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시대의 종말
비비언 고닉 지음, 홍한별 옮김 / 엘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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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탁월한 은유에는 자기 이해를 약속하는 공통의 경험이 담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 되리란 약속, 혹은 알 수 없거나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리라는 약속이, 문학에서 한때는 자연을 통해, 다음에는 신을 통해, 다음에는 사랑이라는 은유를 통해 주어졌다. 지금으로서는 사랑이 자연과 신이 갔던 길을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문학에서나 삶에서나 완전히 ‘홀로’ 던져져 표류한 채 새로운 힘을 얻게 해줄 은유적 요소를 찾으려고 우리가 쓰는 책 속을 더듬는다.                   p.27


버지니아 울프에 비견되는 문학비평, 특히 회고록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될 만큼 자전적 글쓰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 작가, 비비언 고닉을 좋아한다. 비비언 고닉 선집으로 나온 세 권도 인상깊게 읽었고, 자전적 글쓰기에 관한 책과 그외 여러 에세이들도 모두 흥미롭게 읽었다. 매번 놀랍도록 개인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독창성으로 기어코 보편성을 이끌어내고 있으니, 그야말로 자전적 글쓰기의 전범이자 고전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작품들이었다. 


엘리 북클럽 첫 번째 책이다.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비비언 고닉의 책으로 시작하게 되어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었다. 이 책은 20세기에 나온 탁월한 문학작품 속에서 사랑의 문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탐구하는 열한 편의 비평 에세이를 묶은 모음집으로 1997년에 출간되었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읽기에도 매우 동시대적이고 탁월하다. 버지니아 울프, 이디스 워턴, 조지 엘리엇, 케이트 쇼팽, 헨리 제임스, 진 리스, 샬럿 브론테, 윌라 캐더, 한나 아렌트 등 위대한 작가들의 문학작품과 삶을 들여다보며 탐구한다. '이 세 작품 모두 입안에서 비린 피 맛을 느끼는 비범한 여자가 쓴 소설이다', '이것은 문학사상 두 번째로 비범한 장면이다', ''내가 지금으로서는'이라고 말했을 때의 그 지금이 100년 전 작품에 예비되었음을 확인하고 싶다면, <크로스에이스의 다이애나>를 읽어보라'는 식의 매우 강한 어조로 단정지어 말하는 표현들이 너무도 설득력있게 느껴졌다. 간결하면서도 군더더기없고,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매우 정확하면서도 깊숙이 짚어내면서 내가 읽었던 작품조차 완전히 다른 작품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문학비평이란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구나,를 새삼 느꼈다고 해야할까. 정말 수준높은 글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책이었다. 




우리는 이야기의 한가운데로 던져진다 ─ 이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부 한꺼번에 우리에게 덮쳐 오는데 ─ 작가는 아무 힌트도 주지 않는다. 어조도 서술 시점도 작가가 누구에게 공감하는지 어떤 의도인지 드러내지 않는다. 폴릿 가족은 그냥 거기 있다. 과격하게, 압도적으로 존재하며 공기를 다 빨아들이고 공간을 전부 차지한다. 우리는 혼란과 불안을 느끼며 계속 읽는다. 조밀하고 격하고 예상을 벗어나는 구문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문장은 우리를 제자리에 붙들어 매두는 한편 글은 앞으로 마구 몰고 간다.                       p.145~146


영국에는 '불안정한' 여성 작가의 전통이 있다는 글도 흥미롭게 읽었다. 그들 작가들에 대해 고닉은 '애나 캐번은 집착을 넘어서지 못했고, 버지니아 울프는 애초부터 초월 이전 단계가 없었으며, 그 둘 사이에 진 리스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책에 수록된 진 리스의 작품에 대한 에세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닉의 글을 읽다 보면 언어와 형식에 대한 재능뿐 아니라 놀랍고 예기치 못한 결실로 이어지는 진실에 대한 감각, 사람을 매혹시키는 능력, 그리고 삶에 대해서는 나약하고 무력했지만 글쓰기에 있어서는 강인하고 솔직했던 진 리스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질 것이다. 나 역시도 이 책을 읽고 진 리스의 작품들이 다시 읽고 싶어졌으니 말이다. 


