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피의 계산에 대하여 2
솔베이 발레 지음, 손화수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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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한 해를 따라잡고 있다. 나는 1월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들을 찾아낸다. 내가 알고 있는 1월. 클레롱의 1월, 벨기에의 1월, 유럽 한가운데의 1월. 내게는 많은 눈이 필요하지 않다. 한 번은 가벼운 눈발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것을 얻었다. 나는 상점들에서 1월을 찾고, 1월의 음식들을 찾는다. 나는 수프를 먹거나 사과와 계피를 넣은 차를 마신다... 계절에 대한 수첩이 나의 사용 설명서가 되고, 나의 여행 동반자이자 안내서가 되며,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이 곧 나의 미래라는 생각을 한다.                     p.124


타라는 11월 18일이라는 시간에 갇혀 있다. 매일 아침 같은 날짜가 반복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전작에서 122번째 11월 18일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던 타라는, 어느 새 11월 18일이라는 하루를 365개를 모았다. 벌써 1년이 지난 것이다. 같은 가을의 날들을 한데 쌓아 올린다고 해서 그것이 한 해가 될 수는 없는데, 다른 날로 이어지는 통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출구는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남편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는 처음이자 유일한 날이지만, 타라에게만 똑같은 날들이 반복의 순환 속에 놓여진 것일까. 왜 시간의 균열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까. 1권에서 하루의 작동 방식을 조사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불규칙함 속에서 하루가 되돌아오는 시점을 찾으려 애썼던 타라는, 2권에서 대단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준다. 새로운 계절이 오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페리를 타고 눈이 있는 북쪽으로 겨울로 향해 간다. 1월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들을 찾아내고, 계속 북쪽으로 나아가며 2월의 추위를 향해 간다. 그리고 계절의 수첩을 정보들로 채운다. 겨울 음식을 먹고 겨울옷을 사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닌다. 그리고 봄의 징후를 찾아 돌아다니고, 봄을 향한 갈망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늦여름의 도시들을 찾아 나서고, 가을의 거리들을 생각하며 계절의 조각들을 수집하며 새로운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사실 1권을 읽을 때만 해도 당장 2권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 신기했다. 무려 7부작으로 구성된 작품인데, 대체 별다른 사건도 벌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루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7권이나 되는 책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 도착해 이미 커피를 주문해두었다. 우리는 9시에 창가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할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로마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결국은 그 이야기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가방을 든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헨리 데일,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몰랐던 것은 그 밖에도 많았다. 예를 들어 그 역시 11월의 어느 하루, 18일에 갇혀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나는 시계를 본다. 곧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가 약속 장소에 나타날 것인지.              p.282~283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는 7부작이며 현재 5부까지 출간되었고, 1부가 2025년 국제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 국내에 출간된 것은 소설 연작의 서막을 여는 첫 두 권이다. 전부터 궁금했던 솔베이 발레의 작품을 드디어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다. 솔베이 발레는 1990년대 덴마크 문학의 걸작 《법에 따르면》의 작가로 이 작품으로 30여 년 만에 세계문학계로의 복귀를 알렸다. “사변소설(SF) 장르에 있어서 시의적절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22년 북유럽의회문학상(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타임루프' 소재로 유명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 개봉하기 6년 전인 1987년에 처음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소재는 유사해보여도 막상 작품을 읽어 보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쓰인 거라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이번에 전체 7부작의 두 번째 이야기를 읽었다. 같은 시간을 계속 반복해 겪게 되는 '타임루프'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하면 일정한 패턴의 서사가 있게 마련인데, 솔베이 발레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내고 있다. 다양한 길이의 일기 형식으로 쓰였는데, #368에서 시작해 #1144까지... 거의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반복되는 11월 18월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최면에 걸린 듯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와 삶에 대한 사유를 철학적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어떻게 타임루프에서 벗어나느냐보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일까에 대한 탐구가 더 밀도있게 펼쳐진다는 점이 이 작품만의 매력이다. 표지 이미지처럼 나선형으로 된 회오리에 점점 더 휘말리는 느낌으로 서서히 이야기 속으로 잠식되는 기분일 것이다. 각권의 분량이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밀도 있는 이야기라 천천히, 깊이있게 읽어야 했다. 그렇게 그저 감탄하며 홀린듯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2권의 결말 또한 매우 충격적이다.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해서 독자들을 안달하게 하는 멋진 엔딩이었다. 자, 그래서 세 번째 이야기는 언제 나오나요?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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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바꾼 지구의 역사 - 식물과 동물, 그리고 진화의 위대한 로맨스
라일리 블랙 지음, 조정남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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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 주변 세상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우연들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자연을 좀 더 직관적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반드시 존재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과거의 대멸종과 끊임없이 일어나는 새로운 생명체들이 진화한 결과 이 세상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간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집 앞마당의 민트나무들이 왜 존재하는지, 그 근본적인 이야기들이 실은 아주 얇은 시간의 단면 속에 있다.                p.22


