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의 꽃말은 맥주
김지연 외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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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이것은 쓰면서 내가 보게 된 또다른 '세계'이다. 쓰지 않았으면 절대로 몰랐을 세계. 그래, 정말 세상은 이상한 곳이다. 아버지가 없길 바라면서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한 것처럼. 소설이 아니고서는 이런 마음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다. 아버지도 있고, 개도 있고, 나도 있는 세계. 모두가 조금은 자신의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세계. 그런 세계가 어딘가 있을 거란 생각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살고 싶어진다.                - 장희원, '소설과 나', 중에서, p.24


여덟 소설가가 함께 만든 문학 레터 〈드문〉의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대학원 서사창작과의 선후배로 처음 만난 이들은 졸업한 뒤에도 함께 소설을 읽고 쓰며 우정을 이어왔다. 첫번째 시즌의 주제는  ‘소설과 ○○’이었다. 소설과 나, 소설과 사물, 소설과 병, 소설과 소울푸드, 소설과 야망이라는 다섯 개의 주제 아래 김지연, 김혜빈, 노은지, 박소희, 서장원, 안나, 이주영, 장희원 여덟 명의 작가가 에세이와 짧은 소설을 썼다. 차곡차곡 쌓인 글들 중에 에세이를 모아 묶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나는 어쩌다 쓰는 사람이 되었을까... 작가가 된 계기, 연애편지 대신 소설을 쓰게 된 마음,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 도전하게 되는 이유를 읽는데, 어느 순간 뭉클해졌다. '소설이 아니고서는 이런 마음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문장과 '계속 도전해도 실패하기만 하는 영역이 삶에는 꼭 필요한데, 그게 내게는 어쩌면 소설인 것 같다'는 문장을 읽으며 어쩌면 글쓰기뿐만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해당되는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지 않으면 누군가를 죽일 것 같다는 간절한 마음을 현실화 구체화시키기 위한 노력, 단 한 문장이라도 마음에 드는 문장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매일매일을 쌓아가는 시간들이 페이지마다 빼곡하다. 어떤 분야든 그렇지 않으랴. 밀린 방학숙제를 하는 것처럼 대체로 막막하고, 끝이 안 보이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버티고 쌓다 보면 아주 드물게 가슴 떨리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 그것이 어떤 대가를 감수하고서라도 좋아하는 일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괴로워도 결국에는 어떻게든 마감을 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끝에는 맥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이듯 마감의 꽃말은 맥주다. 송고 뒤 마시는 맥주는 원고의 마침표로 기능한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소설 외의 글을 쓸 때는 마감 맥주를 건너 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소설에는 예외가 없다. 소설 마감을 하고 나면 언제나 영혼이 가출해 있기 때문이다. 집 나간지 오래라는 것 외에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은 영혼을 찾아와야 한다.                - 이주영, '마감의 꽃말은 맥주' 중에서, p.211


여러 테마 중에서 '소설과 소울푸드' 코너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친구를 만나도, 중요한 모임에서도 언제나 제일 먼저 고민하는 것은 무엇을 먹을까, 요즘 뭐가 맛있다더라, 일 것이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저녁에는 뭘 먹을지 이야기하고, 카페에서 디저트는 어떤게 좋을지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이 책에 등장한 소울푸드는 떡볶이, 누룽지와 팥죽, 나물, 맥주, 순두부, 와인이다. 소설 마감을 하고 나면 가출한 영혼을 되찾기 위해 꼭 맥주를 마신다는 이주영 작가의 에피소드는 대부분 공감하지 않았을까 싶다. 바쁜 하루의 끝에서, 지친 나를 위한 선물로 시원한 맥주만한 게 또 있을까. 이주영 작가는 그렇게 맥주를 마시며 '세상에 이렇게 시원하고 고소하다니! 이게 이렇게나 맛있을 일일까! 이 맛에 마감하지, 라며 호들갑을 떤다'고 썼는데, 정말 맥주는 어른들을 위한 소울푸드가 분명한 것 같다.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 한 잔이면 피로가 싹 내려가는 듯한 기분, 다들 공감할 테니 말이다. 


