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볼딘 동물원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3
송섬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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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떻게 하면 현재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인지 물었을 때 너는 말했지.

"이 순간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해봐. 원망도 후회도, 낙관도 비관도 없이 지금뿐인 거야. 네 마음이 진실로 원하는 것에 지금을 바쳐야 해."

좋은 말이었지만 내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현재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지 않을 수 있어? 어떻게 미래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있는 거야? 그런 건 내게 사치처럼 느껴질 뿐이야.              p.89


수진과 연서가 재회한 것은 곡 16년 만의 일이었다. 수진이 시간강사로 일하는 대학교의 테니스 강좌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서해안의 작은 도시에 위치한 기독교 계통 미션 스쿨인 멜볼딘 여자고등학교를 나왔고, 학교엔 기숙사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오랜 세월이 있었지만, 둘 다 결혼 후 이혼했고, 아이가 없다는 공통점으로 다시 가까워진다. 이제 시간과 돈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나이였기에, 여러 곳을 다니며 단짝처럼 붙어 지낸다. 16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두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한가했고, 시간과 돈도 있었으며, 운전면허와 차도 있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곧 주말 여행이 그들의 일상이 된다. 


어느 날 연서는 "우리 편지를 쓰자"라고 대뜸 제안한다. 서로에게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이는데, 부치지는 않는 거다. 그렇게 서로에게 결코 하지 않을 고백과 지난 날의 추억과 생각의 편린들이 쌓인다. 어린 시절의 기억, 유년기의 에피소드, 기숙사의 소등 시간, 중간고사와 대학 진학에 대한 고민... 그들의 수많은 고백 중에는 말한 적 없지만 들은 적은 있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재회만큼, 연서는 사라져버리고, 10년 뒤 그녀의 딸이 수진을 찾아올 때까지 시간이 흐른다. 연서의 딸 표은은 그들이 서로 부치지 않기로 약속하고 썼던 편지가 담긴 노트를 들고 수진을 찾아온다. 한 사람의 부재에서부터 비롯된 만남은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 되는데... 연서가 사라졌던 이유는 뭘까. 부치지 않은 편지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




"연서를 사랑했느냐고 물었지? 그러고 싶었지만,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인색한 사람이었어. 늘 받기만 할 뿐 돌려줄 수가 없어. 그건 저주에 가까운 일이야. 나의 부족함은 어떤 좋은 사람들을 유인해 사랑으로 착각할 만큼의 온정을 베풀게 해. 그리고 사랑과 온정은 때로 유의어거든. 그래서 난 전부 그만뒀어. 기대하는 것도, 기대하게 하는 것도."

"......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픈 이야기예요."

"맞아. 슬픈 이야기야."                   p.259~260


이야기는 동물원에서 시작해서, 다시 동물원으로 향한다. 동물들이 다 떠난 폐업 중인 동물원과 마치 화성에 있는 것처럼 어딘가 황량한 체코의 작은 도시에 있는 별로 멋지지 않은 동물원. 동물이 없는 동물원도 동물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보내지 않을 편지는 어떻게 쓰는 걸까. 다시 만나기 위해서 헤어져야 하는 관계도 있을까. 우리가 없는 우리는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아름다운 표지에 이끌려 선택한 책이었는데, 담담하면서도 밀도있는 문장들이 참 좋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 속 수진과 연서처럼 학창 시절 친구들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사회 생활을 하면서, 결혼을 하거나 아이가 생기면서... 생활 반경이 달라지고, 관심사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지고, 사이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동창회를 주기적으로 나가거나, 강제성 있는 친구들 모임이 있지 않은 이상 그렇게 서로의 삶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돌아보면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눈가와 입가에 몇개인가의 주름을 얻고, 직장이 달라지고, 집이 바뀌고, 통장 잔고가 조금 불었다가 꺼지는 동안 우리는 나이를 먹어간다. 세상 모든 것들을 공유하고, 닮고 싶었고, 동경했던 친구와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멀어지게 되더라도 하루는 반복되고, 삶은 계속된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며 시종일관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들을, 지금은 멀어진 관계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시간을 거슬러 우리가 존재했던 장면 속으로 함께 걸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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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
김유진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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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분노와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복수를 하고 싶지만 세상 한가운데에 엄마의 슬픔을 전시할 수는 없었다. 누가 이곳을 뚜껑으로 잠가 버린 것일까. 산소가 다 빠져나가는 듯 숨이 턱 막혔다. 세계는 단단히 닫혔고 뜨거운 열기만 가득했다. 엄마에게 건네려던 그 꿈과 희망은 커다란 폭죽처럼 산산이 부서져 점점이 흩어졌다. 다 타 버린 잔재물만이 허공을 떠다녔다. 엄마는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우리에게 허락된 마지막 촛불도 훅 꺼져 버렸다.            p.214~215


