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의 도시
연여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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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지난 23년간 줄곧 면역인이었다.

만약이라는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강한 거부감이 밀려왔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라는 단어는 이 모든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p.77


전 세계적인 토양 오염 이후 이제껏 인류에게서 볼 수 없었던 뿔을 가진 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도시마다 비율의 차이는 있으나 전체 인구의 절반은 각인이었고, 나머지는 면역인이라 불렀다. 각인은 뿔을 가진 인종이라고 멸시받았고, 아름다운 뿔을 노리는 커터의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뿔이 자라거나 회복할 때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 했는데,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흑각을 구해와야했다. 세계는 지상과 지하, 그리고 공중도시 라뎀으로 나뉘어 있었고, 자본가와 면역인을 위한 성역이 되어버린 라뎀이 도시 전체를 지배하고 통제했다. 라뎀은 재배부터 유통까지 엄격하게 관리한 흑각을 구매해 먹도록 했지만, 각인인 뱅커가 한 덩이에 40페이짜리 흑각을 고민 없이 집어 들어 살 수는 없었다. 결국 뿔이 자라는 고통은 각인과 그 가족이 감당해야 할 과제가 되어 버린다.


시진은 태어날 때부터 줄곧 빛이 들지 않는 그늘에서 자라왔다. 시진은 면역인으로 태어났지만, 가족 중 유일하게 누나는 '각인'이었다. 누나는 그로 인해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 했고, 그래서 시진은 열 살 때부터 암석사막으로 나가 흑각을 구해와야만 했다.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신 뒤 세상에 둘만 남게 된 남매는 서로를 누구보다 아꼈지만, 각인과 면역인이라는 차이에서 오는 거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 오해를 쌓았고, 결국 자신의 삶을 비관하던 유진이 행방불명되고 만 것이다. 시진은 포기하지 않고 누나를 찾으면서, 암석사막의 야생 흑각을 불법 채취해 납품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평범했던 시진의 일상은 이웃이자 친구였던 ‘베르트’가 각인 혐오자에게 살해를 당하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시진은 친구의 사망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24시간 내내 햇볕이 들지 않는 위험한 지역 코어와 그늘을 넘나들며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산산이 조각난 세계에서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한 시진의 모험은 어떤 비밀들과 만나게 될까. 




동시에 '결코 가는 일 따위 없을 것'이라 장담했던 공중도시의 밤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시진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시진은 꿈속에서 아주 생소한 장소에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체로 익숙하거나 직접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시진은 거길 꿈의 입구라고 불렀다. 그러나 꿈이 흘러갈수록 일상에 없던 오류나 예외가 막무가내로 끼어들고 그때마다 새로운 당혹감과 충돌해야 했다... 지금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p.390


위픽 시리즈 <2학기 한정 도서부>와 핀 시리즈 장르 <부적격자의 차트>로 만났던 연여름 작가의 신작이다. 2005년, 영국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본 작가는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린다. 이 소녀가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방법은 없었을까? 작가는 그렇게 미술관에서 강물에 빠진 오필리아가 죽기 전에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보며 ‘마침내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한다. 본격적인 작품 집필에 착수한 이후 장장 4년에 걸쳐 완성되었기에 탄탄하게 잘 직조된 서서가 만들어 졌다. 도시의 이름을 비롯해서 작품 여기저기에 셰익스피어의 희곡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재미를 안겨 준다. 