소설가의 곁에 놓은 사물들을 들여다보고, 아픈 몸과 마음으로도 계속 살아가는 매일을 거치며, 음식에 깃든 기억과 마음에 공감하고,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각자의 꿈과 야망에 대해 작가들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말미에는 여덟 작가 모두와 인연이 있는 윤성희 작가의 에세이도 만날 수 있었다. 〈드문〉은 2026년 3월부터 ‘시즌 2’를 시작해, 여덟 소설가가 각자 자신만의 주제를 정해 쓴 에세이를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독자들에게 보내고 있다. 그러니 언젠가 두 번째 시즌의 글들을 모아 두 번째 책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마음, 소설을 읽는 마음, 그리고 소설이 아니고서는 다 말할 수 없었던 마음들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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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 사과
박솔뫼 외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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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떠올려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두어야 한다.                - 박솔뫼, '사과' 중에서, p.10~11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4일 출근하고 3일은 쉬었다. 그래서 1년 전부터는 역 근처 오래된 카페에서 주말에 일을 했는데, 단골 손님인 선호와 가까워진다. 선호는 세계적인 식품 가공회사에서 제품개발을 담당했는데, 커피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커피의 맛을 구현한 음료를 개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주말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이가 된다. 선호는 해외 출장을 간 사이 식물에 물 주기를 부탁하고, 애리는 선호가 없는 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왜인지 점점 더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가 출장을 다녀온 뒤 두 사람은 별다른 사건도 없이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뭐 이런 무미건조한 연애와 이별이 다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게 시작되고, 비슷하게 끝이 난다. 죽고 못살 것 같은 뜨거운 감정이 불타 올라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니며, 엄청난 계기가 있어 멀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숙소에서 지내며 열차로 출퇴근하는 여자와 부모가 사둔 바닷가 근처 건물을 세놓아 관리하는 남자는 가정 환경도, 커피를 대하는 태도같은 취향도 너무 달랐다. 남자는 여자가 길에 서서 흙이 묻은 감자를 굳이 씹어 먹는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고, 여자는 사과를 감자로 보고자 하는 사람에서 굳이 사과과 사과임을 증명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았고, 남자는 자신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라고 해서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 만한 말을 하진 않았다. 물론 그렇게 계속 연애가 이어질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두 사람은 관계를 뒤바꿀 만한 커다란 사건이 없이도 그냥 멀어진다. 두 사람 관계의 균열과 이별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슬프거나 쓸쓸하다기보다 담백하게 느껴진다. 




"나......죽으려고." 

영주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 옆에서 죽으려고.” 

영주는 가까이 다가와 땀으로 번들거리는 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하나하나 떼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영주는 잠깐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내가 죽는 순간에,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처음으로 영주가 웃었다.             장희원, '영주' 중에서, p.157


한 해 동안 발표된 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첨예하고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 작품을 조명해온 이효석문학상 올해의 수상작은 박솔뫼 작가의 <사과>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어떤 날과 어떤 날의 사이에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여전히 짐작도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쓴 소설'이라고 말했다. 익숙한 연애담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었다. 사실 잘 안다고 믿는 것들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그리고 어떤 부분은 살면서 내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믿는 경우도 생기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사과를 감자로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사과가 사과임을 증명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극중 인물의 말처럼 어떤 일들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수상작과 함께 박솔뫼 작가의 <비둘기 옮기기>라는 작품도 함께 수록되었는데, 이 작품도 참 좋았다. 일본의 문예지에서 동세대 여성 작가 세 명이 각각 부산, 대만, 도쿄와 니가타를 걸으며 마주한 도시의 풍경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기획으로 쓰인 작품이라고 한다. 여러 나라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지금 읽는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옮기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도쿄와 니카타의 풍경을 거닐며 펼쳐지는 사유를 담고 있다. 우수작품상 수상작으로 성혜령, 임솔아, 장희원, 정기현, 황시운 작가의 작품들도 함께 수록되어있다. 죽은 반려견의 유골함 처리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고등학교 시절 학교 폭력을 당했던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등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았다.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사이에서, '아주 짧은 순간 우리라고 묶일 만한 순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여섯 편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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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을 잇는 바다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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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야 쇼이치.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사람. 암석과 잔해로 가득 찬 빈집을 덜렁 남기고 사라진 무책임한 수집가. 그런 그에게 이제 살이 붙고 피가 흐른다. 그는 틀림없이 이곳에 살아 있었다. 자신도 피폭되어, 고독 속에서 남은 생명을 수집을 위해 남김없이 바치며 조용히 죽어 갔다.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지만, 한 사람쯤은 그의 인생을 끝까지 지켜봐도 괜찮지 않을까.                 - '기도의 파편' 중에서, p.189


