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백나무성의 라푼젤
배명은 지음 / 고블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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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남자가 뜻 모를 말로 투덜거렸다. 나는 죽었으나 살았다는 안도감에 울어버렸다. 눈물을 닦으려 팔을 들었는데, 손이 그 자리에 있다. 고개를 들어 하반신을 보니 다리도 제자리에 있었다. 잃어버렸던 내 몸이 다시 생긴 것이다. 

마치 일찍이 죽었으나 오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올해 귀신날도 이렇게 지나가는군,"

그렇게 닭이 세 번째로 울었다.              '1월 16일생' 중에서, p.116


졸업과 동시에 도시로 빠르게 떠났던 '나'는 오랜만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산속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싸락눈은 그친 지 오래지만 숲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날리는 눈이 시야를 가라는 날씨였다. 오래도록 방치되어 담장도 허물어지고, 외양간과 창고 지붕도 주저앉았으며, 장독대도 깨지고 부서져 온전치 못했다. 시간이 좀먹어 무너져버린 것들 사이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에 들어가니, 수척한 얼굴의 동생 다원이 보였다. 통통하고 잡티 하나 없던 뽀얀 얼굴은 살이 빠져 도드라진 광대뼈가 날카로워 보였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애교살이 있던 자리는 검게 그늘졌다. 머리카락은 푸석했고, 별로 좋아 보이는 꼴은 아니었다. 


깜빡 잠이 들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밤이었다. 부엌으로 가보니 다원이가 부산스레 움직이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미역국을 끓이며 사과와 배를 꺼내 담고, 접시에 잔뜩 쌓인 음식들을 보니 영락없이 제사상처럼 보였다. 내일이 생일이라 생일상을 차리는 줄 알았는데, 웬 장난이냐고 동생을 타박하는데, 밖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정월대보름이라 달집을 태우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밖에서 소리만 들려도 화들짝 놀라며 끊임없이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고, 큰아버지는 내일이 귀신날이라 집마다 귀신 쫓는 연기를 태울 것이니 다니기에 좋지 않다며 집에 있으라고 말한다. 그날 새벽, '나'는 낯선 남자를 부엌에서 발견하고 뒤쫓았지만 놓치고, 무서워하는 동생에게 그놈이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두려움을 몰아내진 못한다. 동생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게다가 이상한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신당에서 만난 수상한 남자의 정체는 뭘까. 




동해는 하품을 하고 멍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귀를 간질이는 신호음과 저 멀리 막힌 공간에서 부서지는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습관처럼 커피잔을 들어 미지근해진 커피를 들이켰다. 조금씩 시야에 뭔가가 들어왔다.

좁은 차 안, 차창 너머를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 설핏설핏 보이는 초록색 숲. 똑딱틱톡톡틱탁탁. 규칙적인 소음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쾅쾅! 동해는 갑작스러운 충격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신을 번쩍 차렸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중에서, p.237~238


일본군의 총칼에 사랑하는 외할머니를 잃은 소녀는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마적들로 인해 쑥대밭이 된 상황에 소중한 보따리를 도둑맞는다. 보따리를 찾기 위해 수상한 남자를 쫓아 기차에서 내린다.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와중에 총알이 난무하는 불 켜진 기차와 점점 멀어져 끝도 없는 숲속에 들어서게 된다. 빽빽이 들어찬 자작나무들을 붙들며 조심히 나아갔지만, 사위는 점점 어두워졌고, 눈이 쌓인 숲은 거기가 거기처럼 보인다. 결국 보따리를 되찾지만, 영원히 길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남자는 보따리에 뭐가 들었든 당장 버리라고, 그게 우릴 죽일 거라고 말하지만, 소녀에겐 소중한 것이었다. 주위엔 작고 푸른 빛들이 곳곳에 피어올랐고, 남자는 그것이 죽은 자들의 혼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두 사람은 깊은 숲속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전작들을 통해 신화와 설화 등을 현대적이고 장르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독보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던 배명은 작가의 신작이다.  초기작부터 최근 작까지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일제강점기로 시간 배경을 옮기고, 우리 나라 도깨비인 갓귀와 야강귀가 등장하고, 라푼젤에서 모티프를 얻어 측백나무와 울타리에 둘러싸인 집에서 벌어지는 공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담 너머 어둠의 세계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특히 귀신과 도깨비가 등장하는 토속 호러에 호기심이 많다. '직접적이지 않은 허구의 이야기로 안전한 두려움을 선사하는데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호러를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내면의 깊숙한 정서와 맞닿아 있어 매번 인상깊게 읽어 왔다. 초현실적인 공간과 현실적인 공간을 자유자재로 가로지르며 보여주는 공포가 익숙한 곳마저 낯설게 느껴지게 만들어 주곤 했다. 자, 환상적인 이야기로 지극히 현실적인 공포를 보여주는 배명은표 호러의 세계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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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나무
윤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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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과거의 어느 지점을 자꾸 맴돌다보면, 그 끊임없는 복기가 신비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그 파동이 저 아래 잠들어 있던 심해어들을 깨우고 결국 수면 위로 솟구치게 한다. 뒤늦게 알게 됐다. 40킬로미터를 넘어서면서부터 내가 줄곧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그건 이미 지나쳐버린 한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p.15


