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 창비교육 성장소설 13
보린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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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입술을 몇 번 옴죽거리더니 다시 손에 들었다.

"뭐든 좋으니까, 너 하고 싶은 거 해."

1학년 때 진로 희망 조사서를 내밀었더니 아버지는 읽어 보지도 않고 종이를 도로 건넸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구워 먹든 쪄 먹든 니 인생 너 알아서 해라.'

뭐든 상관없다와 뭐든 좋다. 아버지는 달라졌다. 불 꺼진 집, 대화 없는 저녁, 열리지 않는 문, 닫힌 방, 방치된 시간들.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던 일상이 이렇게 간단히 바뀔 줄은 몰랐다.            p.76~77


그날 고3인 연우는 독감에 걸려 체육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교실 책상에 혼자 남아 있었다. 몸이 으슬으슬했고,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빙빙 돌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깼는데, 교실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런데 투명한 막 같은 게 사방을 가로막고 있어 연우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었다. 게다가 조금 높은 곳에 주먹만한 빨간 공이 떠 있었다. 홀로그램 한 가운데 '당신은 채집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그렇게 투명 정육면체에 갇힌 연우는 강제로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이상한 것은 큐브 밖으로 빈 교실에 아이들이 들어오고 수업하고 다시 떠나고 텅 비는 일상이 지속되었다는 거다. 대체 연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연우는 제자리로 돌려보내지고, 자신이 큐브 속에 있었던 동안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친구들을 만나며 일상을 되찾으려 하지만, 연우는 채집 때문에 갖게 된 ‘장치’와 거기에 입력된 복제된 자아인 젤리곰, 그리고 장치의 항상성 시스템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한다. 채집에서 풀려난 뒤 줄곧 젤리 곰이 말을 걸어온다. 빨갛고 투명한 플라스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젤리곰은 말할 때마다 조각 안에서 불빛이 반짝인다. 젤리곰은 자기가 연우랑 똑같은 목소리로, '나는 우연우, 너야.'라고 말한다. 자신이 연우의 복제된 자아라고, 그저 의식이 젤리 곰 속에 담긴 것뿐이라고 말이다. 환청이나 망상이 아닐까 의심하던 연우는 점차 젤리곰과 대화를 나누는 데 익숙해진다. 하지만 점차 뭐가 현실이고 망상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비가 오면 비를 막아주고, 덥거나 춥지 않게 해주며, 바닷물에 빠졌을 때는 큐브 모양으로 바닷물을 사라지게 해주는 시스템 덕분에 뭐가 진짜이고 망상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연우는 큐브에서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갇혀 있었고, 1년이 지났어도 지난여름 교실의 공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때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것도 리셋하지 못한 채, 되풀이되는 과거의 한순간 속에 갇혀 있었다... 큐브는 온실을 복사한 온실이었다. 그 온실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연우가 스스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의지력이 더 강하면 버텨 낼 수 있지 않을까?"

"의지력도 타고나는 거야. 너, 타고났어?"

젤리 곰이 되물었다.

"타고났겠냐."              p.178~179


연우의 고3친구들은 이제 직장인이나 대학생, 재수생이 되었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연우는 도서관을 다니며 재수를 준비한다. 서퍼가 꿈이라던 해고니는 대입을 포기하고 서프 숍에서 일하는 중이지만, 더 이상 바다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해고니를 좋아했던 나루는 대학에 다니면서 푸드 트럭을 하고 있었고, 연우도 무엇이든 되고 싶었다. 전부터 좋아했던 해고니에게 고백했다 차이고, 다시 도전해서 연애를 하게 되지만 해고니는 연우가 곧 떠날 거라고 생각하고, 연우는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보게 된다. 작고 심심한 마을이었기에 연우가 1년 만에 돌아온 뒤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장기 매매범에게 잡혀갔다가 콩팥 하나를 잃은 채로 돌아왔다더라, 신내림을 받고 무병을 앓다 돌아왔다더라, 깡패 조직에 끌려가 앵벌이 노릇을 하다가 돌아왔다더라 등등..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일관된 결론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것, 그래서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으로 끝났다. 물론 연우가 큐브 속에 갇혀 우주를 떠돌았다는 진실을 말하더라도 아무도 믿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시스템이 통제하는 큐브에 갇힌 온실 속 존재'라는 흥미로운 소재와 강원도 고성의 바닷가 마을에 사는 고등학교 3학년들의 진로에 대한 고민과 불안 등 현실적인 부분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대학을 갈지 말지, 고향을 떠날지 말지, 안 떠난다면 무얼 하며 살지 등 미래에 대한 청소년들의 현실적인 고민과 불안, 그리고 풋풋하고 달콤한 연애의 시간들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성장해나가는 서사까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자아 인식과 정체성 혼란, 진로에 대한 고민은 매우 현실적이지만, 그것들을 SF적인 상상력으로 잘 버무려 놓아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기도 하다. 보린 작가는 리얼리즘과 SF의 결합을 통해 보다 현실적인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루한 현실을 가뿐하게 넘어선 새로운 청소년 문학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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