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윤성희 외 지음, 강미연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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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해 보는 도전이나 시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후회나 두려움처럼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었다.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여러 번 해 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하고 싶다는 사춘기적 마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해야할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혼자 엉뚱한 짓을 해서 우스꽝스러워지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마음 같은 것. 때문에 뭔가를 한다는 건 정말이지 부담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재인은 '한다'와 '하지 않는다' 사이에서는 '한다' 쪽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무조건 남는 게 있다고 믿는 편이었다.             - 김화진, '근육의 모양' 중에서, p.80



재인은 다이어리에 꼭 해야 할 것들 혹은 해본 것 리스트를 적는다. 논술 학원 아르바이트, 원 나잇, 양다리, 전액 장학금, 절교, 독립 등 그리고 이제 그 리스트에 파혼과 필라테스, 담배가 기록되는 중이다. 서른두 살의 겨울,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남자친구와 이별했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일과 해치는 일을 동시에 해보기로 한다. 해가 갈수록 안 하던 뭔가를 한다는 게 어렵고 생각만으로 마음이 바빠졌으나, 그럼에도 언제나 '한다'와 '하지 않는다'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경우 재인은 '한다' 쪽을 선택하곤 했다. 무슨 일이든 무조건 남는 게 있다고 믿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은영은 대기업에 다니다 그만두고 필라테스 강사가 된 지 사년 차였다. 대기업 신입 사원 때 받던 월급을 사년 차 강사 때 받고 있었지만, 은영은 이 일을 좋아했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반쯤은 관상쟁이가 된다는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얼굴에 깃든 표정을 살펴보는 일은 좋아했다. 1회 체험 수업을 마치고 곧바로 등록한 재인의 얼굴에서 은영이 읽은 것은 기분이나 감정이 흐르지 않게 단단히 걸어 두려는 의지였다. 마음이 약해서 단단하게 걸어 잠그는, 그런 얼굴과 마주할 때마다 은영은 이상하게 마음이 기울곤 했다. 재인은 재인은 왠지 모르게 축났던 몸을 회복하기 위해 시작한 필라테스를 통해 자신을 상처 입힌 경험들마저도 잃은 것이 아니라 얻은 것이라는 발견을 하게 된다. 독립, 절교, 파혼, 끊어진 관계들의 기록들이 흉터가 아니라 근육이라고, 누가 날 해쳐서 남은 흔적이 아니라 내가 사용해서 남은 흔적이라고 말이다. 김화진의 <근육의 모양>은 아쉬웠던 경험조차 실패가 아니라 '해 본 것'이라고 이름 붙이며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의지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런 마음이라면 어떤 일이든 시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음은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 주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꼼짝도 못 하는 육체에 수감되는 형벌이라니.              - 백수린, '흑설탕 캔디' 중에서, p.231


창비교육의 테마 소설 시리즈 열두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현직 교사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제자들을 걱정하며, 앞으로의 사회생활에 지표가 되어 줄 작품들을 선별해서 엮어 왔다. '우정'을 소재로 함께 걷는 소설, '가족'을 소재로 끌어 안는 소설, '노동'을 주제로 땀 흘리는 소설, '이별'을 주제로 손 흔 드는 소설 '재난'을 테마로 기억하는 소설, '환경'을 테마로 숨 쉬는 소설 등 다양한 작품들이 나왔었다. 이번에 나온 <시작하는 소설>은 '시작'을 테마로 한 7편의 단편 소설을 묶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서 발표가 되었던 소설들이라, 처음 만나는 작품도 있었지만 이미 읽었던 이야기들도 많았다. 하지만 분명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느 때 읽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또한 소설이다. 그래서 더욱 앤솔로지 형태로 묶인 테마 소설 시리즈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윤성희, 장류진, 조경란, 김화진, 정소현, 박형서, 백수린 작가가 그려내는 이야기들은 10대 청소년의 ‘성장’과 ‘우정의 시작’부터 20대의 ‘첫 출근’, 70대에 시작한 ‘사랑’까지 삶에서 마주할 법한 시작의 장면을 연령대별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시작'과 마주하게 된다. 학교에 입학할 때, 친한 친구가 생기고, 연애를 하고, 대입을 치르고, 직장에 입사하고, 결혼을 하는 등 누구나 사는 건 처음이기에 시작의 순간들을 겪게 된다.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고,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말이다. 꼭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큰 변화가 아니더라도, 소소하게 시도하는 모든 것들이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결코 쉽지 않고, 부담스럽기도,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시작들이 쌓여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이 책은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응원을 건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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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성적을 만드는 최소한의 노트정리
정혜민 지음 / 메가스터디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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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48,000여 명의 팔로워를 가지고 있는 공스타그래머 '햄이'의 첫 책이 나왔다. 고등학교 3학년때부터 다양한 노트 정리법, 플래너 작성법, 공부 노하우들을 손글씨로 SNS를 통해 공유해온 저자는 현재 서울대학교 독어교육과에 재학 중이다. 