대학에서 조교로 일하는 아유미는 지질 조사와 암석 연구를 위해 매년 두 번씩 미시마 섬을 찾는다. 학과 일 때문에 자신의 연구를 할 시간이 전혀 없어, 방학 때만 일주일 정도 머물고 있다. 암석과 연애한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연구에 대한 나름의 신념이 있지만, 밖에서 보기엔 성실한데 융통성이 없는 괴팍한 사람으로 치부될 뿐이다. 미시마는 화산섬으로 섬 전체가 두꺼운 용암과 화산분 출몰로 이루어져 있다. 곳곳에 암석 표면의 거칠 갈색과 그 위를 덮은 초록, 그 너머 바다의 군청이 아름답게 대비를 이루며 독특한 경관을 빚어내는 곳이다. 


일주일간 이곳에서 조사를 하며 아유미는 외부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를 자꾸만 마주친다. 오래전 사라진 흙을 찾기 위해 섬에 왔다는 남자는 시시껄렁한 태도에 신원도 불분명했지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어쩌다보니 함께 붉은 점토의 흔적을 찾아 섬을 다니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서로의 신념을 이해하게 된다. 아유미는 조교가 된 뒤 정부에서 주는 과학 연구비 지원금을 한 번도 따낸 적이 없다. 젊은 연구자들을 위한 소액 지원금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 연구비를 따내는지가 연구자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임에도, 아유미는 학계에 어필할 수 있는, 시류에 맞는 연구를 할 생각이 없었다. 빠른 시일 내에 커다란 발견을 하지는 못해도 혼자 답사를 거듭하며 조금씩 작은 사실들을 쌓아나가는 연구 방식이 좋았던 것이다.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 자신이 하는 연구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건 아닐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도자기를 빚는 남자를 통해 자신의 연구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그때 새끼 거북을 집에 데려갔는지. 왜 지금 또 알을 훔쳐 와 부화시키려는 건지. 히메가우라 바다거북을 보호하려는 게 아니다. 거북 수를 늘리려는 것도 아니다. 내 새끼 거북을 내 손으로 바다에 내보내고 싶을 뿐이다.

그럼 그 새끼 거북이 나 대신 히메가우라를 떠날 테니까.

구로시오해류를 타고 끝없이 넓은 바다로.

상상할 수도 없이 머나먼 세계로.             -'파랑을 잇는 바다' 중에서, p.328


제172회 나오키상 수상작이자 <달까지 3킬로미터>, <8월의 은빛 눈>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는 이요하라 신의 작품이다. 이요하라 신은 지구행성물리학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과학자의 시선으로 여러 작품을 써왔다. 전작들을 읽으며 문학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과학의 목소리를 너무도 아름답게 풀어내 감탄했던 기억이 있어 이번 신작도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다섯 편의 작품에는 무시해도 그만일지 모르는 가치 하나를 지키기 위해 신념을 세우고, 타인을 위해 위험을 떠안거나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켜주고자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소멸해가는 바닷가 마을에서 몰래 거북을 돌보는 소녀, 오래전 은둔 과학자가 살던 폐가를 조사하는 공무원, 사회생활에 실패하고 산골에서 생활을 하다 늑대를 만나게 되는 남자 등 다섯 편의 작품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요하라 신은 매번 인간의 삶에 대한 비유를 과학적 상상력으로 풀어내기 때문에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연구를 하고 생계와 무관한 일에 오랜 세월 몰두할 수 있는 우직한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준 시간이었다. 과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이요하라 신의 소설들은 특별하다. 이야기마다 과학적인 지식과 정보들이 배경에 깔려 있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녹아 들어가 있어 전혀 어렵거나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오히려 서정적인 느낌마저 든다. 다섯 편의 작품들을 읽으며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붙드는 끈질긴 마음과 자연의 순환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긴 여운처럼 남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세계로 떠나고 싶게 하는' 이 다정한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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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의 우주 - 당신의 집은 어디입니까?
최준석 지음 / 아트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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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에게 집은 뭘까요? 누군가에게는 지친 육체를 쉬게 하는 단순한 숙소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나와 함께 가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도 합니다. 집을 유기체로 느끼는 누군가에게는 복도 한구석에 놓인 오래된 의자가, 또는 비 오는 날 처마 밑 작은 테라스에 앉아 듣는 빗소리가 그런 요소가 될 수 있겠지요.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 각자 ‘나만의 규칙’으로 집 곳곳에 채워질 때 의미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p.37