주권과 정체성을 빼앗긴 도시에서 방향을 찾고자 분투하는 소년의 이야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는 현실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세상은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으니까. 누구도 배척당하거나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 작가가 작품을 집필하면서 참고한 도서의 목록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사태를 다루고 있었다고 하는데, 매일같이 생사를 다투는 이들의 삶에 대해서 고스란히 이 작품에 담긴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부재함'보다는 '존재함'으로, '사라짐'보다는 '드러남' 쪽으로 향하기를 바라며 소년의 여정을 그렸다고 말한다. 소설 속에 그려진 참혹한 현실은 허구이지만 현실 속 그것에서 결코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어느 곳에는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매순간 무참히 죽어가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우리가 더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삶의 가치들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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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6
위수정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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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옥의 머릿속에는 스틸 컷으로 저장되어 있는 무수한 파일들이 있었다. 불면의 밤이면 그 파일들이 하나씩 재생되었다. 과거로 과거로 향하는 그 파일들에는 기옥의 실수와 실패와 상처와 기쁨과 환희의 순간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것의 내용이 무엇이건 그것이 과거라는 사실만으로 기옥은 공허해졌다. 어둠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기쁨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에. 어두운 방 안에 빠르게 늙어가는 내가 홀로 누워 있기 때문에.            p.55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 마지막 공연이 끝난다.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극장을 가득 메웠고, 배우들의 커튼콜이 시작된다. 주인공 메리 역을 맡은 중년의 배우 기옥은 스캔들을 딛고 8년 만의 연극 공연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50대 여배우는 무대의 안과 밖이 불과 몇 발자국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늘 고민한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한결같이 살뜰히 보살피는 매니저 윤주는 기옥을 비롯한 연예인들 모두 하는 일에 비해 돈을 많이 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가진 부는 과연 그들의 노력만으로 얻은 것일까 속으로 생각하며 코웃음을 친다. 윤주는 기옥을 위하면서도 언제부턴가 그 반대의 욕망이 자신의 내부에서 충돌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기옥의 상대역인 남편 제임스를 맡은 태인은 연극으로 시작해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 진출한 배우였다. 그의 처가가 유명 중식당을 운영하는 재력가라는 사실은 연극판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술버릇이 좋지 않다는 소문 또한 업계에서는 잘 알려진 얘기였다. 젠틀한 외모 덕분에 대중들은 그의 주사를 루머 정도로 취급했지만, 언젠가 증거가 발각되면 배우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다. 그는 만취하면 한 명에게 꽂혔다. 어린 여자 스태프인 경우도, 선배 배우거나 술집 종업원인 경우도 있었다. 추근거림이나 비아냥의 형태로, 또는 짖궂은 농담이나 지나친 칭찬 세례일 때도 있었는데, 무엇이든 상대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한달 간의 연극 공연이 끝난 뒤 벌어진 술자리에서 하필 태인이 꽂힌 상대는 운이 없게도 기옥이었다. 주변에 앉아 있던 이들을 모두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불쾌한 언사가 이어졌지만, 기억은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그 자리를 이겨낸다. 그리고 다음 날, 태인이 새벽에 지방 별장으로 내려가다 교통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 오고 기옥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나는 한 치 앞을 예감한다. 그걸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다. 상호가 고개를 돌려 내 팔을 잡는다. 그 힘이 달콤하다. 하지만 상호야, 이것은 운명도 뭣도 아니다. 행운도 불행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누구를 탓할 수 없다. 그게 무엇이든 아주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홀로 남았다.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타오르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비명이자 환호.             p.142~143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 쉰여섯 번째 작품은 위수정 작가의 <fin>이다. 자신만의 고통과 고독을 품은 채 그 감정들을 감추고 살아가는 네 남녀의 욕망으로 질주하는 삶이 단막극처럼 펼쳐지는 작품이다. 핀 시리즈는 늘 작품과 잘 어울리는 아티스트와의 작업으로 표지를 만들었는데, 이번에 책과 함께 받은 책자를 보니 아티스트별로 시리즈를 정리해 두었는데, 확실히 분위기가 각각 달라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더 좋았다. 


이 작품은 두 명의 배우, 그리고 각자의 메니저까지 네 남녀의 각기 다른 삶을 통해 선망과 질투, 분노와 연민, 동경과 증오 등으로 점철된 복잡 미묘한 우리 인생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천천히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암전되며 한 편의 연극이 끝나면, 무대 뒤와 무대 바깥에서의 삶은 그제야 다시 시작된다. 그러니 이 작품은 시작과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도 하다. 무대 위 연극은 삶을 가장하고 연출되지만, 정작 무대 밖 일상에서도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게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조금씩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 싫은데 그렇지 않은 척, 좋은 데 티내기 싫은 척, 환멸과 분노를 감추고, 고통과 외로움을 모른 척 외면하면서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각자의 인생에서 스스로가 맡은 배역은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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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에세이
발터 벤야민 지음, 새뮤얼 타이탄 엮음, 김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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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사에서 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마친 뒤 편히 쉬면서 귀를 기울이고 꿈을 꾸고 기억에 남긴다. 반면에 소설가는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의 일과로부터 동떨어져 홀로 있다. 소설의 산실은 고독한 개인, 곧 자기의 가장 큰 관심사를 본이 되는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하게 된 개인, 남에게 조언을 들은 적도 없고 그 무엇에 대해서도 조언할 수 없는 개인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삶을 묘사할 때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차원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는 뜻이다... 입말로 전수할 수 있는 것들, 곧 대서사가 자산으로 삼는 것들은 소설이 자산으로 삼는 것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p.48~49