지방 일반고에서 서울대에 합격한 저자의 노하우도 궁금했고, SNS를 통해 보면 정말 깔끔하고 예뻤던 노트 정리 비법도 너무 궁금해서 책을 만나보게 되었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를 보면 공부와 관련된 콘텐츠가 꽤나 많다. 그만큼 공부법에 관해 사람들이 관심이 많기 때문일텐데, 학창시절부터 우리가 해 온 필기와 노트 정리가 어떻게 다른지 고수들의 정리법을 보면 비교가 확연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실용성있게, 공부에 도움이 되는 노트 정리를 할 수 있는 걸까. 


저자는 초등학교 고학년때부터 노트 정리를 시작한 이후로, 중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노트 정리를 공부법으로 줄곧 활용해왔다고 한다. 긴 시간을 거쳐 수없이 많은 방법들을 해보며 시행착오를 겪어 왔기에 지금은 나름대로 가장 효율적으로 노트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 내용을 이 책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 




노트 정리를 위한 준비물부터 차근차근 정리가 되어 있다. 각각의 노트별 장단점, 나에게 맞는 노트를 고르는 기준, 그리고 저자가 사용한 노트와 펜의 종류를 살펴보고, 글씨 색깔, 노트 정리 틀과 구조, 자주 사용하는 표현 방식과 기호 등 노트를 효과적으로 쓰기 위한 자신만의 규칙을 정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부분들을 정하고 난 뒤 노트를 펼치기 전에 머릿속에서 내용을 구조화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트 정리를 하면서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기억을 하게 되어 외우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냥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손으로 쓰면 더 기억이 잘 되니 효율적인 공부 방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하는 필기 노하우와 저자만의 공부 꿀팁, 수업 직후 필기 보완 방법을 알려 준 뒤 본격적인 노트 정리에 들어간다. 다양한 그림 자료를 통해서 실제 저자가 사용하는 노트 정리 방법들을 만날 수 있어서 누구나 이해하고, 쉽게 따라해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노트 정리를 해놓고 막상 공부할 때는 잘 안 보게 돼서 보람이 없다'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도 만날 수 있어, 노트를 활용해보고 싶었지만 실패해왔다면 도움이 될 것 같다. 




공부가 아니더라도 직장에서, 일상에서 노트 정리가 필요한 일은 생각보다 꽤 많다. 작성법, 먼슬리, 위클리, 데일리 플랜 세우는 법은 다이어리를 사용할 때 활용할 수 있고, 태블릿 활용법, 과목별 노트 정리 방법 등은 직장인들에게도 유용하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학교 졸업 후에도 각종 자격증 시험을 대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도 이 책이 아주 큰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누구나 노트만 있으면 따라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저비용으로 고효율을 올릴 수 있는 공부법이니 말이다. 


이 책은 노트 정리를 하는 방법과 그렇게 정리한 노트로 공부하는 법을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예쁘고 보기 좋게 노트를 정리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노트를 통해서 공부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지금 학생이라면 중간, 기말고사 6주 공부 계획 세우기, 수업시간부터 시험 당일까지 노트로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과목별 노트 정리 노하우 부분을 특히 유심히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SNS를 통해 가장 많이 받은 질문들에 대한 노트 정리 궁금증에 대한 답변과 햄이의 노트 정리 비법도 수록되어 있으니 놓치지 말자. 성적 향상의 확실한 무기가 되어줄 노트 핵심 비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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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을 거두는 시간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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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자 내 기억은 또렷해지는가 하면 흐릿해지는 부분도 생겨났다. 그렇게 강렬했던 무엇을 나는 고3의 힘든 상황으로 묻어버렸다. CF 장면처럼 잘 잡힌 구도의 자전거 모습은 두껍게 장막 쳐진 망각의 뒤안길로 완전히 묻은 채. 동시에 엉키고 꼬이던 내 생각도, 두 사람을 향한 질투의 감정도 완전히 잊었다. 교사에게 들은 희롱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과 함께.

