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4 ˝왜 서울에선 친구들끼리 미리 약속을 하지 않는 걸까? 만나고 싶은 사람일수록 미리 약속을 잡아 확실히 해두고 그 약속을 기대하는 시간을 갖고 싶은데. 다정한 약속일수록 연약하다. 정말로 왜 그럴까?˝ 역시 약속은 다정이 아니라 매정해야 지켜지는 법. 저기 담에 봐 하고 손 흔들며 지나가는 친구가 있고, 다이어리 펼친 채 언제 봐. 하고 쫓아가는 친구가 있다고 하자. 속는 셈 치고 한번만 더믿어주시라. 돌아보면 그 친구, 내 얼굴일 수 있게 내 용써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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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2 여자에겐 부쩍 늘어난 블랙헤드와 다크서클이 하루 종일 우울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가 우울해도 당신 탓이 아니니 너무 의기소침해지지 말 것. 단, 그녀가 우울해하는 것이 당신 탓일 수도 있으니 너무 마음 놓지는 말 것. 대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간단하다. 그냥 그녀를 안아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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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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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2년 봄부터 1986 2월까지 약 사 년에 걸쳐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 연재한 글이다. 한 달에 한두 번 <넘버>에서 미국 잡지며 신문, 그러니까 에스콰이어 ,뉴요커, 라이프, 피플, 뉴욕, 롤링스톤 등의 잡지와 뉴욕타임스 일요판을 왕창 보내준다. 그럼 하루키는 뒹굴 거리며 잡지 페이지를 넘기다, 재미있을 법한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그걸 정리하여 원고를 썼다고 한다. 스크랩북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신문, 잡지 따위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오린 것을 보관하기 위하여 책처럼 만든 것이라는 걸 기억해본다면, 이 책은 말 그대로 하루키의 스크랩북이 된다. 그는 이 책을 이런 식으로 읽으라고 말한다.

이 스크랩북은 문자 그대로 잡탕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맞아, 맞아, 이런 일도 있었지" 라든가 "오오, 이런 일이" 하는 식으로 마음 편하게 '가까운 과거 여행'을 즐겨주신다면 나로서는 더없이 기쁠 것이다.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내가 스크랩한 글은 대부분이 어찌 되든 아무 상관없는 사소한 화제뿐이다. 다 읽고 나면 시야가 넓어진다거나 인간성이 좋아진다거나 그런 유의 것이 아니다.

책을 읽기에 가장 나쁜 자세와 시간대에 읽더라도 부담없이 아무 페이지나 들춰서 킥킥거리며 웃거나, 과거를 추억하는 향수에 젖을 수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하루키의 작품은 단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장편 소설의 경우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에세이는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만족감을 준다. 그냥 가볍게, 별 생각 없이 흘려 읽더라도, 혹은 진지하게 읽어도 재미있을 수밖에 없도록 글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대를 추억하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을 읽다 보면 1980년대 겪지 않은 세대라고 하더라도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하고 색다른 사실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시절을 겪은 세대라면 더할 나위 없이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행복한 순간이 될 테고 말이다. 그리고 에세이라는 것의 특성상 저자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하루키가 '스타워즈-제다이의 귀환'을 세 번이나 본 스타워즈 예찬론자라는 것도 알게 되고, 스티븐 킹의 팬이지만 그의 작품 중에 '쿠조'는 좀 지루했다는 것도 알게 되니 말이다. 그의 거침없는 입담으로 펼쳐지는 다소 민망한 기사거리들에 대한 감상이나 의견 또한 매우 흥미진진하다.

 