생존 용품 회사에서 일하는 미아는 지하철 역사에서 유실물 관리를 하는 인턴 테오와 민원인과 담당자로 처음 만난다. 생존배낭의 부속 하나를 선로에 떨어뜨려 유실물을 찾기 위해 스쳤다가, 지하철 역사를 달리는 하프코스 러닝 대회 ‘라인런’을 진행하기 위한 거래처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된다. 미아가 직접 기획한 생존배낭이 라인런의 기념품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빠듯한 일정 속에서 대회를 준비하며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누군가 내 삶으로 들어오게 되면,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이전과 같을 수 없어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액자 같은 어둠도 놀랍도록 황홀해지고, 테니스코트 바닥에 떨어진 라임색 테스트공들은 새콤한 맛이 나는 싱그러운 열매들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로 등장하는 '홍해파리'라는 존재도 매우 흥미로웠다. 홍해파리는 필요할 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외부 환경이 좋지 않다고 느끼면 성체로 살아가기를 멈추고 다시 유년기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성체 이전의 폴립 형태로 돌아가 아이가 되는, 그러고는 정말 시간을 되돌린 듯 거기서부터 현재를 다시 시작하는 거다. 생물학적으로 불사인 존재가 실제한다니 너무 신기했다. 이거 조금 홍해파리 같은 얘긴데, 이런 홍해파리 같으니라고... 그러면서 오래전 풍경들을 소환하는 것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고명처럼 쓰이곤 했다. 그렇게 시간을 쌓아가며 두 사람은 러닝 대회를 잘 마무리하고, 이제 더 편하게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생존배낭을 메고 잠든 사람이 죽는 변사 사건이 벌어지고, 미아는 그때부터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건의 여파가 번져가면서 두 사람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천국의 끝에서 낭떠러지로 향하게 된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니, 어쩌면 그게 더 슬플까. 나는 어느새 음악을 사랑으로 바꿔 부르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에 들을 음악을 남겨두듯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 사랑의 총량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고, 지금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설령 안다고 해도 나중을 위해 사랑을 남겨둘 수 있나? 사랑은 바라봄과 풍덩 사이의 낙차, 그 힘으로 나아가는 것 아닌가. 나중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모든 것은 현재형의 파도뿐.               p.155


<밤의 여행자들>로 대거상을 수상했던 윤고은 작가의 신작이다. 소설 작품들에선 기발한 상상력을 선보이고, 에세이에서는 일상의 빈틈을 다정하게 보여주었는데, 작가의 최신작들을 읽지 못해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매우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제목인 '테니스나무'라는 설정부터 흥미로웠는데, 실제로 길을 걷다 테니스코트 울타리 너머로 라임빛 열매들이 떨어져 있는 풍경을 목격했고,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공이 바닥에 떨어져 있을까 기대하게 되었다고. 공이 아니라 낙과를 찾는 마음으로 말이다. 마치 제철 과일이라도 된 것처럼. '사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기꺼이 사로잡히고 싶은 마음, 그 추동의 안팎을 살피면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극중 두 사람도 하루치의 움직임을 모두 소진한 테니스코트에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테니스공들을 보며 나무에서 방금 떨어진 싱그러운 열매들같다고 느낀다. 한 입 베어 물면 여기까지 새콤한 맛이 쫙 뻗칠 것 같지 않냐고. 그렇게 두 사람은 테니스코트 옆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테니스나무로 지정해버린다. 


찬란한 시간은 왜 순식간에 과거형이 되는 걸까. 오직 그 시절에만 포착할 수 있는 빛을 붙잡을 수가 없기에, 문학이 필요한 게 아닐까. 이 작품 속 여자와 남자의 연애 이야기처럼 말이다. 힘들 때 나를 살게 만들었던, 서로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포개었던 사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서로를 모르는 시절로 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삶에 예기치 않은 균열이 생겼을 때, 우리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되돌릴 수도, 멈춰 세울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고은 작가의 신작은 담백하게 흘러가는 짧은 분량의 이야기였지만, 뭔가 사무치는 마음이 잔상처럼 남는 그런 작품이었다. '다정한 서성임으로부터 번져나가는 찬란한 파동'이라는 작품 소개문구처럼, 잔잔하게 휘몰아치는 이야기같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이상한 사로잡힘이 시작되었다가 사그라드는', 슬프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시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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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볼딘 동물원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3
송섬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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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현재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인지 물었을 때 너는 말했지.