브레인 임상연구센터의 레지던트 4년 차 김수오는 과거 기억을 잃은 엄마와 단둘이 살아왔다. 엄마는 수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는 점을 답답해했고, 기억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기억 회복술은 비용이 비쌌고, 후원을 받을 수 있는 대기순번에서도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엄마는 선발되지 않았고, 앵커 로봇도 곧 업데이트될 거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마침 수오의 팀 교수 세 명이 다음 주 해외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열흘간 자리를 비울 참이었다. 브레인 연구센터는 다른 팀과 달리 독립적으로 움직였으니, 흔치 않은 기회였다. 기록만 잘 지운다면 은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수오는 동료인 신진서에게 도움을 부탁하고, 교수들 몰래 수술을 하기로 한다.


그렇게 수오는 엄마에게 기억 회복술을 집도하는데, 그 과정에서 엄마가 뇌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엄마는 되찾은 기억으로 인해 오히려 힘들어 하는데, 수오는 자신이 되살린 것이 참혹한 진실과 엄마의 지옥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텅 빈 기억이 엄마를 지켜 주는 가장 안전한 보호막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다. 엄마는 수술 이후 외출을 꺼렸고, 한여름인데도 긴팔과 긴바지를 고수했다. 그날 수술실 앞에서 멈췄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지금보다 덜 고통스러웠을까. 결국 수오는 엄마를 위해 암암리에 기억 제거술을 시술해 주는 의사 주경재를 찾는데, 기억을 지우는 의사와 되살리는 의사가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죽은 사람은 이제 그만 놔주시죠.”

여러 생각들로 번잡했던 머릿속이 주경재의 침과 함께 고요해졌다. 나는 순식간에 주경재에게 압도되었다. 그간 영상으로만 보던 아득한 거리감이 걷히자 전율이 솟구쳤다. 그의 손에 들린 침은 지휘자의 지휘봉이었다. 자신만의 음악적 해석과 독특한 리듬, 남다른 호흡과 신들린 손놀림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거장처럼 그는 이 수술방을 꽉 차게 만들었다. 놀랍도록 충격적인 장면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06


네스트 신경외과의 주경재는 스스로를 '뇌를 디자인하는 화가'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도려내고 새로운 기억을 채워 주는 일이 자신의 업이기에, 그것이 신의 계시처럼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능력이라고 믿었다. 정계나 재계의 거물들, 시대를 선도하는 연예인이나 명망 있는 예술가들이 병원을 찾아와 기억 제거술을 받았고, 주경재는 그들에게 기억 삽입술을 함께 권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삭제하고, 뇌의 특정 역역에 기억이나 지식을 넣는 시술은 가벼운 수술이었다. 그는 환자들의 기억들을 모아 따로 보관했고, 자신의 전리품으로 여겼다. 이야기는 김수오와 주경재의 시선으로 교차 진행된다. 기억 손질에 대한 상반된 의술을 행하며 평행선처럼 살아가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느 시점에서 교차되면서 완벽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작품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기억 회복술'과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우는 '기억 제거술'이 가능한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 피부과에서 보톡스 한 방 맞는 것처럼 병원에 들러 기억을 환기하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면 말이다. 사기나 불륜의 기억을 지우고, 뺑소니 범죄, 학교 폭력 피해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좋아하는 연예인을 가까이서 본다거나 관광 명소를 다녀온 기분 좋은 추억을 심어 주는 것이 가능하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내가 이제껏 가지고 있던 기억이 누군가가 함부로 자르고 붙인 가짜 기억이었다면 어떨까. 기억의 복원과 삭제는 꼭 필요한 것일까. 법의 테두리 밖에서 악용된다면 그걸 어떻게 막아야 하는 걸까. 이 작품은 제13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의 최우수상 수상작이다. SF적인 세계관부터 캐릭터, 플롯, 반전까지 탄탄하게 잘 쓰인 작품이다. 도파민 터지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으로 영화로 만들어져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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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문명 - 원자에서 양자컴퓨터까지, 세계를 움직이는 양자의 힘
한정훈 지음 / 김영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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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불편함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원인이 동일하면 결과 또한 동일해야 하는 것이 오랫동안 이어진 물리학적 세계관이었다. 분명 똑같은 빨간 주머니에 양자 구슬을 넣었는데 관측을 해보니 어떨 때는 빨간 주머니, 어떨 때는 파란 주머니에서 구슬이 발견된다. 게다가 어떤 관객이 어느 주머니에서 구슬을 발견할지 마술을 준비한 마술사 자신도 미리 예측할 수 없다. 이 불편한 진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게 양자 세계로 입문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다.              p.166