내가 어렸을 적에 한참 스크랩 북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주로 배우나 가수들의 스티커나 화보, 기사들을 모아서 만드는 거였는데, 누가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는 지에 따라 아이들 사이에선 일종의 권력(?) 가질 수도 있을 정도였다. 문구점 곳곳에 브로마이드며, 각종 스티커 북이며 사진들이 즐비했고, 잡지의 종류도 천차만별 참 많던 시절이었다. 나중에는 국내 잡지만으로는 모자라서, 수입 잡지까지 구해가며 열심히 스크랩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한참 연예인에게 열을 올리던 시절이 지나고 나서는 주로 좋아하는 글을 쓰는 기자의 기사를 스크랩하곤 했었다. 지금은 모 잡지사의 편집장이 되신 분이 여기 저기 쓰셨던 글도 있고, 지금은 영화 감독이 되신 분이 평론가로, 에디터로 쓰셨던 기사들도 있다. 그렇게 모았던 글들은 지금도 꽤 많은 분량으로 책장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데, 가끔 들춰서 읽어보면 그 시간들이 떠올라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스크랩북의 장점은 바로 이것이다. 시간을 붙들어 놓는다는 것.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선풍적으로 인기를 끈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모두들 한 번쯤은 과거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 반짝반짝 빛나던 시기가 있었는데.라며 과거를 추억 해야 하는 어른이 된 우리에게 이만한 선물이 또 어디이겠는가.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처럼 과거로 여행을 할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하루키의 <더 스크랩>도 같은 명목에서 독자들에게 비슷한 여파를 미치지 않을까 싶다. 책을 구매하면 주는 스크랩북으로 예전 기억을 떠올려봐도 좋을 것 같고 말이다. 시간을 멈추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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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비경 - 신의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전국 22개 로스팅 하우스
양선희 지음, 원종경 사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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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 있는 ''이라는 카페에 가면 이렇게 선반에 잘 볶인 갈색의 원두가 들어 있는 유리병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이 병들을 자세히 보면 숫자가 적혀 있다.. 4.3, 4.6, 3.29, 4.6, 3.28, 4.3.. 이 숫자들은 뭘까?

 

"손님들이 여기 와서 '맛있는 커피 주세요!' 했을 때 최소한 볶은 지 일주일 이상 지난 것을 주기 위해 적어 둔 로스팅 날짜예요. 로스팅 한 지 20일까지도 맛은 나와요. 물론 약하게 볶은 건 하루 이틀 더 가지만요. 그런데 18~19일 지나면 향기가 미세하게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볶은지 15일 이상 지난 건 뺍니다."

"그럼 그건 방향제로 쓰나요?"

"운 좋은 손님들이 향기를 얻어가지요."

 

와우. 나는 이 대사를 읽는 순간 강원도의 그곳에 직접 가보고 싶어졌다. 갓 로스팅 된 원두로 내린 커피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유의 향기가 있다. 그런데 눈만 돌려도 숱하게 마주치는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의 원두들은 모두 로스팅한 지 한참은 된 게 분명한 향과 맛을 내니까. 하지만 도심지에서 어디 그리 쉽게 이런 집을 만날 수 있냐는 말이다. 서울을 벗어나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커피 명소를 발굴한 이 책에는 정말 '명품'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커피 하우스 스물 두 곳이 소개되어 있다. 저자인 양선희 작가가 온라인 매거진커피 타임즈를 운영하며 2년여의 기간 동안 100여 곳이 넘는 커피 하우스를 발로 뛰며 직접 취재해 그 중에 스물 두 곳을 골랐다고 하니 뭐 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부산에 있는 '까사오로의 주인인 정승기 씨는 마인드가 독특하다. 커피는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음료이기 때문에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일도 행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향기로운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 '까사오로'의 커피라고 하니, 꼭 한번은 마셔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마음이 있는 커피랑 마음이 없는 커피랑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저는 기분이 우울할 때나 몸이 아플 때는 드립을 안 해요. 제 몸과 마음 상태가 안 좋으면 은수가 드립을 하고, 은수 몸이나 마음 상태가 안 좋으면 제가 드립을 해요."

 