"이 순간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해봐. 원망도 후회도, 낙관도 비관도 없이 지금뿐인 거야. 네 마음이 진실로 원하는 것에 지금을 바쳐야 해."

좋은 말이었지만 내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현재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지 않을 수 있어? 어떻게 미래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있는 거야? 그런 건 내게 사치처럼 느껴질 뿐이야.              p.89


수진과 연서가 재회한 것은 곡 16년 만의 일이었다. 수진이 시간강사로 일하는 대학교의 테니스 강좌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서해안의 작은 도시에 위치한 기독교 계통 미션 스쿨인 멜볼딘 여자고등학교를 나왔고, 학교엔 기숙사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오랜 세월이 있었지만, 둘 다 결혼 후 이혼했고, 아이가 없다는 공통점으로 다시 가까워진다. 이제 시간과 돈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나이였기에, 여러 곳을 다니며 단짝처럼 붙어 지낸다. 16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두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한가했고, 시간과 돈도 있었으며, 운전면허와 차도 있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곧 주말 여행이 그들의 일상이 된다. 


어느 날 연서는 "우리 편지를 쓰자"라고 대뜸 제안한다. 서로에게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이는데, 부치지는 않는 거다. 그렇게 서로에게 결코 하지 않을 고백과 지난 날의 추억과 생각의 편린들이 쌓인다. 어린 시절의 기억, 유년기의 에피소드, 기숙사의 소등 시간, 중간고사와 대학 진학에 대한 고민... 그들의 수많은 고백 중에는 말한 적 없지만 들은 적은 있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재회만큼, 연서는 사라져버리고, 10년 뒤 그녀의 딸이 수진을 찾아올 때까지 시간이 흐른다. 연서의 딸 표은은 그들이 서로 부치지 않기로 약속하고 썼던 편지가 담긴 노트를 들고 수진을 찾아온다. 한 사람의 부재에서부터 비롯된 만남은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 되는데... 연서가 사라졌던 이유는 뭘까. 부치지 않은 편지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




"연서를 사랑했느냐고 물었지? 그러고 싶었지만,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인색한 사람이었어. 늘 받기만 할 뿐 돌려줄 수가 없어. 그건 저주에 가까운 일이야. 나의 부족함은 어떤 좋은 사람들을 유인해 사랑으로 착각할 만큼의 온정을 베풀게 해. 그리고 사랑과 온정은 때로 유의어거든. 그래서 난 전부 그만뒀어. 기대하는 것도, 기대하게 하는 것도."

"......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픈 이야기예요."

"맞아. 슬픈 이야기야."                   p.259~260


이야기는 동물원에서 시작해서, 다시 동물원으로 향한다. 동물들이 다 떠난 폐업 중인 동물원과 마치 화성에 있는 것처럼 어딘가 황량한 체코의 작은 도시에 있는 별로 멋지지 않은 동물원. 동물이 없는 동물원도 동물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보내지 않을 편지는 어떻게 쓰는 걸까. 다시 만나기 위해서 헤어져야 하는 관계도 있을까. 우리가 없는 우리는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아름다운 표지에 이끌려 선택한 책이었는데, 담담하면서도 밀도있는 문장들이 참 좋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 속 수진과 연서처럼 학창 시절 친구들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사회 생활을 하면서, 결혼을 하거나 아이가 생기면서... 생활 반경이 달라지고, 관심사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지고, 사이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동창회를 주기적으로 나가거나, 강제성 있는 친구들 모임이 있지 않은 이상 그렇게 서로의 삶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돌아보면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눈가와 입가에 몇개인가의 주름을 얻고, 직장이 달라지고, 집이 바뀌고, 통장 잔고가 조금 불었다가 꺼지는 동안 우리는 나이를 먹어간다. 세상 모든 것들을 공유하고, 닮고 싶었고, 동경했던 친구와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멀어지게 되더라도 하루는 반복되고, 삶은 계속된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며 시종일관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들을, 지금은 멀어진 관계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시간을 거슬러 우리가 존재했던 장면 속으로 함께 걸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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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
김유진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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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복수를 하고 싶지만 세상 한가운데에 엄마의 슬픔을 전시할 수는 없었다. 누가 이곳을 뚜껑으로 잠가 버린 것일까. 산소가 다 빠져나가는 듯 숨이 턱 막혔다. 세계는 단단히 닫혔고 뜨거운 열기만 가득했다. 엄마에게 건네려던 그 꿈과 희망은 커다란 폭죽처럼 산산이 부서져 점점이 흩어졌다. 다 타 버린 잔재물만이 허공을 떠다녔다. 엄마는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우리에게 허락된 마지막 촛불도 훅 꺼져 버렸다.            p.214~215