과거엔 물리학도에게나 흥미로웠을 양자역학의 미묘한 개념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강연과 영상이 유튜브에 넘쳐난다. 양자역학 탄생 00주년을 맞아 다양한 대중과학서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이는 우리가 양자 문명을 살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양자역학 덕분에 우리는 물질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만들 수 있으며,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망원경 너머 저 먼 우주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양자역학은 모든 현대 기술의 토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현대 과학기술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론이다. 현대 문명의 기반인 반도체, 레이저, 광통신, 내비게이션 등이 모두 양자역학의 산물이니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증기 문명과 전기 문명을 지나 '양자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양자 기술을 역사와 문명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 대단히 흥미로웠다. 양자역학은 아주 작은 세상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과학이다. 하지만 사실 아주 유명한 물리학자도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양자역학은 쉽지 않다. 그래서 양자역학을 다루고 있는 책도 많고, 나 역시 꽤 많이 읽어본 편이다. 이번에 읽은 책은 '이론물리학자가 쓴 문명의 역사'라는 점에서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저자는 양자역학의 가장 섬세하고 궁극적 측면인 중첩과 얽힘과 확률적 현실을 우리가 배우고 친해져야 할 이유는, 양자가 이미 과학을 넘어 문명의 한 단계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미 성숙한 토대 위에 놓인 증기 문명과 전기 문명에 비해 양자 문명은 아직도 발전 중이다. 




양자 얽힘 이전의 어떤 물리학 이론에서도 관찰이라는 행위와 그 결과가 물리 현상을 다루는 이론의 일부로 등장한 적은 없었다. 물리학은 관찰자의 행위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연이 제 갈길을 가는 객관적 현실을 다루는 과학이었다. 그런데 양자 얽힘에서는 관찰자가 연극의 관객이 아니라 배우로서 무대 위에 올라올 뿐 아니라 연극의 줄거리 자체를 자신의 의도대로 바꾸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인슈타인이 불만을 가질 법하다.               p.266~267


뉴턴역학이라고도 하는 고전역학의 물리적 세계관은 알고 보면 단순하다. 그 '개념의 일상성' 때문에 대중에게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반면 양자역학의 방정식에 등장하는 표현이나 개념은 일상생활에서 길러진 상식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양자역학은 원자나 그보다 훨씬 작은 세계의 현상을 설명해주는 이론인데, 그 설명에 동원된 개념이 생소하기 그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앙자역학의 핵심 개념이면서 가장 난해한 장벽이라고 할 수 있는 중첩과 얽힘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양자 연산의 본질, 양자 컴퓨터의 쓸모와 양자컴퓨터를 만드는 연구자들의 드라마틱한 여정을 보여준다. 반도체가 정보를 처리하고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세상을 넘어 그다음 문명을 견인할 만한 계산기를 만들어 낸다면, 그 주인공은 양자컴퓨터가 될 것이다. 양자컴퓨터에서는 양자역학 자체가 연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양자컴퓨터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핵심만 짚어주는 설명을 듣다보니 조금은 그 개념에 대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양자역학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의 법칙이 우리가 만지고 사용하는 모든 전자기기를 가능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양자역학이 없었다면 텔레비전, 컴퓨터, 전자레인지, 레이저, 휴대폰 등 기술시대에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도구들을 발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세계는 꽤나 난해하기로 유명하고, 그런 면에서 딱딱한 공식과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과학사를 통해 풀어내는 이 책이 그 거리를 조금은 좁혀줄 것 같다. 원자핵 에너지를 길들인 첫 번째 양자 문명부터 반도체가 정보를 처리하고 레이저가 광섬유를 통해 전달하는 디지털 사회이자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두 번째 양자 문명, 그리고 중첩과 얽힘을 활용하는 양자컴퓨터와 양자 통신이 이끌어낼 세 번째 양자 문명까지 양자의 관점에서 문명의 역사를 다시 읽어보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이 책을 통해 문명을 관통하는 양자 오디세이를 경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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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의 꽃말은 맥주
김지연 외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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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었든 이것은 쓰면서 내가 보게 된 또다른 '세계'이다. 쓰지 않았으면 절대로 몰랐을 세계. 그래, 정말 세상은 이상한 곳이다. 아버지가 없길 바라면서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한 것처럼. 소설이 아니고서는 이런 마음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다. 아버지도 있고, 개도 있고, 나도 있는 세계. 모두가 조금은 자신의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세계. 그런 세계가 어딘가 있을 거란 생각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살고 싶어진다.                - 장희원, '소설과 나', 중에서, p.24


