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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피의 계산에 대하여 1
솔베이 발레 지음, 손화수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결코 일어날 수 없고,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었던 일이 일어나 한순간에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인식이 머리를 든다. 그때 우리는 시간이 멈추고, 중력이 사라지며, 세상의 논리와 자연의 법칙이 붕괴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그리고 우리가 믿어온 세계의 지속성은 불안한 토대 위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아무런 보장도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확실하다고 여겨온 모든 것의 이면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예외, 갑작스러운 균열, 상상할 수 없는 질서의 파열이 도사리고 있다. p.47~48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에 사는 타라는 남편 토마스와 함께 고서적상을 하고 있다. 타라는 11월 17일에 2박 3일 예정으로 출장을 떠나 보르도 경매장을 방문하고 파리 호텔에서 묵었다. 다음날 고서점들을 들러 필요한 서적을 구입하고, 고대 화폐점을 운영하는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19일 아침, 파리의 호텔 방에서 깨어나 전날과 정확히 같은 일을 겪는다. 왜냐하면 다시 11월 18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토마스에게 11월 18일은 처음 맞이하는 날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타라는 벌써 122번째 11월 18일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오늘은 11월 18일이다. 매일 저녁, 침대에 몸을 눕힐 때와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에도 날짜는 11월 18일이다. 타라는 더 이상 자신이 11월 19일에 깨어날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남편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는 처음이자 유일한 날이었다. 이상한 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에 어떤 불규칙성이 있었다는 거다. 새로운 11월 18일이 되었을 때 어떤 것들은 사라졌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먹었던 음식은 다시 채워져 있었지만, 가방과 옷은 사라지지 않았고, 기념품 동전은 사라졌지만, 전날 구매한 책들은 그대로 있었다. 타라는 왜 반복의 순환 속에 놓여진 것일까. 왜 시간의 균열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까. 시간이 부서졌음에도 왜 날들은 계속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타라는 하루의 작동 방식을 조사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불규칙함 속에서 하루가 되돌아오는 시점을 찾으려 애쓴다. 그녀는 과연 11월 18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11월 18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어쩌다가 그 안으로 들어왔을까? 혹시 잘못된 문으로 들어온 걸까? 반복의 문으로?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출구를 찾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들어올 수 있었다면, 나갈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열리지 않는 문은 어떻게 여는 걸까? 발로 차서 부수면 될까? 뜯어내면 될까? 불을 지르면 될까?...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본다.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고. 내가 어떤 실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적절한 순간을 찾아내고, 그때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p.219
전부터 궁금했던 솔베이 발레의 작품을 드디어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솔베이 발레는 1990년대 덴마크 문학의 걸작 《법에 따르면》의 작가로 이 작품으로 30여 년 만에 세계문학계로의 복귀를 알렸다. “사변소설(SF) 장르에 있어서 시의적절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22년 북유럽의회문학상(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타임루프' 소재로 유명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 개봉하기 6년 전인 1987년에 처음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소재는 유사해보여도 막상 작품을 읽어 보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쓰인 거라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이 작품은 다양한 길이의 일기 형식으로 쓰였는데, 사실적이면서도 사색적이고, 철학적이며, 실존적인 고민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는 7부작이며 현재 5부까지 출간되었고, 1부가 2025년 국제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 국내에 출간된 것은 소설 연작의 서막을 여는 첫 두 권이다. 전체 7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를 먼저 읽어 보았다. 같은 시간을 계속 반복해 겪게 되는 '타임루프'를 소재로 한 작품은 기존에도 있어 왔지만, 솔베이 발레는 스릴과 서스펜스에는 관심이 없다. 최면에 걸린 듯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와 삶에 대한 사유를 철학적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어떻게 타임루프에서 벗어나느냐보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일까에 대한 탐구가 더 밀도있게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점점 더 이야기 속으로 훅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나선형으로 된 회오리에 점점 더 휘말리는 느낌이랄까.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무려 7부작으로 구성되었다는 거다. 당장 2권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서사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 너무 궁금하다. 부서져버린 시간, 반복되는 하루,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경험들...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는 세계, 지금 바로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