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감촉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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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떤 삶이 힘들다 해서 그 말이 죽음을 바란다는 뜻은 아니다. 많은 경우 삶의 반대말이 죽음은 아닌 것이다. 경선도 마찬가지였다. 육십오 년이라면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셈이었다. 거기에 무엇을 보탤 수 있을까. 남은 삶에 더 나은 것이 있으리라는 희망. 더 좋은 것을 해보고 싶다는 미련은 그다지 없었다. 지금의 내 삶과 작별하는 일이 엄청나게 아쉬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죽음이 두려웠다. 왜 그럴까. 그 이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일까.              p.64


생의 어떤 순간 불현듯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낯선 도시의 골목 안에서, 가을로 접어든 어느 날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리고 은희경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종종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의 삶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시간의 밀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만난 <시간의 감촉>은 <새의 선물>(1995), <빛의 과거>(2019)를 잇는 은희경 시간 3부작의 완결편이다. 유년기, 청장년기에 이어 이번에는 노년기의 인물들을 그린다.


60대 여성 안나와 경선은 서로에게 무심한 자매이다. 특별히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지만, 일 년 정도는 안 보고 지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사이다. 안나는 예순사다섯 살 생일을 맞이했다. 정년퇴임 이후 서울을 떠나 신도시의 아파트로 이사온 지 일 년이 조금 지났고, 온갖 동원과 참견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요즘이 편하고 좋았다. 가족이 없고 경제활동도 끝났고 빚도 없고 만날 사람도 만들지 않는 안나에게 어떤 삶이 남아 있을까. 경선은 우연히 전남편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된다. 갱년기 클리닉에서 처방받은 여성호르몬 약을 먹고 있으며,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여지껏 큰 병 없이 살아왔는데, 노화로 인해 얻게 되는 자잘한 증상들이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하다.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는 한 만나지 않는 두 사람이 조우하게 된 곳은 뜻밖에 병원이었다. 




밤의 도시 너머 먼 불빛을 바라보며 안나는 생각했다. ‘첫’은 ‘가장 오래된’이다. 안나와 경선의 ‘첫’은 점점 ‘가장 오래된’으로 수렴해간다. 경선의 말처럼 그 모든 게 다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은 매 순간이 ‘첫’이다. 안나와 경선에게도 첫 순간은 수없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경선이 틀렸다. ‘우리의 첫’에 대한 기억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             p.357


안나와 경선은 십일 개월 육 일의 차이를 두고 태어났는데, 연도로만 보면 같은 해였고 둘 다 겨울 출생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만큼 예쁜 아기였던 경선은 나이들어 받는 푸대접을 부당하게 여기는 노인이 되었다. 평범한 외모로 태어나 사람들의 무관심에 익숙했던 안나는 노인이 되어 익명의 존재가 되어가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다. 성격도, 외양도, 살아온 삶도 너무 다른 두 자매는 종양수술을 받게 된 경선을 안나가 간병하게 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병원에서 안나는 생각한다. 만약 경선이 사라진 뒤 자신만 살아남게 된다면 감당해야 할 고독이 어떨지,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기억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두려울지에 대해서 말이다. 경선은 수많은 불면의 밤과 비관주의자가 되곤 하는 아침의 침대에서 수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했지만, 그 순간에 보게 될 사람이 안나라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이제야 비로소 서로를 제대로 마주하게 된 자매의 이야기는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펼쳐진다. 


시간은 우리 몸에 숨길 수도 지울 수도 없는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몸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한때는 그토록 찬란했던 빛이었건만 이제는 덧없이 사라져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이 노년의 나이에 가장 크게 와닿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사랑은 식어 버리고, 남루하고 무정한 일상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고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이를 먹는 일이 아닐까. 작가는 '몸은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고 사랑의 꿈과 왜곡을 간직한 도서관'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그렇게 우리 몸에 남는 시간의 흔적들을 섬세하고, 다정하게 그려내고 있다. '현재가 최근이지만 가장 오래된 날이듯이', 아직 오지 않은 매 순간이 첫 순간이 된다는 설레임으로 앞으로의 시간들을 채워나가야겠다. 그리고 은희경 작가님이 오래 오래 작품을 써주시길 늘 응원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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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단백질 - 탄생, 사랑, 변신, 그리고 죽음을 순환하는 생명의 과학
샤히르 S. 리즈크.매기 M. 핑크 지음, 홍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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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전자는 세포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잠들어 있고, 어떤 유전자는 깨어나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비유하자면 모든 세포는 같은 악보를 가지고 있지만, 각자 자신에게 맞는 악기만 골라 연주한다. 그래서 세포 안의 DNA는 그 세포가 누구의 것인지를 알려주고, 세포가 실제로 만들어내는 단백질은 그 세포가 어떤 세포인지를 알려준다. 각 세포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데, DNA가 대본이라면 단백질은 그 이야기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주인공이다.             p.30