브레인 임상연구센터의 레지던트 4년 차 김수오는 과거 기억을 잃은 엄마와 단둘이 살아왔다. 엄마는 수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는 점을 답답해했고, 기억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기억 회복술은 비용이 비쌌고, 후원을 받을 수 있는 대기순번에서도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엄마는 선발되지 않았고, 앵커 로봇도 곧 업데이트될 거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마침 수오의 팀 교수 세 명이 다음 주 해외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열흘간 자리를 비울 참이었다. 브레인 연구센터는 다른 팀과 달리 독립적으로 움직였으니, 흔치 않은 기회였다. 기록만 잘 지운다면 은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수오는 동료인 신진서에게 도움을 부탁하고, 교수들 몰래 수술을 하기로 한다.


그렇게 수오는 엄마에게 기억 회복술을 집도하는데, 그 과정에서 엄마가 뇌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엄마는 되찾은 기억으로 인해 오히려 힘들어 하는데, 수오는 자신이 되살린 것이 참혹한 진실과 엄마의 지옥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텅 빈 기억이 엄마를 지켜 주는 가장 안전한 보호막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다. 엄마는 수술 이후 외출을 꺼렸고, 한여름인데도 긴팔과 긴바지를 고수했다. 그날 수술실 앞에서 멈췄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지금보다 덜 고통스러웠을까. 결국 수오는 엄마를 위해 암암리에 기억 제거술을 시술해 주는 의사 주경재를 찾는데, 기억을 지우는 의사와 되살리는 의사가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죽은 사람은 이제 그만 놔주시죠.”

여러 생각들로 번잡했던 머릿속이 주경재의 침과 함께 고요해졌다. 나는 순식간에 주경재에게 압도되었다. 그간 영상으로만 보던 아득한 거리감이 걷히자 전율이 솟구쳤다. 그의 손에 들린 침은 지휘자의 지휘봉이었다. 자신만의 음악적 해석과 독특한 리듬, 남다른 호흡과 신들린 손놀림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거장처럼 그는 이 수술방을 꽉 차게 만들었다. 놀랍도록 충격적인 장면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06


네스트 신경외과의 주경재는 스스로를 '뇌를 디자인하는 화가'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도려내고 새로운 기억을 채워 주는 일이 자신의 업이기에, 그것이 신의 계시처럼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능력이라고 믿었다. 정계나 재계의 거물들, 시대를 선도하는 연예인이나 명망 있는 예술가들이 병원을 찾아와 기억 제거술을 받았고, 주경재는 그들에게 기억 삽입술을 함께 권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삭제하고, 뇌의 특정 역역에 기억이나 지식을 넣는 시술은 가벼운 수술이었다. 그는 환자들의 기억들을 모아 따로 보관했고, 자신의 전리품으로 여겼다. 이야기는 김수오와 주경재의 시선으로 교차 진행된다. 기억 손질에 대한 상반된 의술을 행하며 평행선처럼 살아가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느 시점에서 교차되면서 완벽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작품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기억 회복술'과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우는 '기억 제거술'이 가능한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 피부과에서 보톡스 한 방 맞는 것처럼 병원에 들러 기억을 환기하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면 말이다. 사기나 불륜의 기억을 지우고, 뺑소니 범죄, 학교 폭력 피해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좋아하는 연예인을 가까이서 본다거나 관광 명소를 다녀온 기분 좋은 추억을 심어 주는 것이 가능하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내가 이제껏 가지고 있던 기억이 누군가가 함부로 자르고 붙인 가짜 기억이었다면 어떨까. 기억의 복원과 삭제는 꼭 필요한 것일까. 법의 테두리 밖에서 악용된다면 그걸 어떻게 막아야 하는 걸까. 이 작품은 제13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의 최우수상 수상작이다. SF적인 세계관부터 캐릭터, 플롯, 반전까지 탄탄하게 잘 쓰인 작품이다. 도파민 터지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으로 영화로 만들어져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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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문명 - 원자에서 양자컴퓨터까지, 세계를 움직이는 양자의 힘
한정훈 지음 / 김영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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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원인이 동일하면 결과 또한 동일해야 하는 것이 오랫동안 이어진 물리학적 세계관이었다. 분명 똑같은 빨간 주머니에 양자 구슬을 넣었는데 관측을 해보니 어떨 때는 빨간 주머니, 어떨 때는 파란 주머니에서 구슬이 발견된다. 게다가 어떤 관객이 어느 주머니에서 구슬을 발견할지 마술을 준비한 마술사 자신도 미리 예측할 수 없다. 이 불편한 진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게 양자 세계로 입문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다.              p.166