세상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주인이 내려주는 커피라니. 얼마나 황홀하고 깊은 향과 맛을 낼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이다. 사실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원두, 로스팅 등 커피 그 자체의 맛이 전부는 아니다. <모든 것이 동일한 조건일 때 그 집의 커피 맛을 결정짓는 건 그 커피 집 주인의 품성이라고 봐. 특히 그 집에서 커피를 볶고, 핸드 드립을 하는 경우에는 그 점이 커피 맛의 99% 결정한다고 봐. 나머지 1%는 그 집의 분위기겠지>라는 대목처럼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좋은 마음과 긍정적인 감정 상태가 과연 커피의 맛까지 다르게 할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커피의 맛을 음미하면서 마셔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에 커피라는 음료를 마시면 안 되는 그 나이에,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이렇게 쓴 걸 왜 먹냐고. 엄마가 그때 농담처럼 말했었다.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라고. 인생의 여러 면을 겪어본 다음에 어른이 되어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는 음식이 있는 거라고. 어릴 때는 하면 안 된다.는 금기에 대해 다소의 반항 심같은 것도 있었으므로, 그냥 둘러대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커피가 점점 더 맛있게 느껴지면 질수록, 어쩐지 어린 시절 엄마의 그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 내가 인생의 쓴맛, 단맛을 어느 정도는 겪었기 때문에, 이렇게 쓴 커피가 달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겠다. 뭐 이런 생각 말이다. 지금도 친구들 중에는 아메리카노는 써서 못 먹겠다고, 그 쓴 걸 무슨 맛으로 먹냐며 카페라떼나 마끼아또 등 단 커피만 먹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아메리카노에 쓴 맛만 있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속에는 깊은 풍미와 향과 그윽한 맛이 숨어져 있다.

 

나는 하루에 아메리카노 두세 잔은 꼭 마셔야 하는 소위 커피 중독자이다. 커피 드리퍼도 종류 별로 서너 가지 가지고 있고, 집에 에스프레소 머신도 있을 만큼 커피를 즐겨 마시는데, 덕분에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두통이 생길 정도이다. 워낙 오랜 시간, 다양한 원두를, 다양한 방법으로 마셔보았기 때문에 어떤 집의 커피가 신맛이 강하고, 향이 좋고, 끝 맛이 텁텁하고, 단맛이 나는지 안다. 하지만 집과 회사를 오가는, 그러니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도심지에는 이런 커피 맛 집이 사실 없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프랜차이즈 전문점 밖에 없어서, 이렇게 책으로나마 멋진 커피 전문점들을 소개받게 되어서 참 행복했다. 아마도 이번 여름 휴가 때는 이 책에 소개된 집 중에 한 곳을 가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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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3-05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곳은 부암동 고개에 에소프레소 라는 집이거든요.. 그 집 커피도 2층에서 직접 볶아서 신선하더라구요.. 아시고 계실 것 같긴 한데, 혹 또 몰라서.. ~~

저도 커피 중독이라서요. 하루에 아메리카노 7잔.. ~~ 중독이죠.. ㅠㅠ

피오나 2014-03-07 17:16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부암동 고개에 가봐야겠습니다. ㅎㅎ 동선이 정해져있다보니.. 강남권을 벗어날 일이 별로 없어서요. 커피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사실 맛집에 자주 가보진 못했어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근데 새벽숲길님은 저보다 훨씬 마니아시네요. 하루에 7잔이면...... ^^;;;;;;;
 
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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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걸을 필요가 있다. 걷다 보면 단어들이 떠오르고, 머릿속에서 그것들을 쓰면서 단어들의 리듬을 들을 수 있다. 한 발 앞으로,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심장이 이중으로 두근두근 뛴다. 두 개의 눈, 두 개의 귀, 두 개의 팔, 두 개의 발. 이것 다음에 저것. 저것 다음에 또 이것. 글쓰기는 육체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몸의 음악이다. 단어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글쓰기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단어들의 음악은 의미가 시작하는 곳이다.

 