여덟 소설가가 함께 만든 문학 레터 〈드문〉의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대학원 서사창작과의 선후배로 처음 만난 이들은 졸업한 뒤에도 함께 소설을 읽고 쓰며 우정을 이어왔다. 첫번째 시즌의 주제는  ‘소설과 ○○’이었다. 소설과 나, 소설과 사물, 소설과 병, 소설과 소울푸드, 소설과 야망이라는 다섯 개의 주제 아래 김지연, 김혜빈, 노은지, 박소희, 서장원, 안나, 이주영, 장희원 여덟 명의 작가가 에세이와 짧은 소설을 썼다. 차곡차곡 쌓인 글들 중에 에세이를 모아 묶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나는 어쩌다 쓰는 사람이 되었을까... 작가가 된 계기, 연애편지 대신 소설을 쓰게 된 마음,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 도전하게 되는 이유를 읽는데, 어느 순간 뭉클해졌다. '소설이 아니고서는 이런 마음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문장과 '계속 도전해도 실패하기만 하는 영역이 삶에는 꼭 필요한데, 그게 내게는 어쩌면 소설인 것 같다'는 문장을 읽으며 어쩌면 글쓰기뿐만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해당되는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지 않으면 누군가를 죽일 것 같다는 간절한 마음을 현실화 구체화시키기 위한 노력, 단 한 문장이라도 마음에 드는 문장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매일매일을 쌓아가는 시간들이 페이지마다 빼곡하다. 어떤 분야든 그렇지 않으랴. 밀린 방학숙제를 하는 것처럼 대체로 막막하고, 끝이 안 보이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버티고 쌓다 보면 아주 드물게 가슴 떨리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 그것이 어떤 대가를 감수하고서라도 좋아하는 일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괴로워도 결국에는 어떻게든 마감을 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끝에는 맥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이듯 마감의 꽃말은 맥주다. 송고 뒤 마시는 맥주는 원고의 마침표로 기능한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소설 외의 글을 쓸 때는 마감 맥주를 건너 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소설에는 예외가 없다. 소설 마감을 하고 나면 언제나 영혼이 가출해 있기 때문이다. 집 나간지 오래라는 것 외에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은 영혼을 찾아와야 한다.                - 이주영, '마감의 꽃말은 맥주' 중에서, p.211


여러 테마 중에서 '소설과 소울푸드' 코너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친구를 만나도, 중요한 모임에서도 언제나 제일 먼저 고민하는 것은 무엇을 먹을까, 요즘 뭐가 맛있다더라, 일 것이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저녁에는 뭘 먹을지 이야기하고, 카페에서 디저트는 어떤게 좋을지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이 책에 등장한 소울푸드는 떡볶이, 누룽지와 팥죽, 나물, 맥주, 순두부, 와인이다. 소설 마감을 하고 나면 가출한 영혼을 되찾기 위해 꼭 맥주를 마신다는 이주영 작가의 에피소드는 대부분 공감하지 않았을까 싶다. 바쁜 하루의 끝에서, 지친 나를 위한 선물로 시원한 맥주만한 게 또 있을까. 이주영 작가는 그렇게 맥주를 마시며 '세상에 이렇게 시원하고 고소하다니! 이게 이렇게나 맛있을 일일까! 이 맛에 마감하지, 라며 호들갑을 떤다'고 썼는데, 정말 맥주는 어른들을 위한 소울푸드가 분명한 것 같다.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 한 잔이면 피로가 싹 내려가는 듯한 기분, 다들 공감할 테니 말이다. 