바람에 살랑대는 고사리와 소철 밭이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아득히 높은 침엽수가 빽빽이 솟아난 울창한 숲에서 아파토사우루스가 몇 시간째 풀을 뜯고 있다. 20미터 길이에, 20톤이나 되는 무게가 나가는 공룡의 뼈와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을 섭취해야 한다. 한낮의 열기를 잊은 공기는 시원하며, 식사를 방해할 알로사우르스도 주변에 없어 완벽하다. 목이 길고 몸이 단단한 거대 초식동물인 아파토사우루스는 그렇게 연필처럼 한 줄로 가지런한 이빨들로 쥐라기 식물을 크게 한입 베어문다. 쥐라기 후기는 따뜻하고 습했다. 연 평균 기온이 20도 정도로 매우 따뜻했다. 수백만 년 동안 세상은 끝나지 않는 여름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아파토사우르스를 비롯한 다른 초식공룡들의 촉촉하고 아삭아삭한 주식이 되어준 식물들이 풍부했던 이유도 이런 환경 덕분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라일리 블랙은 고생물학자이자 과학 저술가로 원래 티라노사우르스 렉스를 찾아다니는 일을 했다. 인내심의 한계를 매일 시험하는 화석 찾기 작업을 통해 그저 탐사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수십억 년의 지질학 역사와 식물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식물을 동물 세계의 조용한 배경쯤으로 여기지만, 사실 지구에서 식물의 역사를 떼어놓고는 우리 행성의 생명체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식물도 인간처럼 살아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마음과 감정이 없기에 생명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처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식물은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시간에 따라 성장하고, 생식세포들을 바람에 날려 이동시킬 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서로 소통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가장 놀라운 재주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우리 삶에 너무나 중요해서 우리가 그들의 삶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구와 생명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 존재가 바로 식물이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공룡과 포유류, 인간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역사 한가운데에 있었던 식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식물은 놀라울 만큼 민감한 존재다. 그래야만 했다. 팽나무 같은 나무는 평생 부리를 내린 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기에, 굶주린 초식 동물을 피하거나 힘으로 쫓아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식물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공격자를 몰아내지는 못하더라도, 수많은 입이 남긴 상처를 재빨리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진화시켜왔다. 진동을 감지하는 능력도 그중 하나다. 다른 나무들이 화학 신호를 통해 초식동물이 다가왔음을 서로 알리듯이, 진동 역시 나무에게 경고 신호가 될 수 있다.               p.183