온 세상이 사랑을 믿고, 여자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사랑이 구원이며 삶의 가장 큰 성취라고 믿었던 시대는 가버렸고, 지금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정의가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닉은 이 책을 통해 “그렇게 그들은 결혼해서 평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 작품 속 사랑과 결혼, 이별과 배신의 장면들을 통해서 말이다. 비비언 고닉의 글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희미하게 짐작했던 것들을 구체화시켜서 바로 눈 앞에 들이미는 듯한 느낌을 안겨주곤 하는데, 그 명료함과 예리함, 밀도 높은 문장들을 좋아한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낼 때도 지독할 정도로 솔직하고, 어떤 미화도 없이 적나라한 방식으로 심금을 울렸었는데, 문학 비평 또한 '고르고 고른 단어를 응축해 인간 보편 경험의 핵심을 찌르는 비범함'을 보여주고 있다. 매 페이지마다 지성과 통찰이 가득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낭만적 사랑의 신화뿐 아니라 문학적 상투성 또한 두려움 없이 해체하는 비비언 고닉의 독보적인 비평 에세이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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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피의 계산에 대하여 1
솔베이 발레 지음, 손화수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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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결코 일어날 수 없고,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었던 일이 일어나 한순간에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인식이 머리를 든다. 그때 우리는 시간이 멈추고, 중력이 사라지며, 세상의 논리와 자연의 법칙이 붕괴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그리고 우리가 믿어온 세계의 지속성은 불안한 토대 위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아무런 보장도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확실하다고 여겨온 모든 것의 이면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예외, 갑작스러운 균열, 상상할 수 없는 질서의 파열이 도사리고 있다.                   p.47~48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에 사는 타라는 남편 토마스와 함께 고서적상을 하고 있다. 타라는 11월 17일에 2박 3일 예정으로 출장을 떠나 보르도 경매장을 방문하고 파리 호텔에서 묵었다. 다음날 고서점들을 들러 필요한 서적을 구입하고, 고대 화폐점을 운영하는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19일 아침, 파리의 호텔 방에서 깨어나 전날과 정확히 같은 일을 겪는다. 왜냐하면 다시 11월 18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토마스에게 11월 18일은 처음 맞이하는 날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타라는 벌써 122번째 11월 18일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오늘은 11월 18일이다. 매일 저녁, 침대에 몸을 눕힐 때와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에도 날짜는 11월 18일이다. 타라는 더 이상 자신이 11월 19일에 깨어날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남편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는 처음이자 유일한 날이었다. 이상한 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에 어떤 불규칙성이 있었다는 거다. 새로운 11월 18일이 되었을 때 어떤 것들은 사라졌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먹었던 음식은 다시 채워져 있었지만, 가방과 옷은 사라지지 않았고, 기념품 동전은 사라졌지만, 전날 구매한 책들은 그대로 있었다. 타라는 왜 반복의 순환 속에 놓여진 것일까. 왜 시간의 균열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까. 시간이 부서졌음에도 왜 날들은 계속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타라는 하루의 작동 방식을 조사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불규칙함 속에서 하루가 되돌아오는 시점을 찾으려 애쓴다. 그녀는 과연 11월 18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11월 18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어쩌다가 그 안으로 들어왔을까? 혹시 잘못된 문으로 들어온 걸까? 반복의 문으로?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출구를 찾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들어올 수 있었다면, 나갈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열리지 않는 문은 어떻게 여는 걸까? 발로 차서 부수면 될까? 뜯어내면 될까? 불을 지르면 될까?...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본다.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고. 내가 어떤 실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적절한 순간을 찾아내고, 그때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p.219