민혁이라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나타나기 전까지 나에게 강수진은 '잊고자 하는 기억'이었던 건 아닐까?             p.72


이혼 후 고스트라이터로 일하는 윤지에게 어느 날 이모에게 연락이 온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성공했지만 가족들로부터 외면받으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기록해두고 싶다는 이유였다. 윤지는 이모의 자서전 출간을 준비하며 가족들의 반대와 마주하게 된다. 이모의 아들 형서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엄마를 초대할 생각이 없었고, 별거 후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이모부 역시 괜히 분란을 만들지 말라고 말한다. 이모가 한평생 끌어안고 살았던 이야기는 뭘까. 


한편, 윤지에게 한 남자가 '강수진'을 기억하느냐고, 연락이 온다. 그는 30여 년 전 죽은 고등학교 동창생의 유품 정리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왜 이제와서 그녀의 물건을 정리한다는 것인지 의아하다. 수진은 교통사고로 죽었고, 나이가 너무 어려서 충격적이긴 했지만 교통사고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불운한 사고 중 하나였다. 윤지는 친구와 함께 수진의 장례식에도 갔었지만, 특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했다. 당시 동창 사이에서 수진의 사고에 대한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기에, 윤지는 의식적으로 그녀를 지워버리려고 했었다. 그런데 민혁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잊고 살았던' 과거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윤지가 애써 지워버려야 했던 과거는 무엇이었을까. 어긋난 기억의 조각을 되찾을 수록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기억이 주관적이라는 네 말이 맞다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걸 수도 있어.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이 와전된 걸 수도 있잖아."

"그건 진짜 아니야. 기억이 주관적인 것과는 별개로 진실은 변하지 않는 거잖아. 그래, 두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한 사람은 그런 마음이었을 거야. 사실 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느끼던 일이었잖니. 우리가 아무리 어렸다지만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으니까. 단지 낯설었던 거야. 지금 같은 세상은 아니었으니까.              p.238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건을 경험했더라도 개인의 감정과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작용하는 것이 기억의 실체이다.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어제 본 듯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기억하는 것과 전혀 반대로 상대의 기억에 아로 새겨져 있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사람의 기억이란 너무도 주관적인 것이어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기억을 대조해보면 그 차이가 꽤나 크다는 점이 놀랍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작품 속 윤지는 마치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오랜 세월 자신의 감정과 선재와 수진이라는 동창에 대한 기억을 왜곡시키고, 망각해왔다. 그리고 잊고 싶었던 자신의 순수한 악의와 대면하게 된다. 이모 역시 자서전을 쓰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로 자신이 명백한 악의로 꽃다운 사람을 사지로 몰았던 과거를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자신을 평생 괴롭혀온 죄의식이었다고 말이다.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역사추리소설로 1억원 고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선영 작가의 신작이다. <지문>이라는 스릴러 작품으로 만났었는데, 가정폭력, 아동학대, 대학 내 성폭력 등 가정과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한가운데서 불합리한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인물들의 분투기를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 신작에서는 욕망과 집착, 그리고 희생과 용서라는 사랑의 양면성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누군가에게는 희생의 다른 이름이고, 누군가에겐 악의의 가면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 작품을 통해 망각의 장막 너머에 존재하는 여러 감정들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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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 창비교육 성장소설 13
보린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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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입술을 몇 번 옴죽거리더니 다시 손에 들었다.

"뭐든 좋으니까, 너 하고 싶은 거 해."

1학년 때 진로 희망 조사서를 내밀었더니 아버지는 읽어 보지도 않고 종이를 도로 건넸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구워 먹든 쪄 먹든 니 인생 너 알아서 해라.'

뭐든 상관없다와 뭐든 좋다. 아버지는 달라졌다. 불 꺼진 집, 대화 없는 저녁, 열리지 않는 문, 닫힌 방, 방치된 시간들.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던 일상이 이렇게 간단히 바뀔 줄은 몰랐다.            p.76~77


