 언어로 시처럼 쓰였기에 잔잔하게 감동과 여운을 남겨주곤 했다. 개인적으로는 세 작품 중에 이번에 만난 <해풍주점>이 가장 좋았다. 거인이 소년과 소녀를 만나게 하고, 순수하고 사심없는 마음으로 두 아이가 헤어지기 전 나눈 '교환'에 깊은 감동을 받는 장면도 뭉클했다. 단 하루의 만남이 평생을 구원해줄 수 있을까. 이 책은 그에 대한 너무도 아름다운 대답을 들려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해가 지면, 밤이 내게 기어든다
릴라 모틀리 지음, 안현주 옮김 / 구픽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빠는 내가 아빠를 싫어하게 할 만한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빠가 죽었을 때, 나는 어쩌면 그것이 아빠를 더 원망하지 않은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커스처럼 카르마에 놀아나지를 아 ㄶ아서, 세상이 선악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빠를 죽여야만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건 삶이 그 어떤 일에도 이유를 전혀 알려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전의 생각이었다. 때로 아빠들은 사라지고 어린 소녀들은 다음 생일을 맞지 못하고 엄마들은 엄마이기를 잊기도 한다는 걸 배우기 전이었다.                p.113


열일곱 소녀 키아라는 오클랜드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오빠 마커스와 단둘이 살고 있다. 아빠는 병으로 돌아가셨고, 엄마는 약물 중독으로 아기를 죽게 만들었다. 과실치사로 교도소에 수감되는 대신 사회복지시설에서 지내고 있었다. 남매 모두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돌봐줄 어른 없이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다. 하지만 마커스는 래퍼라는 부질없는 꿈에만 매달리느라 집안 살림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키아라는 두 배로 오른 아파트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서지만, 열여덟이 되지 않는 미성년자를 직원으로 받아줄 곳은 없다. 우린 더이상 집세 인상을 감당할 돈이 없다고, 2주 안에 나앉게 될 거라고 말해봤자 마커스는 자신이 기회만 잡으면 큰 돈을 벌거라고 꿈 속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우연히 술에 취한 낯선 남자를 만나게 되고, 미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그 일이 벌어진다. 남자는 대가로 200달러를 주고 그날의 경험은 키아라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게 된다. 고작 몇 분의 일로 얼마나 많은 지폐를 벌 수 있는지, 이제 난 경험이 있고 다시 할 수 있다고, 그저 몸일 뿐이라고, 그 이상일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냥 집세 빚에서 우리를 꺼낼 때까지만 해보자고, 당분간만 할거라고, 이게 우리가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라고 다짐한다. 환한 거리의 불빛에서, 아침에 버는 돈을 원했던 어린 소녀가 해가 지고, 밤이 온 뒷골목에서 살기 위해 스스로를 버려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사회의 보호망이 무너진 세상에서 홀로 살아 남아야 하는 수많은 청소년들이 키아라와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가장 취약하고 비인간화된 흑인 여성이라면 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평소에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밤이 모든 걸 물들이는 방식에는 믿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더 좋은 세계일 필요는 없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곳이 좀 다를 거라 생각한다. 거기선 사람들이 좀 다르게 걷는다든가. 노래로 말을 한다든가. 어쩌면 모두 얼굴이 같거나 얼굴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하늘을 바라볼 시간이 충분할 때면, 나는 내가 운 좋게도 그 무언가를 얼핏 볼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항상 이 행성에 끌려온다.                 p.210