과거엔 물리학도에게나 흥미로웠을 양자역학의 미묘한 개념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강연과 영상이 유튜브에 넘쳐난다. 양자역학 탄생 00주년을 맞아 다양한 대중과학서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이는 우리가 양자 문명을 살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양자역학 덕분에 우리는 물질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만들 수 있으며,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망원경 너머 저 먼 우주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양자역학은 모든 현대 기술의 토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현대 과학기술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론이다. 현대 문명의 기반인 반도체, 레이저, 광통신, 내비게이션 등이 모두 양자역학의 산물이니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증기 문명과 전기 문명을 지나 '양자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양자 기술을 역사와 문명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 대단히 흥미로웠다. 양자역학은 아주 작은 세상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과학이다. 하지만 사실 아주 유명한 물리학자도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양자역학은 쉽지 않다. 그래서 양자역학을 다루고 있는 책도 많고, 나 역시 꽤 많이 읽어본 편이다. 이번에 읽은 책은 '이론물리학자가 쓴 문명의 역사'라는 점에서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저자는 양자역학의 가장 섬세하고 궁극적 측면인 중첩과 얽힘과 확률적 현실을 우리가 배우고 친해져야 할 이유는, 양자가 이미 과학을 넘어 문명의 한 단계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미 성숙한 토대 위에 놓인 증기 문명과 전기 문명에 비해 양자 문명은 아직도 발전 중이다. 




양자 얽힘 이전의 어떤 물리학 이론에서도 관찰이라는 행위와 그 결과가 물리 현상을 다루는 이론의 일부로 등장한 적은 없었다. 물리학은 관찰자의 행위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연이 제 갈길을 가는 객관적 현실을 다루는 과학이었다. 그런데 양자 얽힘에서는 관찰자가 연극의 관객이 아니라 배우로서 무대 위에 올라올 뿐 아니라 연극의 줄거리 자체를 자신의 의도대로 바꾸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인슈타인이 불만을 가질 법하다.               p.266~267


뉴턴역학이라고도 하는 고전역학의 물리적 세계관은 알고 보면 단순하다. 그 '개념의 일상성' 때문에 대중에게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반면 양자역학의 방정식에 등장하는 표현이나 개념은 일상생활에서 길러진 상식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양자역학은 원자나 그보다 훨씬 작은 세계의 현상을 설명해주는 이론인데, 그 설명에 동원된 개념이 생소하기 그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앙자역학의 핵심 개념이면서 가장 난해한 장벽이라고 할 수 있는 중첩과 얽힘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양자 연산의 본질, 양자 컴퓨터의 쓸모와 양자컴퓨터를 만드는 연구자들의 드라마틱한 여정을 보여준다. 반도체가 정보를 처리하고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세상을 넘어 그다음 문명을 견인할 만한 계산기를 만들어 낸다면, 그 주인공은 양자컴퓨터가 될 것이다. 양자컴퓨터에서는 양자역학 자체가 연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양자컴퓨터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핵심만 짚어주는 설명을 듣다보니 조금은 그 개념에 대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양자역학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의 법칙이 우리가 만지고 사용하는 모든 전자기기를 가능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양자역학이 없었다면 텔레비전, 컴퓨터, 전자레인지, 레이저, 휴대폰 등 기술시대에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도구들을 발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세계는 꽤나 난해하기로 유명하고, 그런 면에서 딱딱한 공식과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과학사를 통해 풀어내는 이 책이 그 거리를 조금은 좁혀줄 것 같다. 원자핵 에너지를 길들인 첫 번째 양자 문명부터 반도체가 정보를 처리하고 레이저가 광섬유를 통해 전달하는 디지털 사회이자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두 번째 양자 문명, 그리고 중첩과 얽힘을 활용하는 양자컴퓨터와 양자 통신이 이끌어낼 세 번째 양자 문명까지 양자의 관점에서 문명의 역사를 다시 읽어보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이 책을 통해 문명을 관통하는 양자 오디세이를 경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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