공룡이나 다른 거대 동물들은 종종 시간을 통찰하게 한다. 이 생명체들은 너무나 거대하고 특이해서 도대체 언제 지구에 살았고 왜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생물종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면 어떻게 생겼을지, 그리고 어떤 일상생활을 누렸는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식물은 우리의 고생물학적 상상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현장에서 발굴작업을 하는 학자들도 대부분 공룡이나 다른 고대 동물들에 관심이 많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늘 그들의 진짜 모습과 일상생활이 궁금했고, 그것을 상상하려면 그 장면 안에 반드시 식물으 들어와야 했다. 식물들과 그 서식지들을 이해하면 지질시대를 관통하는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고, 자연과의 관계에도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과학책을 많이 읽는 편이라 생명과 지구의 역사, 진화의 단계, 12억년의 연대기를 다룬 수많은 책들을 만나왔다. 그럼에도 이 책은 굉장히 신선한 방식으로 쓰였기에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지구의 역사를 식물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책이기에, 우리가 그 동안 읽어온 수많은 인류와 지구의 역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장은 12억 년 전 캐나다 북극 지역에서 시작해 뉴멕시코, 유타, 콜롬비아, 남대서양, 네브라스카 등을 시대별로 거쳐 1만 5,000년 전 뉴욕주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식물과 지구의 서사로 함께 그려낸다.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당시의 시대적 풍경들을 상상력으로 풀어내고 있어 딱딱한 과학책이 아니라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책이기도 했다. 각 장이 해당 시대를 보여주는 소설처럼 시작되기 때문에 과학이 어렵게 느껴졌던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장은 모기 한마리가 주인공이고, 어떤 장은 작은 식물이, 또 어떤 장에선 공룡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진화는 동물의 역사였지만, 이 책은 그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진정한 주역이 식물이었다고 말한다. 지구의 역사를 가장 작은 존재였던 식물을 통해 읽어 내려간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각 시기별로 과거 생태계를 생생한 묘사로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마치 눈 앞에 보이는 듯한, 직접 관찰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 경이로운 지구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만나보고 싶다면, 쉽고 재미있게 진화를 다룬 과학책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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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풍주점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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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타마가 한 또 다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은 낯선 사람을 대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하지만 마음을 열기도 해야 한다는 것. 다른 동물과 달리, 사람은 먼저 호의를 보여야 상대도 마음의 문을 닫지 않기 때문이다. 또 사람은 나무에게도, 구름에게도, 산에게도 인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산이 멧돼지를 주고, 강이 물고기를 주며, 구름이 비를 내려준다고.                p.23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영특했던 소녀는 오늘 밤 집을 나갈 예정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나이든 남자에게 비싸게 팔아 넘기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함께 일하던 인부와 시비가 붙어 한쪽 팔을 잃었고, 그 이후로 소녀와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세상 전체를 원망했다. 작은 여자애가 다른 집으로 팔려 가면 어떤 일을 겪는지 보고 들어 왔기에, 소녀는 무서웠다.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잰걸음으로 달려간 소녀는 한 동굴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한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목에 고무줄이 끼인 작은 개를 구하기 위해 동굴까지 오게 되었던 거였다. 다음날 산의 양 쪽에서 소년과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소년은 소녀를 위해 서로 방향을 바꿔 나가기로 한다. 


"그러니까 우린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는 거야... 나는 네가 들어온 구멍으로 나갈게. 넌 내가 들어온 구멍으로 나가."