2022년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오프라 북클럽에 선정되고, 그해 부커상 롱리스트에 최연소 후보로 지명되었던 화제의 작품이다. 릴라 모틀리는 이 작품에서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완성도 높은 필력을 보여주는데, 실제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극중 키아라처럼 열일곱 살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열일곱 소녀가 취약하다는 것,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런 식의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매우 놀랍기 그지 없다. 2015년, 작가가 오클랜드에 사는 10대 청소년이었을 때, 실제 벌어졌던 뉴스를 토대로 이 작품이 출발했다. 오클랜드 경찰서와 해변 지역 다른 경찰서의 경찰들이 한 어린 여자애의 성적 학대에 가담하고 이를 덮으려 시도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경찰의 손에 폭력을 경험하고도 알려지지 않고, 법정에서도 서지 못한, 그리고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성매매업 종사자와 젊은 여자들의 사건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여전히 많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키아라에게 더 감정 이입하고,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권력의 횡포에 함께 분노했던 이유는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같은 사건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였다면 또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흑인 여성으로서 겪는 공포와 위험, 강제로 성인화되는 소녀들의 현실을 지켜보는 것과 함께 경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니 말이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지만 여전히 사회 주류는 백인 남성이고 수없이 많은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나라이다. 소위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인종•계층에 대한 편견과 혐오는 사회 곳곳에서 차별로써 존재하며, 수많은 범죄와 부작용을 야기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세상이, 안타깝게도 그렇다. 


헤어나올 수 없는 가난과 절망 속에서,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세계 속에서도 키아라는 옆집에 방치된 아홉 살 소년을 돌보고, 엄마와 오빠를 원망하면서도 사랑한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자신의 시선으로 받아들이며, 결코 희망을 놓지 않는 어린 소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이용하는 잔인한 세상 속 어른들의 모습이 그려지는 현실이 대비되면서 작품의 주제 의식이 더 강렬하게 와 닿았던 것 같다. 게다가 릴라 모틀리는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해서 문장이 정말 서정적이고 아름다웠는데 그래서 더 이런 현실이 슬프게 느껴졌다. 한창 세상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할 나이에, 눈에 띄지 않게 사라지는 것이 안심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어른들로부터 보호 받아야 마땅한 시기에 왜 매일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버텨내야만 한단 말인가. 우리는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 여름으로 데려다줘
줄리안 맥클린 지음, 한지희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안톤은 대체 왜, 나를 상속인에 포함한 걸까?

빌라로 향하는 가파른 자갈길을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믿음직스러운 친구를 데려왔더라면 그의 가족들을 혼자서 감당하지 않아도 됐을까. 하지만 나는 엄마의 비밀을 누구와도 공유한 적이 없다. 이건 결국 혼자서 오롯이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p.42~43


플로리다에 사는 피오나에게 이탈리아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생부의 부고 소식과 그가 피오나에게 재산을 남겼다는 사실이었다. 피오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엄마로부터 생부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게다가 키워준 아빠와 각별했고, 그를 배신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재산이라고해봤자 사실상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상속이었다. 하지만 사지 마비 환자인 아바의 간병에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했기 때문에, 당장 이탈리아행 비행기표를 끊고 회사에 휴가를 내야 할만큼 돈이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이탈리아로 간 피오나는 유언장 공개 후 생부의 가족들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오래전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기로 한다. 


열여덟 살까지 피오나는 자신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끈끈한 가족이라고 믿고 있었다. 몸이 약해진 아빠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별별 감염에 맞서 병원을 들락날락하던 때에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뇌출혈로 엄마가 돌아가셨고, 엄마는 죽기 직전에서야 비밀을 털어놨다. 그리고 아빠는 피오나를 친자식으로 알고 있으니, 절대 진실을 말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생부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피오나는 아빠에게 비밀이 생겼고, 그제야 사람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지금, 플로리다에서 피렌체로의 여정은 예기치 못한 시련이었고, 도착해서 접하게 된 소식 또한 너무도 놀라운 이야기였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로 가득해 가시방식이 된 그곳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주어진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기에, 과거로 향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아는 거라고는 당시 엄마와 아빠가 그곳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과연 피오나는 30년 전 여름의 토스카나에 묻힌 비밀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녀를 설레게 만든 건 토스카나였을까? 아니면 이곳에 도착한 이래 내면을 변화시킬 만한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걸까? 릴리언은 이곳에 와서야 자신이 활짝 피어난 것 같았다. 그건 꽤 좋은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두려움을 내려놓았고, 경계를 풀었다. 앞으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열리는 마음의 크기만큼 상처받을 자리 역시 커질 거라는 불안감도 덤으로 딸려왔다.              p.227


