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책깃클래식
이디스 워튼 지음, 김가원 옮김 / 책깃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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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문득 달아나는 것, 그것도 지금 당장 달아나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채리티는 괴로울 때마다 낯익은 얼굴들로부터, 그녀가 잘 알려진 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녀에게는 낯선 풍경과 새로운 사람들이 기적처럼 자신의 삶을 바꾸고 쓰라린 기억을 말끔히 지워줄 것이라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충동은 지금 그녀를 사로잡은 이 냉혹한 결심에 비하면 한순간의 변덕에 지나지 않았다.                p.144


높고 탁 트인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 노스도머, 투명한 봄빛을 닮은 하늘이 은빛 햇살을 흩뿌리는 6월의 한낮이었다. 언제나 사람이 거의 없이 한적한 노스도머의 마을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는 채리티는 매사가 다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새로운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고,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조차 거의 없었다. 책꽂이에는 거미줄이 내려앉았고, 책들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으며, 채리티가 그곳에서 일하는 이유는 오직 마을을 떠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단조로웠던 어느 날 도서관에 도시에서 온 청년 하니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채리티는 자신을 데려와 키워준 후견인 변호사 로열 씨로부터 프로포즈를 받고 그를 증오하며 거절한 참이었다. 로열 씨는 채리티가 네살 때 열병을 앓던 그녀를 데려와 키워 주었다. 로열 부인은 채리티가 8살 무렵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채리티를 기숙학교에 보내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로열 씨가 반대했다.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온갖 유혹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몹시도 '외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채리티가 돈을 모아서 집을 떠나겠다고 선언을 한 뒤 그가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나와 결혼해주었으면 한다." 라고. 채리티는 경멸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거절했다. 가정부를 두는 것보다 자신과 결혼하는 게 돈이 덜 든다고 생각한 거냐며,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말이다. 




그를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 천천히 밀려왔고, 팽팽히 날이 서 있던 신경과 녹초가 된 몸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와 결혼했고, 자신과 있으면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로열 씨를 떠올리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깊은 감정의 일렁임이 그녀의 지친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p.256


사실 채리티는 간절히 원했던 일자리인 도서관 사서 업무를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 책들의 먼지도 전혀 치우지 않았고, 늘 근무 시간을 채우지 않고 퇴근을 하곤 했다. 그만큼 책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서관에 방문했던 하니가 책들 상태가 엉망이고 손을 봐야 한다고, 근무 시간에 갔는데 아무도 없었다고 불평을 한 덕분에 채리티는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처량한 기분에 휩싸이는데, 황야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온 첫 번째 존재가 기쁨이 아니라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니 말이다. 어찌저찌 해처드 부인의 호의로 다시 도서관 사서직을 맡게 되지만,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동경은 더욱 커져만 간다. 그리고 뜨거운 계절의 열기 속에서 채러티는 도시에서 온 청년 하니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해방감을 느끼며, 그와 함께 떠날 꿈을 꾸는데... 그녀의 바람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책깃의 고전문학 시리즈 ‘책깃클래식'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그 첫걸음으로 고전 로맨스 소설 두 편을 선보인다. 이디스 워튼의 <여름>과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푸른 성>이다. ‘여름’이라는 테마로 선보이는 두 작품은 가부장제와 사회적 규범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힌 여성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욕망을 긍정하고,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는지를 보여준다. 뜨거운 여름의 공기는 밝고 싱그럽기도 하지만,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가고 나면 급격하게 차가워지기도 한다. 여름의 정점이 지나면서 채리티에게 냉혹한 현실이라는 벽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계절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기도 해, 지금 읽기 딱 좋은 작품이다. 쉽게 잘 읽히는 고전 문학을 찾고 있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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