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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문명 - 원자에서 양자컴퓨터까지, 세계를 움직이는 양자의 힘
한정훈 지음 / 김영사 / 2026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불편함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원인이 동일하면 결과 또한 동일해야 하는 것이 오랫동안 이어진 물리학적 세계관이었다. 분명 똑같은 빨간 주머니에 양자 구슬을 넣었는데 관측을 해보니 어떨 때는 빨간 주머니, 어떨 때는 파란 주머니에서 구슬이 발견된다. 게다가 어떤 관객이 어느 주머니에서 구슬을 발견할지 마술을 준비한 마술사 자신도 미리 예측할 수 없다. 이 불편한 진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게 양자 세계로 입문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다. p.166
과거엔 물리학도에게나 흥미로웠을 양자역학의 미묘한 개념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강연과 영상이 유튜브에 넘쳐난다. 양자역학 탄생 00주년을 맞아 다양한 대중과학서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이는 우리가 양자 문명을 살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양자역학 덕분에 우리는 물질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만들 수 있으며,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망원경 너머 저 먼 우주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양자역학은 모든 현대 기술의 토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현대 과학기술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론이다. 현대 문명의 기반인 반도체, 레이저, 광통신, 내비게이션 등이 모두 양자역학의 산물이니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증기 문명과 전기 문명을 지나 '양자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양자 기술을 역사와 문명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 대단히 흥미로웠다. 양자역학은 아주 작은 세상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과학이다. 하지만 사실 아주 유명한 물리학자도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양자역학은 쉽지 않다. 그래서 양자역학을 다루고 있는 책도 많고, 나 역시 꽤 많이 읽어본 편이다. 이번에 읽은 책은 '이론물리학자가 쓴 문명의 역사'라는 점에서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저자는 양자역학의 가장 섬세하고 궁극적 측면인 중첩과 얽힘과 확률적 현실을 우리가 배우고 친해져야 할 이유는, 양자가 이미 과학을 넘어 문명의 한 단계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미 성숙한 토대 위에 놓인 증기 문명과 전기 문명에 비해 양자 문명은 아직도 발전 중이다.

양자 얽힘 이전의 어떤 물리학 이론에서도 관찰이라는 행위와 그 결과가 물리 현상을 다루는 이론의 일부로 등장한 적은 없었다. 물리학은 관찰자의 행위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연이 제 갈길을 가는 객관적 현실을 다루는 과학이었다. 그런데 양자 얽힘에서는 관찰자가 연극의 관객이 아니라 배우로서 무대 위에 올라올 뿐 아니라 연극의 줄거리 자체를 자신의 의도대로 바꾸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인슈타인이 불만을 가질 법하다. p.266~267
뉴턴역학이라고도 하는 고전역학의 물리적 세계관은 알고 보면 단순하다. 그 '개념의 일상성' 때문에 대중에게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반면 양자역학의 방정식에 등장하는 표현이나 개념은 일상생활에서 길러진 상식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양자역학은 원자나 그보다 훨씬 작은 세계의 현상을 설명해주는 이론인데, 그 설명에 동원된 개념이 생소하기 그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앙자역학의 핵심 개념이면서 가장 난해한 장벽이라고 할 수 있는 중첩과 얽힘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양자 연산의 본질, 양자 컴퓨터의 쓸모와 양자컴퓨터를 만드는 연구자들의 드라마틱한 여정을 보여준다. 반도체가 정보를 처리하고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세상을 넘어 그다음 문명을 견인할 만한 계산기를 만들어 낸다면, 그 주인공은 양자컴퓨터가 될 것이다. 양자컴퓨터에서는 양자역학 자체가 연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양자컴퓨터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핵심만 짚어주는 설명을 듣다보니 조금은 그 개념에 대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양자역학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의 법칙이 우리가 만지고 사용하는 모든 전자기기를 가능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양자역학이 없었다면 텔레비전, 컴퓨터, 전자레인지, 레이저, 휴대폰 등 기술시대에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도구들을 발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세계는 꽤나 난해하기로 유명하고, 그런 면에서 딱딱한 공식과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과학사를 통해 풀어내는 이 책이 그 거리를 조금은 좁혀줄 것 같다. 원자핵 에너지를 길들인 첫 번째 양자 문명부터 반도체가 정보를 처리하고 레이저가 광섬유를 통해 전달하는 디지털 사회이자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두 번째 양자 문명, 그리고 중첩과 얽힘을 활용하는 양자컴퓨터와 양자 통신이 이끌어낼 세 번째 양자 문명까지 양자의 관점에서 문명의 역사를 다시 읽어보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이 책을 통해 문명을 관통하는 양자 오디세이를 경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