'춤추는 단백질'이라니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다. 화학과 생물학을 다루는 책의 제목치고는 지나치게 밝은 느낌이라, 더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기도 했다. 이 책은 생물학계의 라이징 스타이자 시인이며 화가인 두 저자가 생명이 순환하는 모든 순간을 분자의 언어와 아름다운 그림으로 풀어낸 것이다. 아름다운 표지 이미지를 비롯해 책에 수록된 다양한 삽화들 모두 두 저자의 작품이다. 또한 각 삽화 아래에는 고유 ID가 적혀 있는데, 단백질데이터뱅크에 등록된 고유 코드이므로 PDB 웹사이트에서 코드를 입력하면 단백질 구조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단백질의 세계는 인간의 감각 경험을 훌쩍 뛰어넘는다. 철새가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는 것은 눈 속 단백질 덕분에 지구 자기장을 색깔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개는 인간이 맡지 못하는 냄새 분자를 포착하는 후각 수용체 단백질을 수백만 개 더 가지고 있고, 문어는 피부에 분포된 단백질로 빛을 감지해 순식간에 주변 환경과 똑같은 색과 무늬로 변신한다. 물로기와 개구리가 한겨울 혹독한 추위에도 얼어 죽지 않는 것은 혈액 속 얼음 결정의 성장을 막아주는 단백질이 있기 때문이며, 뱀과 전갈은 단백질로 먹이의 신경과 근육을 순식간에 마비시키는 독을 만들어 낸다. 어떤 단백질은 식물과 박테리아에게 기억하는 능력을 부여하고, 결함 있는 단백질은 질병을 유발하거나 죽음을 초래하는 신호가 되기도 하고,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입하는 첨병이 되기도 한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소를 가졌다는 이유로 우리는 쉽게 뱀과 전갈을 독성 생물이라 부른다. 하지만 단백질 차원에서 보면 우리 인간 역시 살인병기다.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박테리아가 우리의 피부, 침, 호흡기 조직 표면에서 만들어지는 독성 단백질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생존하기 위해 죽어야 하는 세상에서 모든 생명체는 어느 정도 독성을 띠는 존재다. 삶이라는 극장에서 살인은 이야기의 줄거리이고, 단백질은 주연을 맡는다. 결국 막이 내리면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찾아오며, 그 배후에는 어김없이 단백질이 있다.                p.294~295


사실 단백질이라고 하면 보통 음식부터 떠올리게 마련이다. 운동을 할 때, 식단 관리를 할 때, 몸을 만들어야 할 때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하게 되니 말이다. 닭가슴살, 삶은 달걀, 콩, 두부 등 단백질 음식을 일부러 챙겨 먹어본 적이 있는 나로서도 단백질을 식품 성분표 기준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단백질에 대해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DNA가 생명의 설계도라면, 단백질은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다. 세포 안의 아주 작은 일꾼인 단백질은 이 땅에 존재한 모든 생명체들이 거의 모든 생물학적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그 원동력이 되어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단백질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주변 세상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깊이 관여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단백질은 우리 주위에서 매일 작은 기적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간세포 속의 효소는 독소를 무해한 분자로 바꾸고, 디펜신은 감염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며, 빛 수용체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밝혀진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모든 생명체 안에서 단백질은 역동적이고 서로 호응하며 끊임없이 미시 세계의 기적을 행하는 존재들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단순히 과학적으로 놀라운 사실들을 들려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과학과 서사를 근사하게 조화시켜 풀어내는 방식때문이다. 두 저자는 과학자인 동시에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각자의 친구와 가족과의 관계,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경험과 단백질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준 과학자들의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개인적인 서사를 풀어놓는다고 해서 에세이처럼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이야기로 시작해 결국 단백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목적인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우 수월하게 잘 읽히고, 누구나 단백질의 경이로움에 대해서 깨닫게 해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난해한 것을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이 놀라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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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성 ㅣ 책깃클래식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김재용 옮김 / 책깃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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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는 늘 겁에 질리고 위축되고 억눌리고 무시당하는 밸런시였지만, 공상 속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거침없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 스털링 일가와 주변 친척들은 그 사실을 짐작조차 못 했다. 어머니와 스티클스 고모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밸런시의 집이 두 곳, 그러니까 엘름 가에 있는 흉한 붉은 벽돌 상자 같은 집과 스페인에 있는 푸른 성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밸런시는 기억이 미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 푸른 성에서 살았다.                p.11