이 작품은 예순네 살의 작가 폴 오스터가 그 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자서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올해로 벌써 그도 예순일곱이니 노 작가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는 여전히 이렇게 치열하게 글을 쓰고 있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다 읽었지만, 매번 한번도 같은 스타일을 복기 하지 않는, 그렇지만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서 매번 신작을 읽을 때마다 나는 가벼운 흥분을 느낀다. 특히나 이 작품은 매우 독특한 형식을 띠고 있어, 자서전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일기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에서 의미가 있었던 사건들을 감각적 경험의 기억을 통해 복기해낸다. 그러니까 호흡의 현상학으로 들여다본 폴 오스터의 인생이야기인 셈이다. 머리는 잊어도 몸은 기억한다.는 명제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만큼 육체가 기억하는 흔적은 오래 남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다이앤 애커먼의 <감각의 박물학>에 보면 세상이 얼마나 황홀하게 감각적인지, 그리고 감각이라는 레이더망을 통하지 않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는지 알게 된다.  우리의 오감,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시각 등에 대한 여러 가지 기술이 되어 있는 이 책이 문득 떠올랐다. 냄새, 소리 등의 감각은 우리를 순식간에 과거의 시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전 애인의 향수 냄새가 그를 떠올리게 하고, 귀에 익은 노래가 나를 그 시간 속으로 옮겨 놓는다. 그렇게 우리의 몸과 감각은 머리 속의 기억들을 헤집어 놓는다. 그렇게 육체에 새겨진 경험은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을 지배한다. 어떤 향기가 순간적으로 스쳐갈 때, 그것은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도 할 수 있고, 달콤한 요리를 먹던 저녁 식사시간으로 데려다 놓기도 한다. 셜록 홈즈의 <바스커빌 가의 개>에서는 한 여성을 편지지의 냄새로 알아보는 장면이 나오며, 수사관이라면 일흔 아흡 가지 향수의 냄새 정도는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목이 있다. 나는 특히 새 책의 종이 냄새나, 석유 내가 아직 가시지 않은 인쇄물의 냄새, 오래된 종이의 낡은 냄새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도서관에서, 서점에서 책에 얽힌 갖가지 추억들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는 그 감각 중에서 성적 쾌감과 고통의 기억을 샅샅이 복기한다. 본능에 충실한 그의 경험은 적나라하게 독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가 육체와 감각을 통해 써 내려간 자신의 과거는 기나긴 성적 탐험의 역사를 거쳐 가족사의 어둡고 아픈 부분까지 모두 담고 있다. 굳이 이런 거까지 밝힐 필요가 있나 싶은 부분까지 모두. 어쩌면 스스로를 2인칭으로 묘사하는 관찰자 시점으로 쓰인 작품이라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겨울로 들어선 노 작가가 떠올리는 그 삶의 편린들은, 어떤 순간에는 고통스럽고, 어떤 순간에는 민망하고, 어떤 순간에는 따뜻하다.

 

당신은 <옛날이 좋았지>라는 말을 싫어한다. 문득 향수에 젖어 지금보다 삶을 더 낫게 만들어 준 것만 같은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데 슬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면 스스로에게 당장 그만두고 잘 생각해 보라고, 지금을 볼 때와 같이 그때를 정밀하게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오래지 않아 당신은 그때와 지금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럼에도,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해도 그가 지나간 세월에서 그리워하는 것이 있긴 하다. 옛날 전화기의 벨 소리, 타자기의 딸깍 거리는 소리, 병에 든 우유, 지명 타자가 없는 야구, 비닐 레코드 판, 방수용 덧신, 스타킹과 가터벨트, 흑백 영화, 헤비급 챔피언, 브루클린 다저스와 뉴욕 자이언츠, 35센트짜리 페이퍼백.... 나는 그의 그리움 속에서, 그의 지나온 시간을 읽어낸다. 그리하여 침대에서 나와 차가운 마룻바닥에 맨발을 내딛고 창문 쪽으로 걸어가는 여섯 살의 그로 시작해서, 다시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걸어가면서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맨발의 그는 이제 예순네 살이다. 여섯 살 그의 시선으로 바깥에서 내리던 눈이 뒷마당의 나뭇가지들을 하얗게 바꿔졌다면, 이제 바깥은 거의 흰색에 가깝지만 완연한 회색이다. 해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자문한다. 몇 번의 아침이 남았을까? 그의 인생은 이제 겨울로 들어섰다. 계절이 지나갔으므로, 어떤 문은 이제 완전히 닫혀버렸다. 그러나 또 다른 문이 열릴 것이다. <당신은 그런 일이 당신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일어날 리 없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도 당신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일이 우리 모두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누구도 시간의 무게를 피해갈 수는 없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통과한다.

 

폴 오스터는 <당신이 살아 있음을 기억할 수 있는 첫날부터 오늘까지 이 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그 감각적 자료들의 모음을 '호흡의 현상학'이라고 지칭한다. 숨을 쉬는 육체의 감각에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영향을 미친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 그리고 그 교차점에서 자신을 규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폴 오스터만이 써 내려갈 수 있는 그 만의 자서전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늙어간다. 사람이 평생을 젊은 육체를 유지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몸이 결국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고통은 결국 견딜 수 없어지고, 총명함은 차가운 세찬 물줄기 속에 사라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몸에 새겨진 모든 감각의 기억들은, 오롯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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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3 1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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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4 1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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