그날 고3인 연우는 독감에 걸려 체육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교실 책상에 혼자 남아 있었다. 몸이 으슬으슬했고,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빙빙 돌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깼는데, 교실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런데 투명한 막 같은 게 사방을 가로막고 있어 연우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었다. 게다가 조금 높은 곳에 주먹만한 빨간 공이 떠 있었다. 홀로그램 한 가운데 '당신은 채집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그렇게 투명 정육면체에 갇힌 연우는 강제로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이상한 것은 큐브 밖으로 빈 교실에 아이들이 들어오고 수업하고 다시 떠나고 텅 비는 일상이 지속되었다는 거다. 대체 연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연우는 제자리로 돌려보내지고, 자신이 큐브 속에 있었던 동안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친구들을 만나며 일상을 되찾으려 하지만, 연우는 채집 때문에 갖게 된 ‘장치’와 거기에 입력된 복제된 자아인 젤리곰, 그리고 장치의 항상성 시스템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한다. 채집에서 풀려난 뒤 줄곧 젤리 곰이 말을 걸어온다. 빨갛고 투명한 플라스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젤리곰은 말할 때마다 조각 안에서 불빛이 반짝인다. 젤리곰은 자기가 연우랑 똑같은 목소리로, '나는 우연우, 너야.'라고 말한다. 자신이 연우의 복제된 자아라고, 그저 의식이 젤리 곰 속에 담긴 것뿐이라고 말이다. 환청이나 망상이 아닐까 의심하던 연우는 점차 젤리곰과 대화를 나누는 데 익숙해진다. 하지만 점차 뭐가 현실이고 망상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비가 오면 비를 막아주고, 덥거나 춥지 않게 해주며, 바닷물에 빠졌을 때는 큐브 모양으로 바닷물을 사라지게 해주는 시스템 덕분에 뭐가 진짜이고 망상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연우는 큐브에서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갇혀 있었고, 1년이 지났어도 지난여름 교실의 공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때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것도 리셋하지 못한 채, 되풀이되는 과거의 한순간 속에 갇혀 있었다... 큐브는 온실을 복사한 온실이었다. 그 온실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연우가 스스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의지력이 더 강하면 버텨 낼 수 있지 않을까?"

"의지력도 타고나는 거야. 너, 타고났어?"

젤리 곰이 되물었다.

"타고났겠냐."              p.178~179


연우의 고3친구들은 이제 직장인이나 대학생, 재수생이 되었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연우는 도서관을 다니며 재수를 준비한다. 서퍼가 꿈이라던 해고니는 대입을 포기하고 서프 숍에서 일하는 중이지만, 더 이상 바다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해고니를 좋아했던 나루는 대학에 다니면서 푸드 트럭을 하고 있었고, 연우도 무엇이든 되고 싶었다. 전부터 좋아했던 해고니에게 고백했다 차이고, 다시 도전해서 연애를 하게 되지만 해고니는 연우가 곧 떠날 거라고 생각하고, 연우는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보게 된다. 작고 심심한 마을이었기에 연우가 1년 만에 돌아온 뒤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장기 매매범에게 잡혀갔다가 콩팥 하나를 잃은 채로 돌아왔다더라, 신내림을 받고 무병을 앓다 돌아왔다더라, 깡패 조직에 끌려가 앵벌이 노릇을 하다가 돌아왔다더라 등등..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일관된 결론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것, 그래서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으로 끝났다. 물론 연우가 큐브 속에 갇혀 우주를 떠돌았다는 진실을 말하더라도 아무도 믿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시스템이 통제하는 큐브에 갇힌 온실 속 존재'라는 흥미로운 소재와 강원도 고성의 바닷가 마을에 사는 고등학교 3학년들의 진로에 대한 고민과 불안 등 현실적인 부분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대학을 갈지 말지, 고향을 떠날지 말지, 안 떠난다면 무얼 하며 살지 등 미래에 대한 청소년들의 현실적인 고민과 불안, 그리고 풋풋하고 달콤한 연애의 시간들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성장해나가는 서사까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자아 인식과 정체성 혼란, 진로에 대한 고민은 매우 현실적이지만, 그것들을 SF적인 상상력으로 잘 버무려 놓아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기도 하다. 보린 작가는 리얼리즘과 SF의 결합을 통해 보다 현실적인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루한 현실을 가뿐하게 넘어선 새로운 청소년 문학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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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 버리기 연습 - 학습당한 가짜 감정으로부터 내 삶을 되찾는 법
데번 프라이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디플롯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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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내 욕구와 감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결함을 벌충하려면 근면하고 고상하며 눈에 거슬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어떤 성취를 거두거나 긍정적인 관심을 받을 때마다 내게 친숙하고 소중하며 나보다 많은 관심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너무나도 많은 친구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빈곤,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성차별로 고통받고 있다. 이 세상 어디를 돌아봐도 나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제들이 가득하다. 내가 아무리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고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려고 해도, 좀 더 다정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도 내가 갚을 수 있는 건 미미할 뿐이고 빚은 끝없이 쌓여가는 것만 같다.                 p.17~18