밸런시 스털링은 내일이면 스물아홉이지만, 어떤 남자의 고백도 받아본 적이 없는 노처녀였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란 남자를 구하는 데 실패한 사람일 뿐이라고 여기는 이웃과 친척들로 가득한 동네에 살고 있기에 밸런시의 일상은 슬프고 외로웠다.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집안에서 밸런시만 유일하게 평범한 소녀였다. 어머니는 딸이 노처녀 신세라고 평생을 매일 같이 창피해했고, 억압적이고 엄격한 대가족 틈에서 밸런시는 숨이 막혔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에게 심장병으로 인한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자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제는 하기 싫은 건 더 이상 하지 않고, 자유롭게,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현실에서는 늘 위축되고 무시당하는 밸런시였지만, 공상 속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거침없이 마음가는 대로 행동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마음속 푸른 성에 있는 밸선시의 방은, 방이라면 갖춰야 할 모든 것이 있는 곳이었다. 현실에서는 제약이 너무 많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기에 눈을 감으면 언제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푸른 성에서만큼은 자유로웠던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반기를 든 밸런시는 마을의 소문난 괴짜 바니에게 청혼을 한다. "저는 오래 살지 못해요. 어쩌면 몇 달.... 몇 주밖에 안 남았을 거예요. 전 그 시간을 제대로 살고 싶어요." 라고 말이다. 바니는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받아준다. "물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사랑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그래도 난 항상 당신이 좀 마음이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들 만의 아름다운 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과연 밸런시의 찬란한 자유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게 해줄까? 




밸런시는 갑자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영혼을 휩쓸고 가는 듯했다.

"푸른 성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오, 나의 푸른 성이에요!"

그들은 카누를 타고 노를 저어 섬으로 향했다. 일상과 익숙한 것들의 영역을 뒤로하고 신비와 마법의 영역에 도착했다.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고...... 무엇이든 진실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바니는 카누에서 밸런시를 들어 올려 어린 소나무 아래 이끼 덮인 바위에 내려놓았다.                    p.229


이 작품은 <빨강머리 앤>으로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국내에서도 엄청난 사랑을 받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작품이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숨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출간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당대의 시선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의 독자들에게 살아 있는 의미와 감동을 전하는 고전문학 시리즈'라는 목적에 정말 잘 맞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여성에게 보수적이었던 당시의 가족 문화와 사회적 규범을 통쾌하게 부수는 여성 캐릭터가 너무도 매력적이고, 몽고메리 특유의 사랑스러운 유머가 고전의 문턱을 낮춰주며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시의성있게 공감대를 만들어 줄테니 말이다. 


이번에 책깃의 고전문학 시리즈 ‘책깃클래식'이 새롭게 출간되면서, ‘여름’이라는 테마로 두 작품을 먼저 선보였다. 이디스 워튼의 <여름>과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푸른 성>, 두 작품 모두 가부장제와 사회적 규범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힌 여성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욕망을 긍정하고,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할 거야. 다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꾸며대며 살지 않겠어.“라는 극중 밸런시의 대사는 현대 여성들에게도 자유와 해방감을 고스란히 전달해준다. 현실에서는 늘 초라한 내모습이지만, 상상속 그 장소에서만큼은 자유롭고 온전히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푸른 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뭐라고 부르는지가 다를 뿐, 현실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비밀 장소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각자 자신만의 '푸른 성'을 찾아보면 어떨까. 자, 책깃의 고전문학 시리즈 ‘책깃클래식'이 앞으로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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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ㅣ 책깃클래식
이디스 워튼 지음, 김가원 옮김 / 책깃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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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달아나는 것, 그것도 지금 당장 달아나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채리티는 괴로울 때마다 낯익은 얼굴들로부터, 그녀가 잘 알려진 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녀에게는 낯선 풍경과 새로운 사람들이 기적처럼 자신의 삶을 바꾸고 쓰라린 기억을 말끔히 지워줄 것이라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충동은 지금 그녀를 사로잡은 이 냉혹한 결심에 비하면 한순간의 변덕에 지나지 않았다.                p.144