갑작스러운 남편의 실종과 남겨진 아내의 이야기를 그렸던 미스터리 로맨스 <이토록 완벽한 실종>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줄리안 맥클린의 작품이다. 전작이 겹겹이 쌓인 반전들을 드러내며 차곡차곡 서사를 만들고, 로맨스와 미스터리 장르를 넘나들며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페이지 터너였기에 이번 작품도 매우 기대가 되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아름다운 토스카나를 배경으로 생부에게서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딸이 30년 전 여름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과거의 실수를 되짚어 보고 거기서 뭔가를 배우는 건 중요하다고, 그래야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극중 대사처럼 현실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겼다면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숨겨왔던 비밀을 따라가는 서사라 1986년과 2017년의 시간이 교차로 진행되고 있다. 서른 권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며 세계적으로 수백만 부가 팔린 로맨스 작가답게 이번 작품에서도 설레이는 감정들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나 토스카나의 풍경 묘사들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는데, 지금 같은 계절에 읽으면 현지의 와이너리를 거니는 듯한 기분을 물씬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녹음이 우거진 초록색 산꼭대기 위로 우뚝 솟은 중세 마을과 성, 자욱한 안개가 하얀 띠를 이룬 올리브 나무 숲과 포도밭,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 햇살을 머금은 포도 내음까지... 배경 묘사만으로 로맨틱한 분위기가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것일까.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공간에서 말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계절, 피오나와 함께 토스카나의 낭만적인 여름을 경험해보자. 여름 휴가철에 읽을 소설책을 고민 중이라면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죽음의 인연 ㅣ 붉은 박물관 시리즈 3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 / 리드비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일부터 재수사를 시작한다. 오늘 내로 수사 서류를 전부 읽어 줘."

그 말만 남기고 히이로 사에코는 관장실로 사라져 갔다.

오늘 내로? 사토시는 한숨을 쉬었다. 저는 관장님처럼 글을 빨리 읽을 수 없는데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메지로 거리 야하라2가의 차량 트렁크 속 신원 불명 시신 사건'의 수사 서류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p.62~63


하천부지의 교각 아래 노숙자가 사는 판잣집 안에서 두 남자가 죽어 있는 채로 발견된다. 두 사람 옆에는 피 묻은 야구 배트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그 판잣집에 사는 노숙자로 보였다. 그런데 나머지 한 명은 현직 국회의원이었다. 부검 결과 사망 추정 시각은 전날 오후 9시부터 11시 사이였고, 사인은 둘 다 뇌타박상이었다. 유력 정치인이 노숙자와 함께 살해됐으니 연일 뉴스에 보도가 되었고, 여러 경찰서에서 수사관들을 급하게 긁어모아 수사본부가 설치된다. 전 국민이 주목하는 엄청난 대사건이었기에 수사본부의 분위기도 매우 살벌했다. 대규모 수사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건은 미제로 남았고, 국회의원이 왜 그런 곳에 있었는지, 노숙자와 국회의원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십오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사건 해결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3만 명이나 되는 수사관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사건을, 수사 서류만 읽고도 단서를 찾아내는 게 가능할까. 재수사를 하겠다는 지시에 사토시는 이번만은 진짜로 히이로 사에코의 망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두툼한 수사 서류를 읽기 시작하는데, 과연 이들은 이번 사건도 해결해 낼 수 있을까. 사이토는 히에로 사에코가 만나라고 지시한 인물들을 만나면서 재수사를 시작한다. 사건 당일의 정보를 확인하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당시 관계자들에게 던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히이로 사에코의 이번 언동은 평소보다 더 불가사의했기에, 사토시는 그녀의 생각이 점점 더 궁금해진다. "슬슬 관장님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실 수 없을까요?" 드디어 히이로 사에코는 자신의 추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그야말로 파격적인 전개가 펼쳐진다. 자, 미궁에 빠졌던 사건은 드디어 해결되는 걸까. 