언젠가부터 집은 더이상 삶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잘 사고 잘 팔아야 하는 상품이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는지보다 어떤 차를 타고, 어떤 지역에 몇 평짜리 집을 갖고 있느냐에 모든 관심이 귀결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획일화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고유함을 찾겠다는 의지로 '나만의 집'을 짓는다. 아파트가 가치의 총합이 되어 신분과 계급이 되는 사회에서 단독주택을 짓겠다는 말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한 개인의 독립 선언이자 사회적 저항의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은 십수 년간 ‘나만의 집’을 꿈꾸는 건축주들을 만나 단독주택을 설계해온 건축가 최준석이 여덟 채의 집을 짓는 과정에서 마주한 고민과 생각을 담고 있다. 집 짓는 일을 '과거의 성찰'이자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설계 도면을 두고 빈 종이를 채워나가는 모든 과정을 통해 집을 물리적 공간을 넘어 각각 개인의 삶으로 완성시켜 나간다. 누군가에게는 지친 육체를 쉬게 하는 단순한 숙소에 불과한 것이, 또 누군가에게는 나와 함께 가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도 한 것이다. 거실은 꼭 필요한 것인가, 집 어딘가에 혼자 숨어 들어갈 공간이 작게라도 있다면 자연스럽게 나 자신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투영하는 반사체라는 생각이 든다... 등 저자의 말이 와 닿는 부분이 많아 공감하며 읽었다. 각종 건축 용어들이 등장하고, 전문적인 설계와 구도 등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이어지지만, 에세이처럼 편하게 풀어쓴 글이라 가독성도 참 좋았다. 




완공된 순간부터 집은 늙기 시작합니다. 벽에 붙어 있는 재료는 비바람에 삭고, 색은 바래며, 문짝은 삐걱거립니다. 하지만 집이 나이든다는 건 외형적 퇴색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집이 나이들수록 그 집에 살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가고 집에는 한 가족이 그곳에서 보낸 역사가 쌓여갑니다. 벽지의 낙서와 문틀에 새겨진 키재기 눈금들은 집이 거쳐온 시간을 웅변합니다... 낡은 것은 낡은 대로, 필요한 것은 새롭게 덧붙여 그 둘을 공존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오래된 일기장의 찢어진 페이지를 테이프로 조심스럽게 붙이고, 그 뒷장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p.189~190


우리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집안으로 관통하는 빛과 풍경, 창문 틈으로 새어드는 계절의 소리, 일상의 사소한 잔향 들이 우리 내면의 확대경 아래 놓이고, 우리는 집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연습한다. 바깥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격리된 공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 타인의 시선에 쪼그라들었던 본연의 모습을 다시 일으키고 마주할 수 있는 공간... 건축가가 쓴 책을 꽤 읽어본 편인데, 이 책의 저자는 정말 글을 잘 쓰는 작가처럼 느껴졌다. 좋은 집이란 무엇인지,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매 순간 고민하고, 사유한 결과물이 페이지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집에 개성을 부요하는 요소는 거주자의 취향과 건축가의 의도라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건축가라면 언젠가 집을 짓게 될 때 꼭 의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외부의 시선은 막고, 내부의 시선은 열고... 감춘 듯 보여주고, 보여준다면 멋지게 보이고 싶고, 외부에서 집 안이 보이는 건 싫지만 집 안에서는 바깥이 잘 보이는 집, 이런 집이 가능할까 싶지만 대부분의 단독주택 의뢰인이 원하는 집이 이런 집이라는 대목에서 사람 마음이란 원래 다 그런 거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그런 마음들을 이해하고, 거주자의 눈높이에서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가의 시선도 감동적이었고 말이다. 저자가 건축주와 함께 만들어온 여덟 채의 집을 통해 좋은 집, 그리고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그려보며, 쓸데없는 몽상과 쓸모 있는 고민 사이에서 무수한 선택을 하는 것이기에 결국 인생을 짓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만의 집, 나의 우주를 상상해 보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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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드렁크 픽션 ㅣ 위픽
서장원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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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작가님은, 소설에서 마음에 안 드는 캐릭터는 삭제시키나요?"