장애인은 자신의 장애를 남들에게 뒤처지는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되며,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열심히 일해야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여성은 직장 내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흑인은 말투를 절제함으로써 업계에서의 인종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사회가 떠넘긴 체제적 수치심(Systemic Shame)이다. 그에 따르면 세계적 팬데믹은 기업의 잔혹함과 정부의 태만이 아니라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대규모 총기 난사는 백인 우월주의자나 기타 혐오자의 행동이 아니라 사악하고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이 생각 없이 저지르는 짓이다. 


이 책은 이러한 체제적 수치심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지나친 노력과 자기계발을 그만두고, 사회가 개인에게 떠넘긴 책임들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것들로 자기 혐오와 수치심,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이제는 사회가 권하는 수치심을 튕겨내고 내 안의 회복탄력성을 길러야 할 때인 것이다. 소수자이자 사회심리학자로서 저자는 우리를 실패자로 만드는 감정들, 즉 수치심과 자기혐오, 자기비판을 내려놓고 진짜 잘못한 것들에 눈 돌리라고 말한다. '체제적 수치심'은 내가 처한 상황은 전부 내 탓이며 이런 상황을 극복할 방법은 나의 선행과 노력뿐이라는 강력한 자기혐오성 신념을 말한다. 교통사고부터 각종 전쟁, 흡연, 질병, 백신 접종과 기후위기까지 사회는 '체제적 수치심'을 자극해 개인에게 문제를 떠넘겨왔다. 이제 우리가 그러한 체제적 수치심에 맞서 싸워야 할 때인 것이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체제적 수치심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체제적 수치심은 우리가 영원히 성취할 수 없고 인정받지 못할 일에 매달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며, 남들을 평가하고 비난할 뿐 아니라 자신을 책망하게 한다. 우리는 이런 가치 체계에 의문을 던질 때 비로소 자격을 인정받는다는 것 자체가 허구임을 깨닫는다. 사랑받을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수용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우리에게 발견되기만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지금의 엉망진창인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p.366~367


'수치심(shame)'이라는 단어는 '가리다, 숨기다'를 뜻하는 원시 인도 유럽어 어근 스켑(skem)에서 나왔다. 수치심이란 자신을 주변 사회로부터 분리하고 숨기는 것이다. 외면하거나, 숨거나, 남들과 거리를 두는 모습으로 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수치심은 항상 개인의 사회적 위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아이나 노예, 하층 계급 또는 카스트에 속하는 사람은 수치심을 느끼는 집단으로 묘사될 가능성이 성인이나 자유인보다 높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사회적 낙인과 수치심은 항상 연결되어왔다. 범죄자를 영원히 알아볼 수 있도록 그의 피부에 새기는 표식을 의미하는 낙인찍기는 누군가를 규칙 위반자이자 수치심을 느껴야 마땅한 사람으로 표시하는 물리적 행위였다. 인간에게 수치심이 필요하다는 믿음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지만, 기독교가 생겨나고 농업과 산업의 발달로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이 책은 이렇게 역사와 사회학, 심리학을 넘나들며 차근차근 수치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라이스는 우리가 최선의 선택을 했음에도 자꾸만 노력이 부족했다며 자책하고 심리적으로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 연구했다. 그리고 이 사회가 ‘체제적 수치심’이라는 프레임으로 움직이고 있다는데서 그에 대한 답을 찾는다. 모두가 수치심에 휘둘리는 사이, 빈곤을 낳는 사회적 구조,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막는 유리천장, 기업들이 끼치는 막대한 환경 피해와 대중을 속이는 그린워싱 등 사회와 정부, 기업들의 책임은 어느새 밀려난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할 것은 현실을 기꺼이 직면하고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자문해보는 것이다. 수많은 시도 끝에 ‘해도 안 된다’는 자괴감과, 자신이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수치심, 노력해도 남보다 못하다는 열패감, 급기야 사회적 모순마저 개인의 탓이 되어 버린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이었다. 기후변화, 소득 불평등, 사회적 인종차별, 트랜스젠더 혐오 폭력, 세계적 팬데믹 앞에서 더 이상 무기력해지거나 낙담하지 말자.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함께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어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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