"히이로 관장님은 미제 사건을 몇 건이나 해결하셨잖아요.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커리어라고 하셨죠?"

다니자와 시오리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사람이 아니라 기계 같은 분이에요. 의사소통 능력이 극단적으로 부족해서, 경찰청이 왜 그런 사람을 채용하기로 마음먹었는지 가끔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p.176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인형같이 차갑고 단정한 얼굴, 어깨까지 길게 기른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 백의를 입고 무테안경을 쓴 그녀는 붉은 박물관의 관장 히이로 사에코 경정이다. 경시청 부속 범죄 자료관, 통칭 '붉은 박물관'은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사건 발생 이후 일정 기간이 경과한 뒤 보관하고, 그것을 조사, 연구 및 수사관 교육에 활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아름다운 외모의 관장 히이로 사에코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수사 1과에서 좌천되어 온 조수 데라다 사토시, 단 두 명이 운영 중이다. 히에로 사에코는 커리어라는 고위직 경찰임에도 이곳에서 수년 째 근무 중이다. 데라다 사토시는 형사를 천직으로 여겼기에 언젠가는 수사 현장으로 돌아갈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며 어떻게든 범죄 자료관에서 버틸 생각이다. 두 사람은 과거 사건 관련 정보들을 등록해 데이터베이스를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작업을 하는 중인데, 수사 서류를 검토하다 미제 사건의 재수사를 하게 되고, 그들의 활약으로 수십 년 동안 감춰졌던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주요 서사이다. 


본격 미스터리의 거장 오야마 세이이치로의 ‘붉은 박물관 시리즈’ 그 세 번째 이야기이다. <붉은 박물관>, <기억 속의 유괴>에 이어 <죽음의 인연>에서도 히이로 사에코 관장의 독보적인 추리와 사건 해결은 계속 된다. 수록된 작품들 모두 예측 불가능한 반전과 트릭, 치밀한 구성과 복선까지 완성도가 뛰어나 읽는 재미가 있다. 오야마 세이이치로는 본격 미스터리의 거장으로 <붉은 박물관>은 두 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붉은 박물관’은 작가가 영국의 범죄 박물관, 통칭 ‘검은 박물관(Black Museum)’이라 불리는 곳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가상의 범죄 자료관이다. 미제 사건을 다루는 추리 소설은 많이 있어 왔지만, 이렇게 범죄 자료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히이로 사에코는 3만 명이나 되는 수사관이 투입됐는데도 결국 해결하지 못해 미제로 남은 사건 조차 서류만 읽고 단서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증거품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다가 틈틈이 돌발적으로 재수사를 실시한다고 외치는데, 기존 수사와는 전혀 다르게 대담무쌍한 추리로 매번 진상을 이끌어 낸다. 매력적인 캐릭터 외에도 미제 사건 재수사라는 틀 안에서 다양한 본격 미스터리의 맛을 느낄 수 있어 참 좋아하는 시리즈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바래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
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지노동의 네 가지 구성 요소는 우리 중 다수에게도 상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게 정말 '일'인 건지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 '일'과 '노동'은 우리 삶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좀 지나칠 정도로 노동에 열중하면서 재생산 노동, 감정노동, 사무실 잡무 등등 계속해서 늘어나는 노동의 형태들을 발명(더 너그럽게 말하자면 규명)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독자들이 이 글을 회의적으로 본다 해도 용서할 수 있다.                  p.68