아이가 아프면 엄마는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아이가 아픔을 잊고, 약을 먹고 어서 잠에 들기를. 그래서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칭얼대며 잠을 자지 않는 아이를 재우는 데에도, 떼를 쓰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의 시선을 빼앗는 데에도 이야기는 꽤 효과가 크다. 어린 시절 잠들기 전에 조부모, 혹은 부모가 곁에서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준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꽤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안전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던 추억이 되거나, 이야기에 매료되어 글을 쓰는 작가가 되거나, 혹은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믿는 어른이 되도록 만들어 주니 말이다. 


매일 아침 우리는 세계 곳곳의 뉴스 기사를 접하게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 일을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고대인들은 그러한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기술의 대가들이었다. 정보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을 수 있을 때는 그것이 아직 새로운 정보였던 짧은 한때뿐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르다.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무가치해지지 않는다. 이야기의 힘은 이야기 내부에 응축되어 있는 만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 기술은 왜 사라져가는 것일까? 벤야민은 여러 글을 통해 왜 이야기 기술이 사라져가고 있는지에 대해 사유한다. 그리고 권태로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야기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낸다. 우리의 삶에서 권태의 자리가 사라지고 있기에, 권태와 은밀하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행위들 또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예견한 세계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야기를 들려줄 줄 안다는 것은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 기술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야기를 듣고 기억에 담아두는 사람들이 이제 없기 때문이다. 이 기술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귀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손으로는 베를 짜거나 실을 잣는 사람들이 이제 없기 때문이다. 청자가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수록 이야기는 청자의 기억에 더 깊이 새겨진다.              p.139~140


현대문학의 인문 에세이 시리즈 무우의 두 번째 책이다. 조르조 아감벤의 <횔덜린의 광기>에 이어, 이번에 나온 것은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에세이>이다. 그의 대표작 <이야기꾼>을 비롯해 <요한 페터 헤벨>, <소설의 위기>, <리스본 지진> 등 열세 편의 비평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발터 벤야민의 글은 철학과 미학, 문학, 신학 등을 넘나드는 전방위적 사유를 보여준다. 


<이야기꾼>은 20세기의 문학 에세이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너무 유명한 에세이라는 점 때문에 배경지식 없이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소개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꾼>이 탄생하게 된 지적 여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야기꾼 에세이>가 필요하다.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1926년부터 1936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완성한 그의 사유를 고스란히 따라가 볼 수 있다. 정보의 범람과 알고리즘의 확산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이야기를 잃어버렸다. 벤야민은 잃어버린 '이야기의 기술'을 통해 언어와 기억의 운명을 되묻는다.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벤야민이 남긴 질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 책을 통해 이야기가 왜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지, 이야기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지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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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 상·청춘편 - 한 줄기 빛처럼 강렬한 가부키의 세계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진환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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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노의 소매 움직임, 우수 어린 눈빛, 무엇보다 커다란 묶음 머리를 흔들며 춤추는 그 작은 어깨에 객석의 누구도 눈을 떼지 못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다미 바닥에 버려진 도자기 술병조차도 마치 몸을 일으켜 무대를 지켜보는 것만 같습니다.

한지로가 무심결에 중얼거렸습니다.