전부터 궁금했던 솔베이 발레의 작품을 드디어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솔베이 발레는 1990년대 덴마크 문학의 걸작 《법에 따르면》의 작가로 이 작품으로 30여 년 만에 세계문학계로의 복귀를 알렸다. “사변소설(SF) 장르에 있어서 시의적절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22년 북유럽의회문학상(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타임루프' 소재로 유명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 개봉하기 6년 전인 1987년에 처음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소재는 유사해보여도 막상 작품을 읽어 보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쓰인 거라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이 작품은 다양한 길이의 일기 형식으로 쓰였는데, 사실적이면서도 사색적이고, 철학적이며, 실존적인 고민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는 7부작이며 현재 5부까지 출간되었고, 1부가 2025년 국제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 국내에 출간된 것은 소설 연작의 서막을 여는 첫 두 권이다. 전체 7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를 먼저 읽어 보았다. 같은 시간을 계속 반복해 겪게 되는 '타임루프'를 소재로 한 작품은 기존에도 있어 왔지만, 솔베이 발레는 스릴과 서스펜스에는 관심이 없다. 최면에 걸린 듯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와 삶에 대한 사유를 철학적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어떻게 타임루프에서 벗어나느냐보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일까에 대한 탐구가 더 밀도있게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점점 더 이야기 속으로 훅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나선형으로 된 회오리에 점점 더 휘말리는 느낌이랄까.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무려 7부작으로 구성되었다는 거다. 당장 2권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서사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 너무 궁금하다. 부서져버린 시간, 반복되는 하루,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경험들...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는 세계, 지금 바로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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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과학자 - 우리 곁의 자연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기록한 과학의 순간들
이동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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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머릿속에 빠르게 흘러가는 생각을 남기기 위해 필기구는 펜 하나만을 단촐히 사용한다. 현장에서 관찰하며 동시에 여러 종류의 펜을 사용할 여유는 없다. 화가들이 풍경화나 정밀화를 한자리에 앉아 그리는 것과는 다르다. 생물은 빠르게 움직이고 바람과 물도 흘러간다. 순간과 변화를 기록한다. 전체보다는 부분을 스케치하기도 하며 생물의 특정 부분만 그리기도 한다. 때로는 근육의 모습을, 때로는 골격 구조를, 때로는 동공의 움직임을 말이다.                p.53


자연을 관찰하고, 분류하고, 이름 붙이는 과학자들은 왜 그림을 그렸을까. 글은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지만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에게는 전달할 수 없는 반면, 그림은 전 세계 누구에게든 보여주기만 해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기록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과학을 도왔으며, 과학은 그림을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게 했다. 과학자는 그림을 그리고, 그림은 과학자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 책은 그렇게 '과학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곤충의 변태를 최초로 증명했단 마리아 메리안부터 수많은 고대 생명체의 화석을 발굴해낸 메리 애닝, 남아메리카 탐험의 원조인 알렉산더 훔볼트, 장 앙리 파브르, 찰스 다윈, 신사임당, 정약전 등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림은 한눈에 많은 정보를 보여주기에 최적화된 방법이고, 그만큼 과학 분야에서 정보를 담고 전달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누구나 세심히 살피면 자연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관찰한 것들을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 추가되어야 한다. 수정하고, 관찰하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또 다른 눈이 열리고, 제대로 이해한 자연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학자들은 자신이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내용을 심도 있고 더 체계적으로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설프게 전하거나 왜곡된 생각을 가지면 많은 이에게 부정당하기 좋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그 과정에서 무한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이해는 인간에게 필요하다. 다른 이유는 없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수천만 년 전부터 인간은 자연의 모든 상황을 견뎌냈고, 생존해왔지만 앞으로 닥쳐올 미래가 더 걱정이다. 그에 대한 대비는 물론 사람답게 살기 위해 자연을 탐구한다.              p.282~283


곤충과 식물을 좋아하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꽃을 놓고 그린 작품이 유행해 정물화가 크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농가에서는 새로이 개발한 품종을 소개하기 위해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하곤 했고, 가장 인기 있는 식물은 단연코 튤립이었다. 어린 소녀는 튤립을 그리는 정물화가인 의붓아버지를 도와 테이블에 꽃을 배치하고 일을 하며 그림을 배워나갔다. 그녀는 그림 속의 꽃이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꽃과 함께 작은 곤충이 있으면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말이다. 농장주의 입장에서 곤충은 품종개량에 방해가 되는 절대적인 악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러한 곤충들을 그림에 그려 넣은 것이 바로 어린 소녀, 메리안이었다. 