나는 뜻밖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지만 곧 그렇지 않다고, 내 소설에서 누가 죽거나 사라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렇게 안 하려고 해요. 제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다 제가 만든 건데요, 뭐."              p.36


서울에서 조그만 광고 회사를 다니던 소설가 정원은 소설에 집중할 시간을 가져보기 위해 아내와 함께 진주로 내려왔다. 문학지원사업으로 이용료를 면제받아 공유 오피스를 드나들며 글을 쓰려고 했지만, 소설은 쓰지 못하고 커피만 축내며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원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이 너무 심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잘한 갈등과 마찰에, 편견과 소외가 드러나는 순간들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세계의 부조리를 납득하지 못하는 인물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번번이 가로막혀 한글창을 닫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는 격투기 체육관에서 코치로 일하는 격투기 선수 조성을 만나게 된다. 그를 통해 종합격투기 경기를 보며 정원은 자신에게 필요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강인해 보이는 조성과 그가 속한 격투기 세계가 자신의 소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거라는 기대를 품는다. 하지만 종합격투기 세계는 비열한 반칙과 폭력, 혐오가 난무하는 세계였다. 퀴어 혐오, 여성 혐오를 비롯해서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며 상대방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약하다고 비아냥대는 것도 일상이었다. 혐오로 점철된 각종 영상과 댓글들을 보며 정원은 '개소리하는 사람들만 걸리는 역병이 돌았으면 좋겠어.'라고 아내에게 말할 정도로 그들을 경멸한다. 




"그럼 이 소설은 뭔데요?"

"이건, 펀치 드렁크 증후군을 가진 사람이 주인공이에요. 펀치 드렁크 증후군 때문에 자기한테 초능력이 있다고 믿는 전직 격투기 선수요. 주인공은 자기가 물건이든 생명체든 손에 잡히는 건 전부 다 감쪽같이 없애버릴 수 있다고 믿어요."

조성 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그냥, 그렇게 믿으면서 사는 거죠."             p.70


조성은 스파링하다 머리를 다쳐 구급차레 실려 가고, 며칠 뒤 그의 문병을 간 정원은 체육관에 반칙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뒷머리를 때리면 반칙이었는데, 조성이 그에게 뒷머리를 좀 심하게 맞아 후두엽에 미세 출혈이 생긴 것이다. 그의 문병을 가서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을 혐오하고 조롱하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어떻게 20년 넘게 머물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조성은 퇴원 후 반칙왕과의 시합에 정원을 심판으로 부르고, 일요일 오후의 고요한 체육관에서 시합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정원은 경기 중에 반칙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조성 씨가 바닥에 깔린 채로 반칙왕을 껴안고, 단 몇 초 만에 반칙왕의 모습이 잠깐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단 한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어 판형이 작고 가볍지만, 양장본이라 튼튼하고 색감이 예뻐 소장용으로 너무 멋진 '위픽 시리즈' 신작이다. 구병모 작가의 <파쇄>를 시작으로 그 동안 무려 백 편이 넘는 작품들이 위픽 시리즈로 나왔다. 나도 꽤 많이 읽어 왔는데, 디자인도 예쁜데다 골라 읽는 재미가 있어 너무 좋아하는 시리즈이다. 이번 신작은 서장원 작가의 <펀치 드렁크 픽션>으로 인간은 선인 혹은 악인으로 쉽게 나눌 수 없는 입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자 같다’ ‘게이 같다’는 말이 상대를 조롱하는 관용어로 쓰이는 종합격투기 세계에서 조성은 어떻게 커밍아웃하지 않은 성소수자로 살아온 것일까. 자신의 정체성을 혐오하고, 그 혐오감을 마음껏 과시하는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오랜 시간 버텨온 것일까. 그런 시간들이 쌓여 '어떤 사람들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만약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을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떨까. 하지만 나쁜 것을 판단하고 벌을 주는 판단은 어떤 기준으로 내려야 하는 것일까. 짧은 분량임에도 긴 여운이 남는 이야기였다. 자,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 위픽과 함께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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