높고 탁 트인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 노스도머, 투명한 봄빛을 닮은 하늘이 은빛 햇살을 흩뿌리는 6월의 한낮이었다. 언제나 사람이 거의 없이 한적한 노스도머의 마을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는 채리티는 매사가 다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새로운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고,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조차 거의 없었다. 책꽂이에는 거미줄이 내려앉았고, 책들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으며, 채리티가 그곳에서 일하는 이유는 오직 마을을 떠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단조로웠던 어느 날 도서관에 도시에서 온 청년 하니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채리티는 자신을 데려와 키워준 후견인 변호사 로열 씨로부터 프로포즈를 받고 그를 증오하며 거절한 참이었다. 로열 씨는 채리티가 네살 때 열병을 앓던 그녀를 데려와 키워 주었다. 로열 부인은 채리티가 8살 무렵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채리티를 기숙학교에 보내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로열 씨가 반대했다.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온갖 유혹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몹시도 '외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채리티가 돈을 모아서 집을 떠나겠다고 선언을 한 뒤 그가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나와 결혼해주었으면 한다." 라고. 채리티는 경멸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거절했다. 가정부를 두는 것보다 자신과 결혼하는 게 돈이 덜 든다고 생각한 거냐며,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말이다. 




그를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 천천히 밀려왔고, 팽팽히 날이 서 있던 신경과 녹초가 된 몸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와 결혼했고, 자신과 있으면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로열 씨를 떠올리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깊은 감정의 일렁임이 그녀의 지친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p.256


사실 채리티는 간절히 원했던 일자리인 도서관 사서 업무를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 책들의 먼지도 전혀 치우지 않았고, 늘 근무 시간을 채우지 않고 퇴근을 하곤 했다. 그만큼 책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서관에 방문했던 하니가 책들 상태가 엉망이고 손을 봐야 한다고, 근무 시간에 갔는데 아무도 없었다고 불평을 한 덕분에 채리티는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처량한 기분에 휩싸이는데, 황야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온 첫 번째 존재가 기쁨이 아니라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니 말이다. 어찌저찌 해처드 부인의 호의로 다시 도서관 사서직을 맡게 되지만,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동경은 더욱 커져만 간다. 그리고 뜨거운 계절의 열기 속에서 채러티는 도시에서 온 청년 하니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해방감을 느끼며, 그와 함께 떠날 꿈을 꾸는데... 그녀의 바람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책깃의 고전문학 시리즈 ‘책깃클래식'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그 첫걸음으로 고전 로맨스 소설 두 편을 선보인다. 이디스 워튼의 <여름>과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푸른 성>이다. ‘여름’이라는 테마로 선보이는 두 작품은 가부장제와 사회적 규범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힌 여성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욕망을 긍정하고,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는지를 보여준다. 뜨거운 여름의 공기는 밝고 싱그럽기도 하지만,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가고 나면 급격하게 차가워지기도 한다. 여름의 정점이 지나면서 채리티에게 냉혹한 현실이라는 벽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계절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기도 해, 지금 읽기 딱 좋은 작품이다. 쉽게 잘 읽히는 고전 문학을 찾고 있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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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의 피아노맨 - 신해철에서 퀸까지, 스포츠의 심장을 뛰게 한 노래들
한성윤 지음 / 싱긋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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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음악은 스포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스포츠 응원가로 인기를 얻으면서 이른바 역주행하며 인기곡 반열에 오른 노래도 있다. 애니메이션 주제가 <질풍가도>는 야구장에서 널리 알려지면서 발표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삼성 라이언스 오승환의 <라젠카, 세이브 어스>를 비롯해 마무리 투수들의 등장곡은 그 자체로 상대방팀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준다. 이렇듯 음악이 없는 스포츠 응원은 상상하기 어렵다. 단순히 응원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 그 자체가 스포츠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p.7