소설가의 곁에 놓은 사물들을 들여다보고, 아픈 몸과 마음으로도 계속 살아가는 매일을 거치며, 음식에 깃든 기억과 마음에 공감하고,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각자의 꿈과 야망에 대해 작가들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말미에는 여덟 작가 모두와 인연이 있는 윤성희 작가의 에세이도 만날 수 있었다. 〈드문〉은 2026년 3월부터 ‘시즌 2’를 시작해, 여덟 소설가가 각자 자신만의 주제를 정해 쓴 에세이를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독자들에게 보내고 있다. 그러니 언젠가 두 번째 시즌의 글들을 모아 두 번째 책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마음, 소설을 읽는 마음, 그리고 소설이 아니고서는 다 말할 수 없었던 마음들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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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 사과
박솔뫼 외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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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떠올려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두어야 한다.                - 박솔뫼, '사과' 중에서, p.10~11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4일 출근하고 3일은 쉬었다. 그래서 1년 전부터는 역 근처 오래된 카페에서 주말에 일을 했는데, 단골 손님인 선호와 가까워진다. 선호는 세계적인 식품 가공회사에서 제품개발을 담당했는데, 커피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커피의 맛을 구현한 음료를 개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주말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이가 된다. 선호는 해외 출장을 간 사이 식물에 물 주기를 부탁하고, 애리는 선호가 없는 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왜인지 점점 더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가 출장을 다녀온 뒤 두 사람은 별다른 사건도 없이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뭐 이런 무미건조한 연애와 이별이 다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게 시작되고, 비슷하게 끝이 난다. 죽고 못살 것 같은 뜨거운 감정이 불타 올라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니며, 엄청난 계기가 있어 멀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숙소에서 지내며 열차로 출퇴근하는 여자와 부모가 사둔 바닷가 근처 건물을 세놓아 관리하는 남자는 가정 환경도, 커피를 대하는 태도같은 취향도 너무 달랐다. 남자는 여자가 길에 서서 흙이 묻은 감자를 굳이 씹어 먹는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고, 여자는 사과를 감자로 보고자 하는 사람에서 굳이 사과과 사과임을 증명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았고, 남자는 자신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라고 해서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 만한 말을 하진 않았다. 물론 그렇게 계속 연애가 이어질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두 사람은 관계를 뒤바꿀 만한 커다란 사건이 없이도 그냥 멀어진다. 두 사람 관계의 균열과 이별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슬프거나 쓸쓸하다기보다 담백하게 느껴진다. 




"나......죽으려고." 

영주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 옆에서 죽으려고.” 

영주는 가까이 다가와 땀으로 번들거리는 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하나하나 떼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영주는 잠깐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내가 죽는 순간에,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처음으로 영주가 웃었다.             장희원, '영주' 중에서, p.157


한 해 동안 발표된 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첨예하고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 작품을 조명해온 이효석문학상 올해의 수상작은 박솔뫼 작가의 <사과>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어떤 날과 어떤 날의 사이에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여전히 짐작도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쓴 소설'이라고 말했다. 익숙한 연애담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었다. 사실 잘 안다고 믿는 것들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그리고 어떤 부분은 살면서 내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믿는 경우도 생기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사과를 감자로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사과가 사과임을 증명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극중 인물의 말처럼 어떤 일들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수상작과 함께 박솔뫼 작가의 <비둘기 옮기기>라는 작품도 함께 수록되었는데, 이 작품도 참 좋았다. 일본의 문예지에서 동세대 여성 작가 세 명이 각각 부산, 대만, 도쿄와 니가타를 걸으며 마주한 도시의 풍경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기획으로 쓰인 작품이라고 한다. 여러 나라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지금 읽는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옮기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도쿄와 니카타의 풍경을 거닐며 펼쳐지는 사유를 담고 있다. 우수작품상 수상작으로 성혜령, 임솔아, 장희원, 정기현, 황시운 작가의 작품들도 함께 수록되어있다. 죽은 반려견의 유골함 처리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고등학교 시절 학교 폭력을 당했던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등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았다.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사이에서, '아주 짧은 순간 우리라고 묶일 만한 순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여섯 편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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