소년은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깊은 계곡물 같은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돕고 싶었다. 소녀가 안전한 곳에 다다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소녀는 소년의 제안에 마음이 따뜻해지며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떠나기 전 소년은 물건을 하나씩 교환하자고 말한다. 신비한 곳에서 신비한 일을 겪었을 때는 뭐든 하나 남겨둬야 안전하게 떠날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년은 아버지가 준 단도를 건넸고, 소녀는 아버지 몰래 숨겨두었던 작은 책을 건넨다. 그렇게 소녀는 해풍촌으로, 소년은 대인촌으로 서로 마을을 바꿔 도착하게 된다. 훗날 소년과 소녀가 다시 자신의 마을로 가게 되었을 때 어른들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두 마을은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강을 몇 개나 건너야 하고, 기차로 몇 정거장이나 가야 하는 곳이라 절대 동굴이 거기까지 이어질 수 없었던 거리다. 사실 인간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두 아이를 만나게 한 것은 거인이었기 대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소녀는 어른이 되어 자신을 도와주었던 소년이 살던 해풍촌을 찾는다. 다시 마주한 마을은 전과 같지 않았지만, 소년은 어린 시절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른 새벽 햇빛과 맑은 달빛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 달빛은 어느 한 부분만 비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햇빛은 온 세상 구석구석 아주 작은 틈새까지 무자비하게 파고든다. 투누흐가 뒤를 돌아보자 마을 전체와 그 뒤의 산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산의 능선을 눈으로 천천히 더듬으며 마을이 변해버렸음을 마침내 인정해야 했다. 변화란 일단 일어나면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인간이 붙잡을 수 있는 건 고작 눈앞의 그 한 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한 줌조차 온전히 쥘 수 없을 수도 있다.                 p.322~323


<도둑맞은 자전거>, <복안인>으로 만났던 우밍이 작가의 신작이다. 우밍이는 대만 최초로 맨부커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대만의 국민작가이다. 그는 이 작품 출간 후, 독립서점에 대한 응원과 지지의 마음을 담아 56일 동안 6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오가며 타이완 전역의 독립서점에서 총 86회의 북토크를 진행했다. 가오슝의 한 서점에서는 좌석이 오픈되자마자 표가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대기 수요로 인해 시스템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사랑받는 작가일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신화적 존재인 거인을 통해 현실의 벽은 높고 두꺼우며 그 앞에 선 인간은 너무도 작고 유약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는 해풍촌 사람들의 목소리로 전개되는 현실의 시간과 산의 형상으로 숨어 지내온 멸종 직전의 거인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대대로 지켜온 땅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마을 사람들의 서사와 인간과 자연을 굽어보는 신화적 존재인 거인의 이야기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얼핏 우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도시화를 목적으로 거대한 자본을 투입해 깎고 부수려는 산이 거인 그 자체이므로, 신화적 존재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인해 사라지는 자연의 목소리와도 같다. 우밍이의 작품은 서정적이고 우아한 언어로 시처럼 쓰였기에 잔잔하게 감동과 여운을 남겨주곤 했다. 개인적으로는 세 작품 중에 이번에 만난 <해풍주점>이 가장 좋았다. 거인이 소년과 소녀를 만나게 하고, 순수하고 사심없는 마음으로 두 아이가 헤어지기 전 나눈 '교환'에 깊은 감동을 받는 장면도 뭉클했다. 단 하루의 만남이 평생을 구원해줄 수 있을까. 이 책은 그에 대한 너무도 아름다운 대답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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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면, 밤이 내게 기어든다
릴라 모틀리 지음, 안현주 옮김 / 구픽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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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내가 아빠를 싫어하게 할 만한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빠가 죽었을 때, 나는 어쩌면 그것이 아빠를 더 원망하지 않은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커스처럼 카르마에 놀아나지를 아 ㄶ아서, 세상이 선악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빠를 죽여야만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건 삶이 그 어떤 일에도 이유를 전혀 알려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전의 생각이었다. 때로 아빠들은 사라지고 어린 소녀들은 다음 생일을 맞지 못하고 엄마들은 엄마이기를 잊기도 한다는 걸 배우기 전이었다.                p.113


