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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 사과
박솔뫼 외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떠올려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두어야 한다. - 박솔뫼, '사과' 중에서, p.10~11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4일 출근하고 3일은 쉬었다. 그래서 1년 전부터는 역 근처 오래된 카페에서 주말에 일을 했는데, 단골 손님인 선호와 가까워진다. 선호는 세계적인 식품 가공회사에서 제품개발을 담당했는데, 커피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커피의 맛을 구현한 음료를 개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주말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이가 된다. 선호는 해외 출장을 간 사이 식물에 물 주기를 부탁하고, 애리는 선호가 없는 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왜인지 점점 더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가 출장을 다녀온 뒤 두 사람은 별다른 사건도 없이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뭐 이런 무미건조한 연애와 이별이 다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게 시작되고, 비슷하게 끝이 난다. 죽고 못살 것 같은 뜨거운 감정이 불타 올라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니며, 엄청난 계기가 있어 멀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숙소에서 지내며 열차로 출퇴근하는 여자와 부모가 사둔 바닷가 근처 건물을 세놓아 관리하는 남자는 가정 환경도, 커피를 대하는 태도같은 취향도 너무 달랐다. 남자는 여자가 길에 서서 흙이 묻은 감자를 굳이 씹어 먹는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고, 여자는 사과를 감자로 보고자 하는 사람에서 굳이 사과과 사과임을 증명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았고, 남자는 자신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라고 해서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 만한 말을 하진 않았다. 물론 그렇게 계속 연애가 이어질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두 사람은 관계를 뒤바꿀 만한 커다란 사건이 없이도 그냥 멀어진다. 두 사람 관계의 균열과 이별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슬프거나 쓸쓸하다기보다 담백하게 느껴진다.

"나......죽으려고."
영주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 옆에서 죽으려고.”
영주는 가까이 다가와 땀으로 번들거리는 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하나하나 떼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영주는 잠깐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내가 죽는 순간에,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처음으로 영주가 웃었다. 장희원, '영주' 중에서, p.157
한 해 동안 발표된 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첨예하고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 작품을 조명해온 이효석문학상 올해의 수상작은 박솔뫼 작가의 <사과>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어떤 날과 어떤 날의 사이에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여전히 짐작도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쓴 소설'이라고 말했다. 익숙한 연애담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었다. 사실 잘 안다고 믿는 것들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그리고 어떤 부분은 살면서 내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믿는 경우도 생기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사과를 감자로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사과가 사과임을 증명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극중 인물의 말처럼 어떤 일들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수상작과 함께 박솔뫼 작가의 <비둘기 옮기기>라는 작품도 함께 수록되었는데, 이 작품도 참 좋았다. 일본의 문예지에서 동세대 여성 작가 세 명이 각각 부산, 대만, 도쿄와 니가타를 걸으며 마주한 도시의 풍경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기획으로 쓰인 작품이라고 한다. 여러 나라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지금 읽는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옮기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도쿄와 니카타의 풍경을 거닐며 펼쳐지는 사유를 담고 있다. 우수작품상 수상작으로 성혜령, 임솔아, 장희원, 정기현, 황시운 작가의 작품들도 함께 수록되어있다. 죽은 반려견의 유골함 처리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고등학교 시절 학교 폭력을 당했던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등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았다.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사이에서, '아주 짧은 순간 우리라고 묶일 만한 순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여섯 편의 이야기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