전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 프로야구만의 특징 중 하나는 음악과 어우러진 역동적인 응원 문화일 것이다. 팀별 응원가부터 선수 개인별 등장 음악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가끔은 야구장이 아닌 집에서 보면서도 나도 모르게 응원가를 따라 부르게 될 정도로 스포츠 음악에는 중독성이 있다. 실제로 구장에서 경기를 관람할 때 음악의 역할은 더 크게 느껴진다. 지고 있을 때 등장하는 상대팀의 마무리 투수 배경음악은 어딘가 압도적인 부분이 있고, 이기고 있을 때 우리 팀의 승리 응원가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쁨을 극대화시켜 주니 말이다. 


이 책에서 30년 경력의 베테랑 스포츠 기자이자 음악 마니아인 저자는 각종 스포츠 종목에서 감동과 전율을 배가시켰던 음악들을 소개한다. 잉글랜드의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기사 작위를 수여받을 때 흘러나온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골든>, 리그 최고의 선수보다는 최고를 위해 도전하는 선수를 위해 쓰였던 체리필터의 <오리 날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마지막 올스타전에서 직접 열창한 머라이어 캐리의 <히어로>, LG트윈스와 키움 히어로즈가 가사만 바꿔 함께 사용하는 안드레아 보첼리의 <멜로드라마>, 야구의 인기를 바탕으로 농구장에서도 대표적인 응원가가 된 <질풍가도>, 월드시리즈가 열리던 야구장에서 5만여 관중들에게 울려퍼지던 빌리 조엘의 <피아노 맨> 등 우리가 열광한 순간을 함께한 39곡의 플레이리스트가 펼쳐져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대한민국 축구에 <오 필승 코리아>가 있다면 잉글랜드 축구에는 집으로 온다로 대표되는 노래 <스리 라이언스>가 있다. <오 필승 코리아>가 승리의 염원을 담은 희망적인 노래라면 <스리 라이언스>는 과거 잉글랜드 축구의 영광의 시절에 대한 추억부터 오랫동안 암흑기에 빠져 있던 절망적인 상황, 그리고 새롭게 우승에 대한 염원까지 담은 국민가요라고 할 수 있다...'우승컵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가사를 세계 언론이 주요 화제로 다루면서 <스리 라이언스>는 더욱 유명해졌으며 대한민국 뉴스에서도 이런 잉글랜드 팬들의 모습을 자주 보도했다.                p.235~237


스포츠에서는 누구나 실패를 경험한다. 오타니 쇼헤이 같은 뛰어난 타자라도 타석에 들어섰을 때 열 번 중 여섯 번은 범타로 물어난다. 역새 최고의 슈터 스테븐 커리의 3점 슛 성공률은 50퍼센트를 넘지 못한다. 축구 황제 리어넬 메시라도 득점 기회에서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피겨스케이팅 여왕 김연아도 점프 연습을 하면서 수천 번을 넘어져야 했다. 스포츠를 하면서 거듭 실패를 하고, 좌절을 맛보는 것은 모두 빛나는 성취를 위한 필수과정인 것이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넘어지고, 실패하고, 절망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순간에 위로가 되는 노래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시원스럽게 울려 퍼지는 노래 가사로 인해 위로를 받아본 적, 힘을 얻어본 적이 누구나 한번쯤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은 퀸의 〈위 아 더 챔피언스〉가 어떻게 한국 프로야구 우승의 상징곡이 되었는지, ‘역설의 응원가’였던 한화 이글스의 〈나는 행복합니다〉가 2025년 정규 시즌 2위라는 기적을 만나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대학가요제의 전설에서 야구장의 고전이 된 〈그대에게〉, 세대를 거슬러 역주행한 〈질풍가도〉 등 스포츠를 즐겨 본다면 한번쯤 들어봤거나 사랑했을 음악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순히 응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승부를 완성하는 스포츠의 일부가 된 음악의 세계는 추억과 감동을 완성시켜준다. 게다가 스포츠와 음악의 상관관계에서 시작해 생생한 스포츠 현장과 선수에 얽힌 음악적 서사가 담겨 있고, 각 에피소드에 QR코드를 삽입해 당시 경기 영상과 음악을 바로 감상할 수도 있다. 스포츠와 음악을 사랑한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보물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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