"이거, 정말 훌륭한 스미조메로구나. 나가사키에 이렇게 실력 좋은 게이샤가 있었던 건가."                p.25


타치바나 키쿠오는 누가 봐도 한 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타고났다. 열네 살의 키쿠오는 야쿠자 가문에서 매년 열리는 정월 신년회에서 가부키 무용극을 공연하고, 마침 그곳에 있던 유명 배우 한지로의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날 반대파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수장이었던 키쿠오의 아버지가 숨을 거두게 되고, 새해 첫날에 발생한 처참한 사건으로 인해 조직은 거의 와해되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키쿠오는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세상은 어린 소년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국 복수에 실패하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어 간사이 지역 가부키 명문가의 당주인 2대손 하나이 한지로에게 의탁하게 된다. 키쿠오는 한지로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인정받는 슌스케와 함께 본격적인 가부키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춤이 좋아서 배우가 되었지만 키쿠오가 맞이하는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가부키는 과거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였으나 현재는 영상 매체에 밀려 점차 소외되어 가는 ‘잊혀 가는 전통’일 뿐이 말이다. 이를 반영하듯 가부키 연극을 공연할 극장도 전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 현저히 줄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키쿠오는 춤에 대한 열정을 계속 이어나간다. 그리고 자라온 환경도 타고난 재능도 다르지만 둘도 없는 라이벌이자 친형제 같은 사이로 지내는 키쿠오와 슌스케. 한쪽은 야쿠자의 아들이었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은 인기 가부키 배우의 후계자였지만 재능은 그에 조금 못 미쳤다. 전통을 중시하는 가부키는 대대로 세습되는 것이 문화였는데, 과연 두 사람은 운명은 어떻게 될까. 어느덧 가문의 후계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고심 끝에 내린 한지로의 결정은 키쿠오와 슌스케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꾸게 되는데, 두 사람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 순간마다 가부키 배우라는 존재에는 그 가족도 포함된다는 걸 사치코는 절실히 느낍니다. 무대에 서는 것은 배우 한 명이지만, 예를 들자면 정글에서 살아가는 짐승 가족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총괄자인 미츠토모 같은 공연 기획 회사와 극장, 후원자에 관객과 매스컴 등, 적이 될 수도 아군이 될 수도 있는 상대로부터 온 가족이 서로를 지키고 싸우며 살아남아야만 하니까요.              p.256


이 작품은 일본에서 올해 6월에 개봉해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국보>의 원작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또한 100만 부 이상 판매될 만큼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오늘날 주류에서 한발 밀려난 ‘가부키’를 소재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가부키 배우의 삶을 통해 예술의 극치에 다다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게 해준다. 가부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더라도 이 작품을 즐기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흔히 가부키라하면 얼굴에 하얀색 분칠을 한 배우들의 모습부터 떠오른다. 가부키 공연의 모든 출연자는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 역할 또한 남성 배우가 맡아서 한다. 남성 배우가 여성으로 분장을 하고, 여성적 발성을 하는 것이다. 여성으로 가장한 남자 배우를 '온나가타'라고 한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3년간 가부키 분장실을 직접 드나들며 생생한 경험을 쌓았다고 한다. 덕분에 온나가타의 세계를 더 리얼하고 환상적으로 작품 속에 재현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는 무려 3시간의 긴 분량이라고 하는데, 19일에 개봉할 예정이니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도 매우 기대가 된다. 가부키의 세계를 스크린에 완벽하게 재현시켜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공연 실황처럼 느껴진다고 하니 말이다. 또 가부키 연습을 실제로 수개월간 소화했다고 하는 요시자와 료의 인생 연기도 매우 궁금하다. 소설을 읽으며 완벽한 연기와 춤, 무대를 만들어내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는 두 라이벌의 구도가 마치 '유리가면'의 남자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것 같다. 상 청춘편에 이어 하편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어서 빨리 다음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다. 자,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도 무대 위에서 땀을 흘리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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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부코스키 타자기 위픽
박지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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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문제는 지금까지 승혜가 살아온 이력일 터였다. 이번 생에서 누군가를 위해 제대로 뜨거워져본 경험도 없으면서 다음 생에서 맥반석으로 살고 싶다는 게 너무 뻔뻔한 욕망이었을까. 혹시 맥반석의 세계도 경력자 같은 신입을 원하는 걸까. 맥반석이 되고 싶으면 그 정도의 온도를 감당할 만한 내공을 쌓고 오라는 경고인 걸까. 참나, 돌이 되는 것도 쉽지 않구나 싶으니 지난 생에 대한 후회나 반성보다는 빈정이 먼저 상하고 말았다.              p.35~36