그녀는 애벌레의 마디에 난 털, 무늬, 기문, 그리고 먹은 잎의 부위까지 면밀히 관찰하며 기록했다. 관찰을 바탕으로 꽃과 생물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그려낸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파격적인 시도였다. 마리아 메리안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그저 흉내 내고 예쁘게 보이도록 하기보다 본인이 보고 경험한 모든 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겼던 것은 생물의 형태적 특성뿐 아니라 생태학적 정보까지 담아놓은 훌륭한 연구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 책은 시대와 언어를 떠나 동식물의 도판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과 그 그림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과 현장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진화론의 선구자 찰스 다윈은 '생명의 계통수' 그림으로 역사에 영원히 남았고, 새의 실물 크기 그대로 종이에 옮긴 조류학자, 자연을 측정하고 데이터를 활용해 종이 한 장에 담아낸 과학자, 화석을 발견하고, 실험하고 분류해 그림 기록으로 남긴 고생물학자 등 그림과 과학의 만남이 시대별로 어떤 의미였는지, 또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냈는지 알게 된 시간이었다. 또한 정약전의 물고기, 남계우의 붓꽃과 나비 그림, 신사임당의 정원까지 우리나라의 자연과학자들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그림 그리는 현장 생물학자'이자 국내 1호 자연과학 책방 '동주'를 운영하는 저자는 오랜 시간 자료를 모으고, 고심 끝에 선택한 각 과학자의 그림 한 점 한 점을 보여준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흑백 기록, 수채화로 채색된 컬러 그림, 현장 스케치, 동판화가 보여주는 정교한 선, 연필과 종이는 물론 현미경, 카메라, 태블릿PC를 활용한 도구의 변화 등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지금의 자연을 미래 세대가 온전히 기억할 수 있도록 '과학 그림'을 남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정확하게 자연을 묘사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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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꼭대기를 여행하다 - 대만에서 미국까지, 수관층 생태학자의 일곱 나무 이야기
란융샹 지음, 강영희 옮김 / 사계절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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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렇게 5분쯤 지나 마침내 나무에 매달렸다. 지상에서 겨우 5~6미터 높이에 불과했지만 갑자기 시야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땅 위에 서서 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평면이던 세상이 돌연 입체가 되어 솟아오른 듯했다. 마치 전혀 다른 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이 휘몰아쳤다. 그날 밤 내내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내가 계속 올라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p.44


가지와 잎이 모여 형성하는 나무의 꼭대기층을 수관층이라고 한다. 나무는 100미터 이상 자라기도 하고,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아내기도 한다. 그러한 나무에 직접 오르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등반 기술과 인력, 예산이 필요하고, 수관층의 고유한 생태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과학 지식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 수관층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다. 이 책의 저자 란융샹은 지난 20년간 대만과 미국을 오가며 오래된 숲의 거목들에 올라 각 나무의 고유한 생태와 숲 건강에 대해 연구해온 수관층 생태학자이다. 


저자는 20년간의 연구 여정을 기록한 이 책으로 2025 대만 문학상 금전장 본상과 신인상을 동시에 수상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경이롭고 역동적인 수관층 생태학의 세계를 근사하게 펼쳐 보이는 책이었다. 