열일곱 소녀 키아라는 오클랜드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오빠 마커스와 단둘이 살고 있다. 아빠는 병으로 돌아가셨고, 엄마는 약물 중독으로 아기를 죽게 만들었다. 과실치사로 교도소에 수감되는 대신 사회복지시설에서 지내고 있었다. 남매 모두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돌봐줄 어른 없이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다. 하지만 마커스는 래퍼라는 부질없는 꿈에만 매달리느라 집안 살림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키아라는 두 배로 오른 아파트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서지만, 열여덟이 되지 않는 미성년자를 직원으로 받아줄 곳은 없다. 우린 더이상 집세 인상을 감당할 돈이 없다고, 2주 안에 나앉게 될 거라고 말해봤자 마커스는 자신이 기회만 잡으면 큰 돈을 벌거라고 꿈 속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우연히 술에 취한 낯선 남자를 만나게 되고, 미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그 일이 벌어진다. 남자는 대가로 200달러를 주고 그날의 경험은 키아라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게 된다. 고작 몇 분의 일로 얼마나 많은 지폐를 벌 수 있는지, 이제 난 경험이 있고 다시 할 수 있다고, 그저 몸일 뿐이라고, 그 이상일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냥 집세 빚에서 우리를 꺼낼 때까지만 해보자고, 당분간만 할거라고, 이게 우리가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라고 다짐한다. 환한 거리의 불빛에서, 아침에 버는 돈을 원했던 어린 소녀가 해가 지고, 밤이 온 뒷골목에서 살기 위해 스스로를 버려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사회의 보호망이 무너진 세상에서 홀로 살아 남아야 하는 수많은 청소년들이 키아라와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가장 취약하고 비인간화된 흑인 여성이라면 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평소에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밤이 모든 걸 물들이는 방식에는 믿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더 좋은 세계일 필요는 없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곳이 좀 다를 거라 생각한다. 거기선 사람들이 좀 다르게 걷는다든가. 노래로 말을 한다든가. 어쩌면 모두 얼굴이 같거나 얼굴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하늘을 바라볼 시간이 충분할 때면, 나는 내가 운 좋게도 그 무언가를 얼핏 볼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항상 이 행성에 끌려온다.                 p.210


2022년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오프라 북클럽에 선정되고, 그해 부커상 롱리스트에 최연소 후보로 지명되었던 화제의 작품이다. 릴라 모틀리는 이 작품에서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완성도 높은 필력을 보여주는데, 실제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극중 키아라처럼 열일곱 살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열일곱 소녀가 취약하다는 것,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런 식의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매우 놀랍기 그지 없다. 2015년, 작가가 오클랜드에 사는 10대 청소년이었을 때, 실제 벌어졌던 뉴스를 토대로 이 작품이 출발했다. 오클랜드 경찰서와 해변 지역 다른 경찰서의 경찰들이 한 어린 여자애의 성적 학대에 가담하고 이를 덮으려 시도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경찰의 손에 폭력을 경험하고도 알려지지 않고, 법정에서도 서지 못한, 그리고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성매매업 종사자와 젊은 여자들의 사건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여전히 많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키아라에게 더 감정 이입하고,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권력의 횡포에 함께 분노했던 이유는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같은 사건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였다면 또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흑인 여성으로서 겪는 공포와 위험, 강제로 성인화되는 소녀들의 현실을 지켜보는 것과 함께 경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니 말이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지만 여전히 사회 주류는 백인 남성이고 수없이 많은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나라이다. 소위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인종•계층에 대한 편견과 혐오는 사회 곳곳에서 차별로써 존재하며, 수많은 범죄와 부작용을 야기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세상이, 안타깝게도 그렇다. 


헤어나올 수 없는 가난과 절망 속에서,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세계 속에서도 키아라는 옆집에 방치된 아홉 살 소년을 돌보고, 엄마와 오빠를 원망하면서도 사랑한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자신의 시선으로 받아들이며, 결코 희망을 놓지 않는 어린 소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이용하는 잔인한 세상 속 어른들의 모습이 그려지는 현실이 대비되면서 작품의 주제 의식이 더 강렬하게 와 닿았던 것 같다. 게다가 릴라 모틀리는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해서 문장이 정말 서정적이고 아름다웠는데 그래서 더 이런 현실이 슬프게 느껴졌다. 한창 세상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할 나이에, 눈에 띄지 않게 사라지는 것이 안심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어른들로부터 보호 받아야 마땅한 시기에 왜 매일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버텨내야만 한단 말인가. 우리는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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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으로 데려다줘
줄리안 맥클린 지음, 한지희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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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안톤은 대체 왜, 나를 상속인에 포함한 걸까?