우리는 누군가의 엄마인 여성이 아이를 돌보는 일보다 자신의 일을 우선순위에 놓으면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한다. 또한 자신이 행한 노동의 대가를 바라면 가족을 위한 일인데 대가를 바라느냐고 비난의 시선을 보낸다. 반대로 남성이 자기 일을 우선순위에 놓거나 자신이 한 일의 대가를 바라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고 화제로 삼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이렇게 엄마들은 온종일 집에서 갖가지 종류의 노동을 하면서도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들어 왔다. 하지만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아내가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아내가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고 아이들을 건사해주기 때문에 남편이 마음 편히 나가서 일하고 올 수 있는 것이다. 아내라는 비임금 노동자가 있기 때문에 남편이 임금노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내도 남편과 동일하게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문제는 비슷하다. 똑같은 강도로 직장에서 일을 하고 돌아와서도, 아내의 일은 집에서 다시 시작되니 말이다. 물론 예전보다는 집 밖의 생산노동만큼 집 안의 재생산노동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많아졌긴 하다. 실제로 가사노동 분담은 과거에 비해 평등해졌다고 하고, 남성들도 과거에 비해 가사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다. 덕분에 일부 사람들은 성차별의 실제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집안일은 함께하는데 여성들의 머릿속만 이렇게 바쁜 것일까. 현대 사회의 여러 특징들이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머릿속 노동'을 요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슨 데이밍거는 이성애, 퀴어 커플에 속한 부모 172명을 심층 인터뷰하며 오늘날 가정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추적한다. 그리고 육체적 가사노동이 줄어드는 동안 인지적 가사노동은 더 복잡해지고 늘어난 현실을 포착하며, 그동안 제대로 가시화되지 않았던 인지노동 불평등에 관한 사회학적 논의를 본격적으로 연다.




이처럼 대체로 눈에 띄지 않는 이러한 불평등은 더 눈에 잘 보이는 불평등을 지탱하는 데 일조한다. 한편으로는 인지적 책임이 계속해서 여성의 손에 확고하게 쥐어져 있는 한, 남성의 유체노동 기여도 또한 제한될 것이다. 많은 커플이 두 차원에서 일어나는 불평등이 서로를 상쇄한다고 이야기했으나 (예를 들어 그녀가 계획을 세우면 그는 계획을 실행한다) 실제로 그러한 상쇄를 이루어낸 커플들은 훨씬 적었다... 인지노동과 육체노동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두 영역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p.280~281


30대 초반의 백인 여성 크리스틴의 하루를 보자. 그녀는 음식을 만들고, 어린 아들을 어린이집에 대려다주고 다시 데려오는 일처럼 자신의 시간을 대부분 잡아먹는 익숙한 집안인들을 처리하는 와중에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잠재적인 문제들을 검토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선택지를 선별하고, 수많은 결정을 내리고, 이미 내린 결정의 결과와 영향을 검토하고 추적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이해하는 '집안일'이란 개념은 크리스틴이 보내는 하루의 이러한 측면들을 적절히 잡아내지 못한다. 크리스틴의 경험은 여러 형태의 '인지노동'이다. 그녀가 하는 육체노동은 아주 쉽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생각하기로 진행되는 인지노동은 겉으로 전혀 보여지지 않는다. 이제 집안일을 행하고 생각하는 일의 조합으로 고려하는 가사노동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해가 필요해진 것이다. 대체로 눈의 띄지 않는 불평등이 더 눈에 잘 보이는 불평등을 지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한 논의는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다. 


가사노동과 돌봄의 불평등에 대해 다루는 책은 많이 있어 왔지만, 이 책이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지만 가정을 굴리는 데 필수적인 머릿속 노동, 즉 ‘인지노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지적 가사노동이란 모든 가족구성원의 욕구 충족을 보장하려는 일단의 정신적 과정이다. 이는 시간으로는 측정되지 않는, 가시화되지 않은 가사노동이기에 평등을 지향하는 관계 속에서도 불균등하게 분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 동안 막연하게 머릿속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말끔하게 해소되는 기분도 들었다. 머릿속 노동이라니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개념인데, 그 동안 내가 해온 많은 것들이 인지노동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시간 사용과 정신 사용을 함께 고려해 가사노동을 더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있다. 저자는 단순히 문제를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지노동의 평등한 분배를 위한 거시적인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 직장에 나와 있는 낮 시간에도 집안일을 더 많이 생각하는 수많은 여성들과 가사노동과 육아 수행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온 여성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머릿속 노동의 불균형을 인식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