지상 5미터 높이만 해도 건물 2층 높이에 달하는데, 10미터부터 60미터가 넘는 나무에도 로프에 매달린 채 오르내리는 사진들을 보며 그 생생한 현장감에 감탄했다. 이 책은 치란산의 대만편백나무 숲에서 시작해 타타자의 대만 가문비나무 숲을 거쳐 미국 오리건주의 울창항 개솔송나무 숲과 캘리포니아주의 장엄한 자이언트세쿼이아에 이르기까지 경이로운 나무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나무 위에 머무는 매 순간 경탄과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지만, 사실 현장 작업은 그리 낭만적이지도 느긋하지도 않다는 저자는 과학자의 호기심과 모험가의 용기로 오늘도 거침없이 나무를 오르고 있다. 


물론 탐구의 과정이 항상 예상한 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조사구 안을 걷는 일은 일반적인 숲길을 산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뒤엉킨 식물들과 발을 붙잡는 진흙탕, 가로막고 선 작은 개울은 물론이고 제각각으로 쓰러진 고사목들이 끊임없이 길을 막아서는 원시림을 걷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탐구와 모험은 어딘가 낭만적인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진심을 다해 도달한 삶의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풍부한 사진들 덕분에 저자의 연구와 탐험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시간을 통과하고 나서야 나는 훈련된 두 눈으로 숲의 풍부한 세부와 그 사이의 촘촘한 연결을 선연히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꽃 한송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세계다. 꽃의 안과 밖은 모두 세계의 일부인 동시에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가을날의 따스한 햇살 속에서 이 태곳적 숲은 기꺼이 자신을 열어 나의 탐험을 허락해주었다. 숲은 과묵한 노인 같기도 하고, 두껍고 묵직한 한 권의 책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이토록 기나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p.253~254


새벽녘,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올 무렵, 높이 60미터가 넘는 상공에 앉아 있는 기분이란 어떤 걸까. 양치식물과 이끼로 뒤덮인 굵은 가지 아랫부분에 걸터앉아 우뚝 솟은 시트카가문비나무 너머 저 멀리 태평양을 바라보는 느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전날 내리 비로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이끼, 서서히 주변 세상을 비추기 시작한 황금빛 따스함,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안개, 나무 위에 한 층 한 층 그럴듯하게 자리 잡은 작디작은 숲들의 풍경에 대한 묘사를 읽고 있자니 저자에게 나무란 '온몸으로 교감한 동반자이자 삶의 고비마다 자신을 껴안아준 생명의 그물망'이라는 설명이 고스란히 와 닿았다. 인간의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다층적인 생태계가 바로 숲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말이다. 




수관층 연구의 선구자인 마거릿 로먼은 미지의 영역이라는 뜻을 담아 수관층을 ‘세계의 여덟 번째 대륙’이라 부르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미지의 세계이자 수많은 생태적 비밀을 갖고 있는 신비스러운 곳인 것 같다. 저자는 수십 미터 높이의 나무에 오르는 일에 매혹되어 수관층 연구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대만에서 수목 등반과 산림학의 기초를 익힌 뒤, 전 세계 산림학 연구의 중심인 미국 오리건주립대학교로 옮겨 가 오리건주와 캘리포니아주, 알래스카의 거목에 두루 오르며 수관층 생태학자로 성장해온 과정이 이 책에 모두 담겨 있어 매우 흥미진진했다. 대만에서 미국까지, 대만편백나무에서 시작해 개솔송나무, 귀족전나무, 자이언트세쿼이아 등을 거쳐 다시 대만삼나무까지 일곱 나무의 이야기를 토대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나무에게서 친밀함과 위안을 느낀다는 저자처럼, 이 책을 읽으며 독자들도 아마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싶다. 