빌라로 향하는 가파른 자갈길을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믿음직스러운 친구를 데려왔더라면 그의 가족들을 혼자서 감당하지 않아도 됐을까. 하지만 나는 엄마의 비밀을 누구와도 공유한 적이 없다. 이건 결국 혼자서 오롯이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p.42~43


플로리다에 사는 피오나에게 이탈리아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생부의 부고 소식과 그가 피오나에게 재산을 남겼다는 사실이었다. 피오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엄마로부터 생부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게다가 키워준 아빠와 각별했고, 그를 배신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재산이라고해봤자 사실상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상속이었다. 하지만 사지 마비 환자인 아바의 간병에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했기 때문에, 당장 이탈리아행 비행기표를 끊고 회사에 휴가를 내야 할만큼 돈이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이탈리아로 간 피오나는 유언장 공개 후 생부의 가족들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오래전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기로 한다. 


열여덟 살까지 피오나는 자신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끈끈한 가족이라고 믿고 있었다. 몸이 약해진 아빠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별별 감염에 맞서 병원을 들락날락하던 때에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뇌출혈로 엄마가 돌아가셨고, 엄마는 죽기 직전에서야 비밀을 털어놨다. 그리고 아빠는 피오나를 친자식으로 알고 있으니, 절대 진실을 말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생부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피오나는 아빠에게 비밀이 생겼고, 그제야 사람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지금, 플로리다에서 피렌체로의 여정은 예기치 못한 시련이었고, 도착해서 접하게 된 소식 또한 너무도 놀라운 이야기였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로 가득해 가시방식이 된 그곳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주어진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기에, 과거로 향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아는 거라고는 당시 엄마와 아빠가 그곳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과연 피오나는 30년 전 여름의 토스카나에 묻힌 비밀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녀를 설레게 만든 건 토스카나였을까? 아니면 이곳에 도착한 이래 내면을 변화시킬 만한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걸까? 릴리언은 이곳에 와서야 자신이 활짝 피어난 것 같았다. 그건 꽤 좋은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두려움을 내려놓았고, 경계를 풀었다. 앞으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열리는 마음의 크기만큼 상처받을 자리 역시 커질 거라는 불안감도 덤으로 딸려왔다.              p.227


갑작스러운 남편의 실종과 남겨진 아내의 이야기를 그렸던 미스터리 로맨스 <이토록 완벽한 실종>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줄리안 맥클린의 작품이다. 전작이 겹겹이 쌓인 반전들을 드러내며 차곡차곡 서사를 만들고, 로맨스와 미스터리 장르를 넘나들며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페이지 터너였기에 이번 작품도 매우 기대가 되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아름다운 토스카나를 배경으로 생부에게서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딸이 30년 전 여름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과거의 실수를 되짚어 보고 거기서 뭔가를 배우는 건 중요하다고, 그래야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극중 대사처럼 현실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겼다면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숨겨왔던 비밀을 따라가는 서사라 1986년과 2017년의 시간이 교차로 진행되고 있다. 서른 권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며 세계적으로 수백만 부가 팔린 로맨스 작가답게 이번 작품에서도 설레이는 감정들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나 토스카나의 풍경 묘사들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는데, 지금 같은 계절에 읽으면 현지의 와이너리를 거니는 듯한 기분을 물씬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녹음이 우거진 초록색 산꼭대기 위로 우뚝 솟은 중세 마을과 성, 자욱한 안개가 하얀 띠를 이룬 올리브 나무 숲과 포도밭,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 햇살을 머금은 포도 내음까지... 배경 묘사만으로 로맨틱한 분위기가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것일까.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공간에서 말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계절, 피오나와 함께 토스카나의 낭만적인 여름을 경험해보자. 여름 휴가철에 읽을 소설책을 고민 중이라면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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