다음 생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자율적으로 선택이 가능한 '생애전환 시행령'이 국민 법안으로 채택된 세상이다. 사람들은 만 40세와 만 66세에 건강검진을 받으며 생을 전환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게 된다. 인간 여자로 66년을 살아온 승혜에게도 두 번째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의 때가 온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승혜는 고민한다. 막연히 뭔가 좋은 게 되고 싶었던 승혜는 1지망으로 맥반석을 적어내지만 '전환불가' 통보를 받는다. 두 번째에는 아무 수식어 없는 자질구레한 돌을 선택하지만, 자연 상태의 무생물이 되려면 우선 갚아야 할 빚이 없어야 했다. 결국 돌고 돌아 승혜가 부여받은 새로운 생은 타자기였다. 


누구는 맥도날드 키오스크가 되고 누구는 AI 기능을 탑재한 청소기가 되었다고 했다. 쓰임이 많을수록 빨리 유보된 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데 승혜는 기계치에 가까웠다. 최종까지 승혜가 망설인 것들 중에는 고양이 요람과 리코더, 호루라기와 피크닉 바구니, 그리고 타자기가 있었다. 타자기는 적당히 낡은 데다 대단히 새로운 기술을 익히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의 생각의 의지 없이 타인이 쓰는 글을 그대로 받아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 마음에 들어 오래 고민한 끝에 선택하게 된 것이다. 타자기에도 수명이 있어 승혜는 자주 아프고 열에 시달렸지만, 그럼에도 듣기와 기다림의 삶인 타자기의 생을 사랑하게 된다. 빈티지 숍의 아르바이트생 주희가 승혜를 처음 사용했는데, 찰스 부코스키의 <할리우드> 속 문장을 써서 부착한 이후 승혜는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로 불리게 된다. 




타자기의 생을 승혜는 사랑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대로 영영 살아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승혜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타자기에는 분명한 수명이 있었다. 잦은 비명과 드문 탄성을 반복해서 겪는 동안 승혜는 자주 열이 올랐고 자주 한기에 시달렸다. 타자기의 생에도 갱년기의 시간이 도래한 모양이었다. 한번은 지나치게 뜨거워져 사흘 내내 열을 식혀야 했고 한번은 지나치게 얼어붙어 타자의 절반이 제대로 눌리지 않았다. 승혜를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p.57


만 40세까지 인간 종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적절한 성취를 이루지 못하면 무생물로의 전환은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는 문장을 보며 슬퍼졌다. 아프면 치료할 돈이 있고, 돌봐줄 가족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의 미래를 선택할 수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노후 자금이 준비되지 않은 하위 소득 계층의 중장년층일수록 일찌감치 사회적 돌봄 비용이 들지 않는 무생물로의 전환을 결정하고, 극중 승혜와 같은 방식으로 노인 1인에 드는 복지 비용을 당겨쓴다.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이렇게 나이 든다는 것, 말과 기억을 잃어가고 몸이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 여자 고승혜의 몸은 쉰 살 나이에 시작된 오십견부터 건망증에 이르기까지 점점 노화된 몸의 한계를 겪어 왔다. 타자기가 된 고승혜 역시 점점 몇몇 키는 이제 잘 눌리지 않게 되는 등 몸이 둔해지고 있었다. 승혜는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이 작품은 <고독사 워크숍>,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 등의 작품을 써낸 박지영 작가의 신작이다. 너는 늙어서 뭐가 될래?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해변의 타자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작가는 '고승혜 타자기'를 통해 자신이 상상했던 생의 마지막 장면을 그려 낸다. 극중 전환기에 무생물의 생을 선택하는 건 빈곤하고 연고 없는 노인들뿐이었는데, 인간으로서 순리대로 늙어갈 기본 권리와 사회적 효용 가치가 없어도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적 인권에 대해서, 노후 자금 없이 가난하게 홀로 병들고 아프게 늙어갈 일만 남은 노인들'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1년 동안 50편의 이야기를 선보였던 위픽 시리즈 시즌 1이 마무리되고, 곧 시즌2가 이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강화길, 임선우, 단요, 정보라, 김보영, 이미상, 김화진, 정이현, 임솔아 작가 등 라인업만 봐도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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