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커피비경 - 신의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전국 22개 로스팅 하우스
양선희 지음, 원종경 사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평점 :
강원도에 있는 '쉼'이라는 카페에 가면 이렇게 선반에 잘 볶인 갈색의 원두가 들어 있는 유리병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이 병들을 자세히 보면 숫자가 적혀 있다.. 4.3, 4.6, 3.29, 4.6, 3.28, 4.3.. 이 숫자들은 뭘까?
"손님들이 여기 와서 '맛있는 커피 주세요!' 했을 때 최소한 볶은 지 일주일 이상 지난 것을 주기 위해 적어 둔 로스팅 날짜예요. 로스팅 한 지 20일까지도 맛은 나와요. 물론 약하게 볶은 건 하루 이틀 더 가지만요. 그런데 18~19일 지나면 향기가 미세하게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볶은지 15일 이상 지난 건 뺍니다."
"그럼 그건 방향제로 쓰나요?"
"운 좋은 손님들이 향기를 얻어가지요."
와우. 나는 이 대사를 읽는 순간 강원도의 그곳에 직접 가보고 싶어졌다. 갓 로스팅 된 원두로 내린 커피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유의 향기가 있다. 그런데 눈만 돌려도 숱하게 마주치는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의 원두들은 모두 로스팅한 지 한참은 된 게 분명한 향과 맛을 내니까. 하지만 도심지에서 어디 그리 쉽게 이런 집을 만날 수 있냐는 말이다. 서울을 벗어나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커피 명소를 발굴한 이 책에는 정말 '명품'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커피 하우스 스물 두 곳이 소개되어 있다. 저자인 양선희 작가가 온라인 매거진 ‘커피 타임즈’를 운영하며 2년여의 기간 동안 100여 곳이 넘는 커피 하우스를 발로 뛰며 직접 취재해 그 중에 스물 두 곳을 골랐다고 하니 뭐 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부산에 있는 '까사오로의 주인인 정승기 씨는 마인드가 독특하다. 커피는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음료이기 때문에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일도 행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향기로운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 '까사오로'의 커피라고 하니, 꼭 한번은 마셔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마음이 있는 커피랑 마음이 없는 커피랑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저는 기분이 우울할 때나 몸이 아플 때는 드립을 안 해요. 제 몸과 마음 상태가 안 좋으면 은수가 드립을 하고, 은수 몸이나 마음 상태가 안 좋으면 제가 드립을 해요."
세상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주인이 내려주는 커피라니. 얼마나 황홀하고 깊은 향과 맛을 낼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이다. 사실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원두, 로스팅 등 커피 그 자체의 맛이 전부는 아니다. <모든 것이 동일한 조건일 때 그 집의 커피 맛을 결정짓는 건 그 커피 집 주인의 품성이라고 봐. 특히 그 집에서 커피를 볶고, 핸드 드립을 하는 경우에는 그 점이 커피 맛의 99% 결정한다고 봐. 나머지 1%는 그 집의 분위기겠지>라는 대목처럼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좋은 마음과 긍정적인 감정 상태가 과연 커피의 맛까지 다르게 할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커피의 맛을 음미하면서 마셔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에 커피라는 음료를 마시면 안 되는 그 나이에,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이렇게 쓴 걸 왜 먹냐고. 엄마가 그때 농담처럼 말했었다.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라고. 인생의 여러 면을 겪어본 다음에 어른이 되어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는 음식이 있는 거라고. 어릴 때는 하면 안 된다.는 금기에 대해 다소의 반항 심같은 것도 있었으므로, 그냥 둘러대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커피가 점점 더 맛있게 느껴지면 질수록, 어쩐지 어린 시절 엄마의 그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 내가 인생의 쓴맛, 단맛을 어느 정도는 겪었기 때문에, 이렇게 쓴 커피가 달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겠다. 뭐 이런 생각 말이다. 지금도 친구들 중에는 아메리카노는 써서 못 먹겠다고, 그 쓴 걸 무슨 맛으로 먹냐며 카페라떼나 마끼아또 등 단 커피만 먹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아메리카노에 쓴 맛만 있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속에는 깊은 풍미와 향과 그윽한 맛이 숨어져 있다.
나는 하루에 아메리카노 두세 잔은 꼭 마셔야 하는 소위 커피 중독자이다. 커피 드리퍼도 종류 별로 서너 가지 가지고 있고, 집에 에스프레소 머신도 있을 만큼 커피를 즐겨 마시는데, 덕분에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두통이 생길 정도이다. 워낙 오랜 시간, 다양한 원두를, 다양한 방법으로 마셔보았기 때문에 어떤 집의 커피가 신맛이 강하고, 향이 좋고, 끝 맛이 텁텁하고, 단맛이 나는지 안다. 하지만 집과 회사를 오가는, 그러니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도심지에는 이런 커피 맛 집이 사실 없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프랜차이즈 전문점 밖에 없어서, 이렇게 책으로나마 멋진 커피 전문점들을 소개받게 되어서 참 행복했다. 아마도 이번 여름 휴가 때는 이 책에 소개된 집 중에 한 곳을 가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