서평단으로 미니 테라리움을 함께 받았다. 나만의 작은 숲이 생긴 듯한 느낌이라 책을 읽는 내내 저자와 함께 수목 등반이라는 모험을 즐기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종이 위에 박제된 파리한 지식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맞닥뜨리며 경험하게 되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나무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놀라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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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영혼의 왈츠 1~2 세트 -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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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러 번의 생을 산다고 한번 상상해 봐.」

「악몽일 거야.」

니콜라가 단박에 말을 자른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는데, 이걸 다시 시작하라고? 삶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잖아. 정말 끔찍하다.」

그녀는 카푸어 교수가 알려 준 무드라 명상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사...... 타...... 나...... 마......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 다시 태어난다.                   1권, p.299


외제니는 갑작스럽게 쓰러진 어머니로부터 오는 13일 금요일에 어둠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해 종말이 올 거라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운명의 시간이 오기 전에 해결할 방법은 과거로부터 열쇠를 찾아 종말의 신호탄이 될 불부터 꺼야 한다는 거였다. 엄마는 혼수 상태에 빠졌고, 아빠는 외제니에게 '퇴행 최면'이라는 심리 기법에 대해 알려 준다. 일종의 유도 명상인 퇴행 최면 기술을 통해 전생을 방문할 수 있으며, 과거의 여러 삶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거다. 그렇게 외제니는 선사시대의 전생을 경험하게 되고, 다른 여성의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들으며 그 감각을 통해 당시의 세계를 인식한다. 과연 그녀는 이 방대한 시간 여행을 통해 현재에 다가올 파국을 막을 수 있을까. 


현재와 전생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 스펙타클한 이야기는 인류가 불을 발견한 선사 시대의 동굴부터 시작해 사피엔스가 다른 인류종을 학살하는 과정을 거쳐 인류 문명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통과해 나간다. 아포칼립스가 일어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외제니는 세상의 종말을 막고 현재를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그녀가 전생에서 벌어지는 최초의 인종 학살 범죄를 경험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사피엔스가 거짓과 배신과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게 된 순간을 목격하며 스스로가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전생 체험은 단순히 보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겪는 것이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맛과 냄새와 소리, 느낌까지 고스란히 겪을 수 있는 그곳에서 바로 전까지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남편으로부터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이 작품 속에 전생 체험이 여러번 반복되지만, 이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해요. 내가 몇 가지 조언을 해줄 테니 꼭 기억했다 실천하도록 해요. 당신의 생각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의 말이 돼요. 당신의 말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의 행동이 돼요. 당신의 행동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의 습관이 돼요. 당신의 습관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의 성격이 돼요. 당신의 성격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 영혼의…… 운명이 돼요.」 

「반드시 기억할게요.」                         2권, p.97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죽음 이후의 세계, 전생, 기억, 자유 의지라는 자신만의 핵심 주제를 한층 더 거대한 스케일로 펼쳐 보인다. 분명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기원과 인류에 대한 통찰이 그 어떤 역사, 인문학서 못지 않게 탁월한 작품이었다. <기억>과 <꿀벌의 예언>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 작품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두 작품에서 활약한 르네가 이번 <영혼의 왈츠>에서는 딸인 외제니에게 주인공 자리를 넘겨주는데, 인물들이 작품 속에서 성장하고 세대가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플라톤의 <향연>에 언급된 '영혼의 형제'라는 개념도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외제니의 엄마는 종말이 다가온다는 경고와 함께 영혼의 형제를 만나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흔해 빠진 사랑, 외로움을 덜어 줄 사랑, 위로받기 위한 사랑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찾으라고, 너와 운명적으로 연결된 상대, 네 부족함을 보완해 줄 상대를 만나야만 비로소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본래 인간은 팔이 네 개, 다리가 네 개, 머리는 두 개, 영혼은 하나를 가진 존재로, 한 몸에 남자-여자, 남자-남자, 여자-여자, 이렇게 세 가지 조합이 가능했다. 하지만 신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결국 하나에서 둘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다시 온전한 존재로 돌아가기 위해 평생을 나머지 반쪽인 영혼의 형제를 찾는 데 바쳐야 했다. '영혼의 형제'라는 개념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극중 외제니가 자신의 '영혼의 형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부분도 매우 흥미로운 서사로 전개된다. 세상을 구하고,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줄 사랑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들은 늘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번 신작은 특히나 흥미진진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그의 압도적 상상력이 최신작에서 더욱 업그레이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놀라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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